제목 | 하느님은 찾기 어려운가? - 가톨릭 신앙의 관점(구원관) | 카테고리 | 천주교 | ||
---|---|---|---|---|
작성자오성훈 | 작성일2000-04-06 | 조회수1,340 | 추천수7 | 신고 |
- 하느님은 찾기 어려운가? -
세상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하느님은 찾기 어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이성에 의해서, 우리 노력에 의해서, 그분의 선물에 의해 서 쉽게 발견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 토마스는 우리 이성이 우주의 질서를 바라만 보아도 곧 그 뒤에 있는 지배자를 결론지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지성(知性)이, 시계를 보면 시계 공을 결론지을 수 있듯이, 우주의 질서를 보면 ’하느님의 지성’을 결론 짓게 됩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 대한 이 직접적 지식은 분명하고 명료하 지는 않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본성을 알기 위해서는 좀더 세련된 연구가 필요한 것 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이 막연한 인식과 그 존재에 대한 정식 증명을 수 반한 세련된 숙고 사이의 차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물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과 두 개의 수소 원자와 한 개의 산소 원자로 되어 있다는 화학자의 지식 사이의 차이와도 같습니다. 분명히 사용된 이성은 우주 뒤에 있는 그 것을 만든 힘, 그 법칙을 지도하는 예지(叡智), 모든 사물이 그 목표에 이 르도록 하는 의지(意志)를 증명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는 가까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숨쉬고 움직이며 살아가기 때문이다."(사도 17, 28).
성녀 데레사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무지한 사람이 저에게 하느님은 성총으로만 현존하신다고 말
하곤 하였어요. 나는 그것을 믿을 수가 없었어요. 왜냐고요? 그분 친
히 저에게 현존하신다고 말씀하고 계시니까요. 결국 어느 박학한 분
이 이 의심을 풀어주었어요. 그분은 하느님께서 이 세상과 우리 안에
현존하신다는 것과, 어떻게 우리와 관련을 맺고 계신지를 말했어요.
그리고 이 말은 저에게 퍽 위로가 되었어요."
시인 톰프슨(Francis Thompson)은 하느님께서 모든 사물에 밀접히 존재하신다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을 정교하게 시로 썼습니다.
오, 볼 수 없는 세계,
우리는 당신을 보나이다.
오, 만질 수 없는 세계,
우리는 당신을 만지나이다.
오, 인식할 수 없는 세계,
우리는 당신을 인식하나이다.
파악할 수 없는,
당신을 우리는 붙잡나이다.
하느님은 찾기 어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자신을 우리에 게 선물로 주시는 까닭입니다. 자연적 생명 자체도 선물입니다. 영혼 은 직접 하느님의 손에서 오는 선물이므로 외부에서부터 육신 안으로 들어 와야 합니다. 그리고 초자연적인 생명도 밖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리스도교의 전의미(全意味)는, "하늘에서 내려오시어"라는 신경의 간단한 구절 안에 포함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물가에서 사마 리아 여인에게 하신 말씀을 각 영혼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聖寵)이 무엇인지, 또 너에게 물을 청하 는 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나에게 청했을 것이다. 그러면 내가 너에게 샘솟는 물을 주었을 것이다."(요한 4, 10).
성 바오로는 로마인에게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로마 6, 23).
그리고 후에 에페소인들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구원을 받은 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입고 그리스도를 믿어 서 된 것이지 여러분 자신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에페 2, 8).
하느님께서는 성서 말씀을 통하여, 선물이며 동시에 선물을 주시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것이 사랑의 본질입니다. 아무도 이 신적 선 물을 살 수 없습니다.(유다처럼 받은 다음에 도로 팔 수는 있어도.)
