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묻고답하기

제목 Re:천주교에 대한 여러가지 의문점들을 풀어주세요!!!!! 카테고리 | 천주교
작성자안성철 쪽지 캡슐 작성일2006-01-10 조회수621 추천수0 신고
 

 

* 사랑의 메아리 *(답 2)

 

2000여년동안 가톨릭은 그런 일은 단 한번도 없습니다 . 한국에서만 일어나는 기 현상으로

개신교인들의 억지와 무지 에서 오는 것입니다. 아래 글을 참조 하세요

 

[펌]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영원히(성 바오로 서원, 교보 문고)

 

2000여년동안 가톨릭은 그런 일은 단 한번도 없습니다 . 한국에서만 일어나는 기 현상으로

개신교인들의 억지와 무지 에서 오는 것입니다. 아래 글을 참조 하세요

 

[펌]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영원히(성 바오로 서원, 교보 문고)

성경을 마음대로 떼어 버려도 좋은가?

할머니 저는 말을 배우기 이전부터 할머니 무릎에 앉아서 하느님의 말씀을 매일 들으면서

“성경은 전부가 하느님 계시로 이루어진 책으로서 진리를 가르치고 잘못을 책망하고 허물을 고쳐 주고

올바르게 사는 훈련을 시키는 데 유익한 책(Ⅱ디모 3,16)” 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그 책은 구약39권 신약27권이라고 믿어 왔습니다.

그러나 “교부들의 신앙” 이란 책을 읽는 도중 성서는 66권만이 아니라 정경은 73권이며

가톨릭에는 성경뿐만 아니라 성전(聖傳)이란 것도 있으며

“‘성경과 성전’ 은 하느님 말씀의 거룩한 단일 위탁물로서 이 위탁물은 교회에 맡겨져 있다” 라는 것을

발견하고 너무나도 놀랐었습니다.

물론 이때 저는 이것을 “마귀의 장난” 으로 단정하고 “사탄아 물러가라” 를 외치며 그 책을 던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저의 마음이 편해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구원에 대한 지침서는 그 당시까지만 해도

오로지 성경밖에 없다고 믿어왔던 저이기에 문제는 더욱더 심각했었습니다.

처음에는 성경이 73권이라는 말이 믿어지지도 않았으나 더욱 큰 문제는 73권이 옳은 것인지 66권이 옳은지는

성경에서도 기도 속에서도 또는 그 큰 학교 도서관의 어떤 문헌에서도 그 대답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저의 심정으로서는 가톨릭에서 말하는 73권이 거짓이었으면 하는 마음뿐이었음은 솔직한 저의 고백입니다.

간절히 기도하고 성경 읽고 각종 종교서적 탐독과 고민 때문에 거의 학교 도서관에서만 지내던 어느 날

저는 외국대학의 종교학 책자에서 다만 7권의 외경(위경:APOCRYPHA)이 있다는 사실만 확인하였으나

그에 관한 궁금증은 더해만 갔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기서 물러설 수도 없었습니다.

외경은 무엇이며 위경은 또 무엇인가? 그 판정 기준은 무엇이며 판정은 누가 내리는가?

하느님이 직접 내리시는가 아니면 이를 오랫동안 보관해온 유다교회가 내리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소위 종교개혁 이전 천주를 믿는다는 그 가톨릭이 내리는가?

그리고 그들이 내린다면 그 근거는 무엇인가? 등 계속되는 질문만 되풀이하던 중 고맙게도 개신교의

유명한 신학자「R.BARCLAIUS」의 책에서 「CANON 즉, 정경은 몇 권의 책으로 된 것으로서 그 보다 더 많지도

더 적지도 않다는 것은 성경 자체로는 증명되지 않으므로 여기에 대하여는 성령의 사적 감도나 그렇지 않으면

로마 가톨릭을 신임할 수밖에 없다」라는 그의 양심적인 결론에 공감하고

그 해답을 가톨릭에서야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답은 매우 간단했습니다.

