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Re:대림절과 동방박사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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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정식 | 작성일2004-12-01 | 조회수768 | 추천수1 | 신고 |
요즈음 우리가 성당에 가면 제대 앞에 장식되어 있는 대림환과 그 가운데에 우뚝 솟아 있는 대림초를 볼 수 있습니다. 대림절을 맞이하면서 교회는 색깔이 각기 다른 4개의 대림초를 준비하여 짙은 색깔부터 불을 켭니다. 이 대림초의 네 가지 색깔은 자주색, 연보라색, 장미색(분홍색), 그리고 흰색입니다. 4개의 초는 이스라엘 백성이 메시아를 애타게 고대하며 기다리던 구약의 4천년을 의미하는데, 이 네 가지의 색깔은 동서남북 즉 온 세상을 두루 비추시는 예수님께서 유다인만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요, 또한 선한 사람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 우리 죄인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다는 대림시기의 특징을 잘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대림시기는 구세주의 강생을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다시 말해 어두움의 세상에 빛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따라서 구세주의 강생인 성탄이 다가올수록 어두움은 사라지고, 대신에 광명의 빛이 점차로 밝아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대림초에 사용하는 색깔은 구세주의 탄생이 다가올수록 점차 밝은 빛을 띠게 되는 것입니다. 진한 어두움을 드러내는 자주색으로부터 환한 빛을 드러내는 흰색으로 이어지는 대림초들이 대림시기의 1주간마다 하나씩 추가로 켜지는 것입니다. 대림시기는 사순시기와 비슷하게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시는 구세주를 합당하게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기도와 희생과 자선의 기간입니다. 그래서 이 대림시기를 빛으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는 것으로 비유하기도 하며, 차츰 밝아지는 세상, 주님이 오셔서 세상의 빛이 되시고 이 세상을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죄의 어둠에서 해방시키시고 진리의 빛으로 채워주시는 그러한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대림환은, 대림시기 동안 푸른 나뭇가지와 네 가지 색의 초를 꽂아 만든 월계관 모양의 고리인데, 이 대림환은 구세주께서 다가오신다는 의미로 매주 촛불을 하나씩 늘려서 켜가는 것이며. 푸른 나뭇가지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과 희망을 뜻하고 둥근 원은 하느님을 나타냅니다. 이렇게 4주간의 대림시기 동안에 제일 진한 자주색의 초부터 1주일에 하나씩 켜가다 보면, 제일 먼저 켰던 대림초의 길이부터 자연히 짧아지게 됩니다. 4개의 초가 엷은 색으로 변화되는 것은 구세주를 맞이하려는 우리들의 마음의 정화 상태를 나타내며, 초가 하나씩 더 켜질 때마다 밝아지도록 하는 것은 일출(日出)이 가까울수록 밝아지는 것과 같이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가까이 오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모두가 이러한 대림절을 맞이하여 예수님이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으로 자선과 희생, 봉사로서 의미있는 대림시기를 잘 보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추가로 요청하신 동방박사에 관해서는 가톨릭 신문에 실렸던 홍금표 신부님께서 쓰신 다음의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관심을 가지는 만큼 보인다』 혹은 『생각(가치관)에 따라 달리 보인다』는 말도 거의 비슷한 말입니다. 이 말들은 모두 우리 앞에 놓여진 사건이나 사물보다는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내적 작용이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제가 이 말을 실감하는 것은 미술작품을 대할 때입니다. 저는 미술에 대해 지식도 관심도 열의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명작을 감상하는 것과 만화나 사진을 보는 것 사이의 차이를 거의 구분하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때로는 몇억을 호가하는 미술작품보다도 몇백원짜리 그럴싸한 사진이 저에게는 더 의미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행동은 미술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가지고 미술의 맛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무식한 행동으로 비쳐질 수밖에 없고 때로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앞에 놓여진 대상이 아니라, 대상을 대하는 사람의 지식과 관심, 열의와 열정과 생각의 차이가 이 같은 차이를 만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이 말은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체험과 비체험, 아마 그 차이도 우리 앞에 놓여진 외적인 조건이나 사건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해 가지는 이러한 인간의 내적 자세에서 좌우되는데, 바로 이 사실을 우리는 오늘 복음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주님 공현대축일로서 동방박사들이 예수님께 경배하러 왔던 사건을 기념합니다. 복음에 따르면 동방에서 온 박사들, 멜키올 발타살 가스팔로 알려진 세 명의 점성가들은 별을 통해 왕의 탄생사실을 알고 그분을 찾아 경배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먼저 예수님은 유다인만의 그리고 유다인들만을 위한 구세주가 아니라 동방박사로 대표되는 전 인류의 공경을 받아야 하는 구세주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이 이야기는 구원의 결정적 시기가 예수님을 통해 성취됨을 보여줍니다.
구약의 예언에 의하면 장차 때가 되면(이때 때는 구원의 시기를 가리키는 때) 이방인들이 조공을 바치러 예루살렘에 모여 오리라는 예언이 있는데 바로 동방박사들의 예물증정을 조공으로 해석함으로써 예수님을 통해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을 보면서 같이 생각해 보고 싶은 점은 예수님을 경배한 동방박사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첫번째 사실은 이들은 「별을 발견하고 별의 의미」를 깨달은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동방박사들이 별을 발견하고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은 별을 연구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당시 예수님의 별을 본 사람은 동방박사들 뿐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만 그 별을 통해 유다인의 왕의 탄생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동방박사들 뿐이었는데 이것은 이들이 평소 별에 관심을 갖고 별을 연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동방박사들은 별을 쫓아 길을 떠난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을 통해 헤로데와 율법학자로 대표되는 유다인들과 동방박사로 대표되는 이방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미묘한 갈등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일반적인 조건으로 본다면 동방박사들 보다 먼저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경배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유다인들은 하느님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구세주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인데 비해 동방박사들은 하느님과 구세주의 섭리에 대해 문외한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입니다.
그 이유는 동방박사들은 별을 쫓아 찾아 나선 사람들임에 비해 율사들과 헤로데는 알려주고 머물렀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길은 결코 남에게 맡겨 놓을 수 없는 실천적인 일인데 유다인들은 왕을 찾는 일을 남에게 맡겨버리고 맙니다. 머리에서만 머물고 몸으로 전달되지 않은 신앙이었기에 이들은 결국 구세주를 맞이하는데 실패하고 맙니다.
그러나 참으로 가슴아픈 사실은 유다인들의 이러한 모습이 변화를 두려워하는 우리들의 모습에서, 그리고 신앙의 일을 남에게 맡기고 진리를 쫓아 나서기를 두려워하는 나의 모습에서 너무나 자주 발견되는 모습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동방박사의 이야기는 이러한 우리에게 인생의 신비에 대해 좀더 적극적인 관심과 열정을 가질 것을 호소하는 동시에 별을 향한 신앙의 여정에 우리 모두가 동참할 것을 강력히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홍금표 신부> 홍 신부님의 글에 이어서 다음의 사이트에서 보시면 또한 참고가 돨 것입니다. http://www.maria21.net/arthall/art_paint_03.htm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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