하느님의 선물이 진리뿐이라면, 미약한 지성은 이것을 찾다 움칫 오 므라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선물이 정의(正義)뿐이라면, 우리 죄는 놀라서 이 선물을 멀리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선물은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그분의 마음(聖心)을 그들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리 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찾기 쉽고, 별의 아름다움을 통해서도 발견될 수 있고, 하 느님의 대양(大洋)을 말해주는 바다의 조개껍질 같은 지상의 아주 조 그마한 즐거움 속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면, 어째서 하느님께 오는 영 혼이 그렇게 적은가? 하는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이 잘못은 우리 편에 있지 하느님 편에 있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영혼 들은 대낮에 어두운 방 속에 살면서, 빛이란 찾기 어려운 것이라고 하 는 사람과 같습니다. - 빛을 발견하기 위해 그들이 할 필요가 있는 것 이라고는 단지 커튼을 걷어올리는 것뿐입니다.
하느님은 인간 경험 중에 가장 명백한 사실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모른다면, 우리가 너무 복잡하기 때문이며, 우리 콧대가 거만스럽게 공중에 높이 치솟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무슨 짓입니까!
그분은 우리 발 앞에 계십니다. 우리는 오직 "돌을 굴리고 달려가 기 시작"만 하면 됩니다. 하느님의 성총은 인간의 영혼이 그것을 맞 아들이도록 열려 있는 만큼 인간에게 옵니다. 그분을 받아들이는 인 간 능력의 유일한 제한은 그렇게 하려는 인간의 자발심 뿐입니다.
어떤 목마른 마음은 단지 조그만 틈만을 열어 놓습니다. 또 어떤 마 음은 그들의 빈 물통을 완전히 열어놓아 생명의 물로 가득 채워지도 록 합니다. 몇몇 영혼들은 문을 열고 하느님의 성총의 신선한 공기를 받아들이는 것을 거절하고 지겨운 좌절과 두려움에 가득 찬 무의식의 마음 속에 문을 잠그고 들어앉아 질식하여 죽습니다.
"들어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 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 집에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도 나 와 함께 먹게 될 것이다."(묵시 3, 20).
빗장은 우리 편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편에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서는 문을 부수고 들어오시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들어오시는 것을 막는 것은 우리입니다. 어떤 때 우리는 그분께로부터 달아나기까지 합 니다.
마치 병아리들이 어미닭을 피하듯,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 으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를 모으려 했던가. 그러나 너희는 응 하지 않았다."(마태 23, 27).
우리는 왜 이렇게 행동할까요? 참으로 믿기 어려운 사실입니다. 그 러기에 우리는 주님의 경고를 듣습니다.
"어떤 사람은 빛보다 어둠을 사랑한다."
죄에 부수되는 비극은, 우리가 잘못을 저지른 뒤에, 하느님께서 우리 에게 옳고 좋은 것을 행하도록 도와주시는 것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 바이올린을 켜지 못하시게 줄을 끊어 버립니다.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받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그분을 계속 멀리합니 다. 우리는 물에 빠져 죽으면서도 그분의 구원의 손길을 잡으려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교만에 사로잡혀 "우리 스스로 구원의 일을 해내고야 말겠다" 고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하느님을 찾기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하느님 께 발견되기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서에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을 자주 듣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이 제 막 신적 생명이 시작될 때, 천사는 목자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고 주의시킬 필요가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우리 주님의 공생활 중, 그분은 놀란 사도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셔야 했습니다. 부활 후 평화의 말을 전할 때도 같은 훈계로 시 작하셔야 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않도록 주의시킬 필요를 발견하십 니다. 왜냐하면, 세 가지 거짓 두려움이 우리를 하느님께로부터 멀리 하기 때문입니다.
1) 우리는 구원되기를 원하지만, 우리 죄에서 구원되기를 원하지 는 않습니다.
2) 우리는 구원되기를 원하지만, 너무 큰 대가를 치르기를 원하지 는 않습니다.
3) 우리는 하느님의 방식이 아니라 우리의 방식대로 구원되기를 원하 고 있습니다.