성경은 구약46권 신약27권 도합73권으로서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마태 24,35 ; 마르코(마가) 13,31; 루가(누가) 21,33) 라는 확답과 확신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성경(구약)은 기원전 150년경 정경으로 인정된 이래 신약시대에서도 예수님과 사도시대를 거쳐

약1500년간 정경으로 사용해 왔으나 소위 종교개혁 이후 일부 개신교 종파에서는 구약39권 신약27권을 정경으로

하고 또 어떤 종파는 성루가(누가)와 성 마르코(마가)는 사도가 아니라 하여 그가 쓴 것을 진짜 복음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마르틴루터는 성 야고보서를 “허수아비의 편지” 라고 불러 모욕하였으나 다행이 한국 성서공회의

성경 전서에는 루터가 없애 버린 야고보서가 들어 있음도 재삼 확인하였습니다.

확실한 것은 우리 주님과 “진리의 성령(요한14,15)” 께서는 7권의 성경을 떼어버려도 좋다고 허락하신 바도 없으시며

그렇게 떼어버린 것이 정당하다고 뒷받침 하시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종교 개혁자라는 사람들이 소위 면죄부(사실은 대사 논쟁)문제나

그 당시 일부 성직자들의 타락과 부패가 있었다면 스스로 이를 방지하는 소금이 되거나 아니면

종교적 해이만을 개혁할 일이지 감히 죄 많은 인간이 주님의 말씀을 훼손한다는 것은

비록 그것이 구약이라 할지라도 용납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는 노아의 자손들이 무엄하게도 높은 탑을 쌓아 하늘에 이르려는 교만과 같다고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구약은 어감 상 ‘묵은’ ‘낡은’ ‘오래된’ 것과 같은 형용사가 붙어있어 이 책을 읽기도 전에 무의식적으로 또는

심정적으로 가볍게 취급하려는 경향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예수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 유다이즘의 입장과는 달리 우리는 구약을 예수님의 신비를

예언한 말씀으로 굳게 믿고 있으며 또 믿어야만 합니다.

교회는 구약성서가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계시의 책이라는 사실을 기회 있을 때마다 선언하였으며

2세기경 구약성서를 얕잡아 보던 영지주의자들을 이단으로 파문하였고 또 교회는 히브리 10장1절의 말씀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여 너무나 오랫동안 사도 바오로(바울)의 율법 거부에 심취한 나머지 구약성서 전체를 거부함으로서

많은 악영향을 끼친 마르치온(160년)을 단호히 이단으로 배격하였습니다.

이를 가리켜 아직도 일부 개신교 목회자들은 “가톨릭은 구약을 믿는 종교”라고 하는 터무니없는 모략과

악의에 찬 중상을 하고 있으나 주님을 반대하는 유다인의 히브리경전 만을 그대로 성경으로 받아들이고

헌금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신약에는 없고 구약에만 있는 십일조 정신을 내세우면서

기복신앙에 호소하는 개신교야말로 헌금에 관한 한 어찌보면 유다교의 한 교파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베드로 대성당을 짖기 위한 소위 면죄부(대사논쟁)문제로 교회를 개혁한다고 갈라져나간 형제들이

지금에 와서는 교회를 통째로 그것도 “프리미엄” 을 붙여서 사고 팔고 하는 끔찍한 짓을 하면서도

“전도와 선교를 위한 것이며 하나님을 위한 것” 이라는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다시는 내 아버지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요한2,15-16)고 하신 주님의 채찍에 맞길 수 밖에요

이 손자는 똑똑히 보아 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당시 가톨릭에 관한 것이라면 무조건 믿지 말고 멀리하라고도 배웠습니다.

우리는 삼성냉장고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대우전자에 가서 알아보려 하지 않고 LG전자 상품의 정보를

얻기 위해 현대전자에 가지 않습니다.

이 손자는 너무나 오랫동안 국내 및 국외 정보를 수집, 분석, 판단하는 분야에 파견되어 일해 왔기에

경쟁자에게서 얻는 정보란 언제나 편견 투성이 이며 무엇을 아주 빼 버리거나 과장하지 않은 정보를 얻기란

매우 드물다" 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물고기를 잡으려면 산으로 가지말고 바다로 가야 하듯이 저는 진리를 따라 가톨릭 교회에 들어와야 했으며

들어와서야 옛날의 모든 것이 거짓 또는 과장된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하나가 되어야할 때입니다. 이런 것으로 논쟁을 삼을 때는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바오로사도의 신약과 구약의 백성을 엄격하게 구별하면서도 신약의 백성에게 흔히 잊혀지기 쉬운

다음의 말씀을 명심토록 해야 합니다.