1. 우리는 구원되기를 원하지만, 우리 죄에서 구원되기를 원하지는 않 습니다. 많은 영혼들이 우리 주님을 크게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그 분이 당신 이름 "예수"가 의미하는 것을 행할까 겁을 먹기 때문입니 다. - "예수"는 "우리 죄에서 우리를 구하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우 리는 빈곤으로부터, 전쟁으로부터, 무지로부터, 질병으로부터, 경제적 불안정으로부터 구원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형태의 구원은 우리 개인 의 기분과 욕정과 탐욕을 손대지 않고 내버려둡니다.
사회적 그리스도교가 매우 인기가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며, 그리스 도교의 사업이 빈민 구제, 국제 친선의 도모를 돕는 일에만 한정되기를 동의하는 사람이 많은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런 식의 종교는 참으로 유쾌한 것입니다. 하긴, 이런 것은 개인 양 심을 그냥 내버려두니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를 양심의 불온과 불안에 의해서 사회 불의를 과감하게 개혁하도록 촉구하는 수도 있습니 다. 내부에 그릇된 점이 있음을 알기 때문에 외부의 오류를 바로잡음으 로써 그것을 보상하려 합니다. 이것은 또한 매우 많은 재산을 축적해 놓 고 혁명 운동에 보조금을 대줌으로써 그들의 양심을 편안하게 하려는 사 람들의 심리 과정입니다.
산꼭대기에서 유혹한 사탄은 첫째로 우리 주님께, 영혼의 구원을 포 기하고 돌을 빵으로 만듦으로써 사회적 구원에만 전념하도록 유혹했습 니다. - 불행한 문명을 이룬 것은 부패된 마음이 아니라 주린 배라는 거짓 가정(假定)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성(神聖)의 일차적 목적이 경 제적 역경을 구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시련을 당하는 동안 에는 그분께 나아가지만, 그들의 돈지갑을 채워주지 않기 때문에 하느 님께 반란을 일으킵니다.
어떤 사람들은 종교의 좀더 넓은 필요성을 느끼고, 사회 향상이나 고 통의 해소에만 집념하고, 죄를 보속할 필요성에는 손도 안 대는 개신교 파에 즐겨 가담합니다. 이들은 보통 저녁 식탁에서, 종교 문제가 화제 에 오르는데 반대하지 않습니다. - 죄와 범행에 대한 속죄를 언급하지 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이와 같이, 많은 혼겁(魂怯)한 영혼들이 축복의 문전에 서서 떨며, "그분을 얻음으로써 다른 모든 것을 잃을까 두려워 하여" 감히 들어오지 못합니다.
2. 우리는 구원되기를 원하지만, 너무 큰 대가를 치르기를 원하지는 않습니다. 생명의 포도를 결실하기 위해 희생으로 그의 밭에 거름 을 주시는 하느님께서는 겁쟁이를 혼겁(魂怯)하게 하십니다. 부유한 사람이 그가 많은 재산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구세주께로부터 근심 하며 떠나갔듯이 말입니다.
성 바오로께서 심판과 악의 포기에 관해서 말할 때, 펠릭스는 오직 "다음 기회에" 듣기로 했습니다. 분명히 대부분의 영혼들은 불완전 한 것에는 만족하지 않는 하느님의 선성(善性) 때문에 그분을 무서워 합니다. 우리가 크게 겁을 내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충분히 사랑 하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애인이 태도와 처신에 있어서 완전하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도, 하늘에 계신 성부께서 완전하신 것 처럼 우리가 완전하기를 원하십니다. 음악가가 바이올린을 사랑하고, 좀 더 고운 음을 내기 위해 희생적 노력으로 줄을 당기듯이 하느님께 서도 우리가 성인(聖人)이 되도록 우리에게 희생을 당부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엄청난 요구를 할 것이라는 이 두려움은, 하느님 을 알게 되었으면서도 그의 양 우리에 들어가기를 거절하는 지식인 들이 많은 이유를 잘 설명해줍니다. 세상은 지식의 영역을 넓히는 데 대해서는 말하지만, 이미 얻어온 지식을 결코 사용하지 않는 학 자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문을 즐겨 두드리지만, 문이 그들에게 열리기라도 하면 죽어 자빠질 사람들입니다. 진리는 책임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자연적, 초자연적 인 하느님의 모든 선물은 영혼 편에서 호응이 있기를 요구합니다. 자 연적 질서에서 본다면, 어떤 사람은 우정을 갖게 되면 어떤 의무를 지 게 된다고 해서 우정의 선물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선물도 마찬가지로 결의(決意)를 포함합니다. 그분을 받아 들이는 것은 기본적인 것에 있어서 굴복을 요구하기 때문에, 많은 사 람들은 자기들 심중으로부터 거짓 우상을 찢어내기를 거절하면서, 종 교의 흥정꾼이 되고 도덕의 구경꾼이 됩니다. 그들은 구원되기를 원하나 십자가의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삶을 통해 옛날 도전의 소리가 메아리 칩니다.