“그대가 뿌리를 지탱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그대를 지탱하는 것입니다.”(로마 11,18) 라는 고백입니다.

이 말씀은 주님의 원뿌리에서 갈라져나간 개신교의 현주소라고도 저는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구약에 관하여는 언젠가 우리 주님께서 “너희는 성서 속에서 영원한 생명이 있는 것을 알고 파고들거니와

그 성서는 바로 나를 증언 하고 있다”(요한 5,39)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 말씀은 그 당시 신약성서는 아직 나오지도 않은 시기였고 다만 율법 스승 바리사이파

(그 당시 평민들 중 열성파)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인정하지 않음을 꾸짖는 말씀으로 여기의 성서는

당연히 구약을 가리키는 말씀으로 볼 때에 소위 종교 개혁자들은 결과적으로 개혁이란 미명 아래

“주님을 증언” 하는 계시의 말씀을 떼어버린 것이 됩니다. 이것은 확실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마르틴 루터라는 소위 종교 개혁자는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구약의 ‘마카베오 상하권’ 과 ‘신약의 야고보서’

를 빼어 버렸습니다.

구약의 ‘마카베오서’는 “연옥교리” 가 실려 있는 하느님의 말씀이고

‘야고보서’ 의 “행동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야고보 2,26) 라는 핵심 구절로 된 것으로서

파문된 신부의 소위 의화 체험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는 또 로마서 3장28절 “사람은 율법을 지키는 것과는 관계없이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라는 말씀을 “오직 신앙으로 말미암아”라고 하며 ‘오직 신앙’ 만으로 구원되는 것으로 여기도록

위작(僞作)하였습니다.

또, 고린토 전서 4장20절 “하느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으니 말입니다”를

“---능력에 있지 않고 말에 있다”라고 뒤집어 놓았습니다.

우리 나라 개신교 성경전서에는 제대로 번역된 것이 퍽 다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마태오 19장29절에서 “아내”라는 말을 빼었고 루가 2장48절 성모마리아께서

예수더러 “아들아”라고 하신 것을 “아이야”로 고쳐 놓았습니다(EnversⅢ 323).

당시 엠써(Emser)라는 사람은 “루터는 그리스도 교회가 옛적부터 신뢰해오던 원문의 여러 곳을 혼란하게 하고

어리석게 만들었고 비뚤어지게 만들어 교회에 불리하도록 하였다.

또, 이단적인 주해와 서문으로 교회에 해독을 끼쳤다.

그는 신앙과 선행을 다루는 성구에 이르러서는 횡포하게도 거의 전부 손을 대었다” 라고 증언하는 동시에

1400여 군데의 부정확함을 지적하였습니다(Jansen History of German People, ⅪⅤ p425)

이것은 결코 루터의 무지로 돌릴 수 는 없습니다. 그러기에는 그는 너무나 똑똑하였습니다.

할머니! 사실이 이러한데도 이 손자가 주 하느님의 말씀마저 자기 마음대로 떼어버리는 이들에게 계속하여

저의 영혼을 맡길 수 있었겠습니까? 결코 안 되는 일이지요

당시 저는 이런 사람들을 “너희는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렸고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들어가려는 사람마저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루가 11,52)” “나더러 주여 주여만 하는 자”(마태 7,21)라고 혼자 분개도 해보았으나

지금은 우리 주님께서 이런 사람들이 있을 것을 미리 아시고 성서 제일 마지막 장에 요한 사도를 시켜 하신

“나는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말해 둡니다. 누구든지 여기에 무엇을 덧붙이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을 벌하실 때에 이 책에 기록된 재난도 덧붙여서 주실 것입니다.

또, 누구든지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에서 무엇을 떼어버리면 이 책에 기록된 생명의 나무와 그 거룩한 도성에 대한

그의 몫을 하느님께서 떼어버리실 것입니다” 라고 하신 말씀을 상기시켜 드릴 따름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의 손에 의해 훼손된 이래

사랑은 이기심과 증오로

믿음은 교만과 의심으로

희망은 어두움과 절망으로

정직은 기만과 사기로

선은 사악과 완고한 마음으로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특히 이 시대에는 증오와 억제할 줄 모르는 이기심이 한층 더 위험한 양태로 도처로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악령은 어디에나 분열을 일으킵니다. 가정, 사회, 교회 그 어느 곳이든지 예외가 아닙니다.