"십자가에서 한번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믿고 말고."
3. 우리는 하느님의 방식이 아니라 우리 방식대로 구원되기를 원합 니다. 인간은 제각기 고유의 방식대로 하느님을 숭배하도록 자유로 워야 한다는 말을 매우 흔히 듣습니다. 이것이 양심의 자유를 의미하 는 한, 또 하느님께서 그에게 주시는 특별한 빛을 따라 살 의무를 뜻 하는 한, 참으로 옳은 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의 방식대로가 아니라, 우리 식대로 하느님을 숭배한다는 뜻이면 이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비유 하나를 들어 봅시다.
우리나라의 생활 방식이, 모든 사람에게 차를 교통 법칙에 따르지 않고 자기 멋대로 몰게 한다면 교통 상태는 뒤범벅이 되고 수습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환자가 의사에게, "당신 방식대로 치료하지 말고 나의 방식대로 치 료하여 주시오" 하고 말한다면 큰 비극이 될 것입니다. 시민이 정 부에게, "나는 당신의 방식이 아니라, 나의 방식대로 세금을 내겠소" 한다면, 이것도 큰 혼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나의 종교관", "나의 신관" 등 흔히 볼 수 있는 논제나 학설에는 지독한 자아주의와 자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개인적 종 교는 개인적 천문학이나 개인적 수학처럼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나는 나의 방식대로 하느님을 섬기겠으니, 당신은 당신의 방식대 로 하느님을 섬기시오." 말하는 개인들은 하느님을 그분의 법대로 섬 기는 것이 권장할 만한 일이 아닌가 연구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 영혼을 혼겁(魂怯)하게 하는 것은 분명히 확고하고 보 편적이고 진실한 종교의 이런 면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양심이 불안하면 지옥이 없다고 하는 종교를 원합 니다. 그리스도의 법을 거슬러 이미 다시 결혼한 사람이면 이혼을 죄로 판단하지 않는 종교를 원합니다. 이런 조건부의 단서는, 인간이 하느님의 방식대로가 아니라 오직 자기 방식대로 구원되기를 원한다 는 뜻입니다. 그의 헛된 욕망에서 벗어나기를 거부하는 데서, "다른 모든 아름다움이 고통으로 변하는 사랑"에로 날아가지 못합니다.
자신들을 개조하지 않고 사회를 개조하는 종교를 원하기 때문에, 가 시관이나 십자가 없는 구세주를 원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청사진이 아니라 자기네 청사진을 원하기 때문에, 많은 영혼들이 하느님을 찾 지 못한다면, 그렇다면 하느님께 호응할 때는 그런 영혼이 어떻게 되 는지를 살펴봅시다.
많은 결과 중에서 몇 가지를 간추려 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이런 영혼은 사변의 상태에서 순종의 상태로 변합니다. 더 이 상 종교에 대해서 "왜"를 가지고 골치를 앓지 않고 "해야 한다"로 됩 니다. 그는 하느님을 분석해 보려 하지 않고 기쁘게 해드리려 합니다. 학문을 통해서 하느님께 대해서 아는 것과, 사랑을 통해 하느님을 아 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서신으로 구혼하는 것과 직접 대면하여 구혼하는 것 사이의 차이와 같습니다.
많은 회의적인 교수들이 기도를 하는 사람보다 하느님의 존재 증명을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이 교수들은 그들이 갖고 있는 지식에 따라 행 동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이 학문상으로 알고 있는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하느님게 대한 아무런 새로운 지식도 받 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종교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아무것도 행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지식은 결실을 맺지 못하고 불모로 남아 있습니다.
반대로 하느님께 호응하는 영혼은 하느님께 대한 조그만 지식을 사랑 으로 받아들입니다. 그 결과 예지와 사랑의 새로운 문이 열립니다. 그 런 영혼은 하느님의 사랑으로써 확실성에 있어서나 실체성에 있어서 나 교수의 이론적 지식을 능가하는 하느님의 지식을 받게 됩니다. 이 숭고한 진리가 성서 안에 나타나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도 그를 알아주십니다."(1고린 8, 3).
(우물가의 여인은 초기 회의론자였습니다. 종교를 순전히 사변적인 면에다 두기를 원하여, 예루살렘에서 예배해야 하는지, 사마리아에서 예배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를 들고 나왔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녀의 다섯 남편에 대하여 이야기함으로써 토론을 이론적 영역에서 부터 돌리셨습니다. 진실한 종교가 요구하는 도덕적 쇄신을 그녀가 피했음을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하느님께 호응하는 영혼은 종교를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유한한 이해 관계에 있어서 "무한"에게 도움을 청 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유한한 이해 관계를 무한에게 종속시키려 합니다.
그의 기도는 "오, 주여, 제 뜻대로 마시고 당신 뜻대로 하소서" 입니 다. 더 이상 하느님을 이용하려 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자기를 사용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는 마리아처럼 말합니다. "당신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또는 성 바오로처럼 "주님, 제가 어떻게 하 면 좋겠습니까?" 또 세례자 요한처럼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고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인격에 마음 전체를 예속시키기 위하여 자아주의와 이기심을 파괴하는 것은 현실 생활에 손해를 가져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더욱 큰 이익을 가져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이제 하느님의 관점 에서 삶을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힘의 신적 원천과의 일치 때문에 선을 행하는 데 더욱 큰 힘을 갖고 있습니다. - 같은 군인이라도 시시한 장군 밑에 있는 때보다 위대한 장군 밑에 있을 때 더 강한 법입니다.
"너희가 나를 떠나지 않고 또 내 말을 간직해 둔다면 무슨 소원이든 지 구하는 대로 다 이루어질 것이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참으 로 나의 제자가 되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요한 15, 7. 8).
이기적 피조물에게는, 참으로 하느님을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영혼이 실제로 있다는 것을 알아듣기 힘이 듭니다. 그러나 이것은 알아듣기 힘든 것이 아닙니다. 촛불의 빛과 열을 사랑하는 사람은 확실히 태양 을 더 사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호응하는 영혼의 생활은 가장자리에서 중심부로 옮아가기 시 작합니다. 정치, 경제, 일상사와 같은 삶의 외부면은 문제가 덜 됩니다. 하느님이 더 소중합니다. 이것은 인간성이 냉대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 안에 더욱 사랑받는다는 뜻입니다. "지금"이 "영원"에게 종이 됩니다.
하느님을 위해 사용되지 않는 것, 또는 사용될 수 없는 것은 무익한 것, 비실제적인 것이 됩니다. 이런 영혼의 화살통 안에는 신적 과녁판 외에 다른 것을 향하는 화살은 하나도 없습니다.
자아주의자들이 거룩한 사람들에게 퍼붓는 비난은 자책을 은폐하기 위한 간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 그들은 알아들을 수가 없다고 말합니 다. 더욱 나아가 거룩한 이들을 비웃습니다.
사람들이 연애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그가 무얼 보고 그 여자에게 반했 는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하고 말하듯, 물론 알 수 없을 것입니다. - 사랑은 장님이니까! 애인의 결점에만 장님이 아닙니다. 애인 외에는 모든 사람에게 대하여 서도 장님입니다.
사랑은 "제 눈에 안경입니다." 연인이 아닌 다른 사람들은 육안으로만 보고, 무엇이 그리도 사랑스러운지 이상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연인은 마음의 눈으로 보며 애인 안에서 눈먼 마음이 자각하지 못하는 감미와 사랑을 발견합니다.
이 유비를 하느님께 적용해 보십시오. 그러면 개심하지 않은 영혼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어리석게 보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성인 (聖人)이 하느님 안에서 보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동물적 인간은 분별하지 못합니다."
행복의 비결은 향심성(向心性)입니다. 하느님께 호응하는 영혼은 감각 의 선동에 귀머거리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하느님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커다란 우주적 발전기와 같이, 이러한 영혼들은 에네르기 를 내며, 주위에 있는 다른 영혼들은 이것에 의존하여 살 수 있습니다.
진실한 하느님 중심의 영혼은 단순히 자신의 선행 습관이나 자신의 덕에 의해서만 지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느님의 성령에 의해 직 접 움직입니다. 한 사람이 보트의 노를 젓는 경우와, 힘껏 불어주는 순 풍에 돛을 활짝 펴고 가는 경우와는 다릅니다. 성령의 선물에 의해 사 는 영혼은 자신의 이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 똑바로 전 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혼은, 철학자들을 부끄럽게 한 알렉산드리 아의 젊은 가타리나처럼, 모든 책에서 배운 것을 초월하는 예지를 갖고 있습니다. 그는 그의 경험에서 얻은 어느 것보다도 현명한 지혜와 의견 을 부여받습니다.
철학은 이것을 아주 분명하게 설명해 줍니다. 모든 지성은 두 면을 갖 고 있습니다. 이론을 배우는 사변 면과, 인간사를 지도해 나가는 실천 면 이 있습니다. 죄 많은 생활이라도 전자(前者)를 파괴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악인도 성인(聖人)과 마찬가지로 훌륭한 수학자가 될 수 있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악한 생활은 실천이지(實踐理智)를 파괴합니다.
따라서 유식한 수학자가 도덕과 종교에 대해 글을 쓰게 되는 경우에 는 흔히 혼돈투성이가 됩니다. 하느님께서 지도하시는 사람은 그의 사 변이지(思辨理智)와 마찬가지로 실천이지도 하느님께서 비추어주시 므로, 더 많은 것을 알며, 그리고 순전히 이론적으로만 아는 사람들보 다, 다른 사람들을 더 잘 지도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지도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혼한 사람은 결혼한 사람을 지도할 수 없습니다. 마음이 깨끗하지 못한 선생이나 심리학자 는 젊은이를 지도할 수 없습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렁 에 빠진다"(마태 15, 14).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지도는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으로부터는 결코 받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그가 기도를 하는 사람보다 신경절이나 갑상 선에 대해서 몇 천배나 더 잘 안다 해도. 망원경을 가진 눈은 맨눈보 다 별을 더 잘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으로 비추어진 이성은 그냥 이성보다 더 실재를 잘 이해합니다.
공산주의와 같은 세속적 일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도, 공산주의 지도자 가 민주주의와 동맹을 맺었을 때조차 공산주의를 근본적으로 악하게 본 신앙인이, 정치가들보다도 전후세계(戰後世界)에 일어날 일에 대해 더 잘 판단했음은 굳이 지적해 둘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우리 현세계 의 위기는 또한 도덕적이고 영적인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동물적 인간 에 의해서는 이해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지혜를 지닌 영혼들은 세속의 현명한 사람들을 흔히 격노 케 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항상 사물을 하느님의 관점에서 보 기 때문입니다. 세속의 현자는 누가 원한다면 하느님을 믿도록 하지만,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 기타의 것에 대한 믿음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 는다는 조건에서만 그렇게 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문제가 안될 때만 하느님을 허용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곧 성인(聖人)이 되는 것입니다.
성녀 데레사의 말대로 "나에게 하느님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열정은 건방지고 편협하며, 어리석고 근거없는 참월(僭越)이라고 세 속의 현자들은 비난하며 분개합니다. 그래도 이에 분개하는 사람들도 그들 마음속으로는 성인(聖人)들의 내적 평화와 행복을 지극히 부러 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찾기가 어려운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오직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베짜타 못가 에 누워 있으면서도 치유되지 못한 사람과 같습니다. 그의 변명은, 물 이 움직일 때 그를 넣어줄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치유될 필요가 있었지만 그것을 실지로 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와 같은 사람이 이 세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남아 있으 면서도 그들의 상태에 대해 타이르는 사람을 비난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께서 나타나셔서, 그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온 것을 하라고, 즉 "침 상을 들고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여되어 있었던 것은 그의 원의(願意)였습니다. 그는 더 나아지려고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빈사(瀕死)상태에 있었습니다. 그의 경우처럼 인생의 많은 실패들은 피할 수 있는 것이며 공연한 것들입니다. 이것 들은 그 상태를 치료하기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기 때문에만 계 속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간들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전쟁의 원 인이 되는 것은 원하고 있습니다. 같은 식으로 행복하고 싶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행복을 가져다 주는 그것을 원하지는 않습니다.
"너희는 일편단심으로 나를 찾으라. 그렇게 나를 찾으면 내가 만나 주리라"(예레 29, 13).
인간이 현세 생활에서 불행한 근본적인 이유는 정말로 행복을 원하 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참종교에 대한 귀의자들에 대해 시기와 질투로 앞을 못 보 는 태생 소경처럼 되어 버린 가련한 갈라진 형제들에게 말합니다.
"오, 주여, 당신 뜻대로 하지 마시고 제 뜻대로 하게 하소서."
이러한 자기 기만적인 기도를 그만두고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한 가 톨릭의 성인들의 삶을 살펴본다면 하느님의 사랑을 알게 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조금이나마 깨달을 수 있을 것이고 그 때에는 왜 우 리의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대로 해야 하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자기가 빛 속에서 산다고 말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아직도 어둠 속에서 살고 있는 자입니다. 자기의 형제를 사랑하는 사 람은 빛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며 그는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없 습니다. 그러나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 속에 있으며 어둠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그 눈이 어둠에 가리워져서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1요한 2, 9-11).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개신교인들인지 가톨릭인들인지는 하느님께서 판단하실 일이라고 우리들은 믿습니다. 하지만 개신교인들 이 가톨릭 신앙을 공격하는 방법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은 성서 속 에서 이미 판명되어졌다는 것을 독자들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모 든 크리스천들은 다른 종파의 크리스천들의 신앙에 접근할 때는 다음 의 성서 말씀을 충분히 숙고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두려움은 징벌을 생각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품 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1요한 4, 18).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 가톨릭 신자들에게 필자는 성 바오로 사도께서 가톨릭 신자들을 보고 속된 생활을 한다고 비난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다음의 말씀을 하신 것을 상기시켜 드리며 저의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나 바울로는 온유하시고 관대하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간
청합니다. 나는 여러분과 대면하고 있을 때에는 유순하지만 떨어져 있을
때에는 강경하다는 말을 듣습니다. 나는 물론 우리를 보고 속된 생활을
한다고 헐뜯는 자들에게 대해서는 강경한 태도를 가질 작정입니다. 그러
나 여러분을 만나서는 그와 같은 강경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되었으면
합니다.
비록 우리가 속된 세상에서 살고 있기는 하지만 속된 싸움을 하고 있
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세속의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견
고한 성이라도 무너뜨릴 수 있는 하느님의 강한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잘못된 이론을 무찔러 버리고 하느님을 아는데 장애가 되는 모든
오만을 쳐부수며 어떠한 계략이든지 다 사로잡아서 그리스도께 복종시
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완전히 순종하게 될 때에는 모든 불순종을 처
벌한 준비를 갖추고 있습니다."(II 고린토 10, 1-6)
갈현동에서
catholic knight 안젤로
|
||||
태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