오늘날에는 사람들끼리 서로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더욱이 교회간의 이해와 상호 일치는 그저 구호에 지나지 않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하면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간직하고, 사랑하고, 실천할 수 있는가를 모두 함께 고민해야 하며

함께 기도할 때입니다.

희랍(헬라)어 성서(70인역)의 중요성과 신약성서의 형성

70인역 희랍어 성서는 첫 수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성서의 권위를 행사하였습니다.

“나는 알파(Α)와 오메가(Ω)”(희랍어의 알파벳)라고,(묵시록 1,8) 하신 우리 주님과 사도들도 이 성서를 사용하셨고

그리고 신약성서의 저자들도 대부분 이 희랍어 번역본을 인용(약300회 이상)하고 있습니다.

초기교회는 이 희랍어 번역본(70인역) 성서를 경전으로 인정하였고(382년) 이것을 공식적인 전례 성서로 받아들여

사용하여 왔습니다.

또한 후기 구약성서들 몇 가지와 신약성서 전부는 (마태오복음만 예외일 가능성이 있음) 원래 희랍어로 쓰여졌으며

로마의 그리스도교 전례도 3세기까지 희랍어로 집전 되었습니다.

또 우리 초대교회는 한결같이 히브리어 성경을 제1경전이라 하여 꼭 같이 성경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1517년까지 사용해 오던 이 성경을 임의로 바꾸어 지금의 유다교와 같이 히브리어 경전만을

구약 성경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할머니께서도 안 가르쳐 주셨기에 저는 아직 모르고 있으며

또“하나님”께서 언제 왜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라고 그랬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물론 제2경전은 역사 학자적인 관점에서 세부적으로 따져 드는 사람들에게는 그 이유가 전혀 없지는 않았었겠지요.

그러나 이 한 묶음의 책들(제2경전)은 매우 중요합니다.

제2경전의 기록 시기와 동기는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기원전 323년) 팔레스티나는 셀류코스 왕조에 의해

정치, 문화, 종교적 박해를 받게 되는데 유단인들에게 안식일과 할례를 금지시키고

율법이 금하는 고기를 먹게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신원을 잃지 않고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충실히 간직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승리하리라는 확신을 불어 넣어 주기 위해서 기원전 300-350년경 하느님의 인도하심

즉 영감에 의해 쓰여진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한 묶음의 책들(제2경전)은 우리 교회 안에서 보존되어 내려온 중요한 교리들의 근거를 발견합니다.

구체적으로 부활, 천사와 악마, 연옥 등 구약 히브리 경전 39권에 분명히 들어 나지 않는 계시의 발전상을 보게 됩니다.

또한 신약성서에 많이 등장하지만 구약성서 히브리 경전에 없는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의 역사적 기원도

이 박해 시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또 신학적으로는 메시아의 새로운 희망이 싹틉니다.

특히 바리사이파의 부활과 내세에 대한 믿음(지혜서, 마카베오 하권)은 가톨릭교회가 연옥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는

성서적 근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도 이 성서를 사용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도 용서에 대한 가르침(마태 6,14-15) 은 집회서 28장 2절의 말씀에서, 기도에 대한 가르침

(마태 6,7) 은 집회서 7장 14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나에게 와서 쉬어라”(마태 11,28-30) 는 말씀은

집회서 51장 23-27절에서,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루가 14,13-14) 는 말씀은

토비트 2장 2절에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루가 12,18-19) 말씀은 집회서 11장 18-19절에서

그 내용을 엿볼 수 있습니다. 또 한가지 예를 들면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칠 형제 모두 한 여자에게 장가를 들었다가 자식이 없이 죽은 후 부활 때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마르 12 20-23) 라고 한 질문은 토비트서 3장 8절을 그대로 인용한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로마서(1,20)와 지혜서(13,5), 신약 특히 바오로 서간과 야고보서, 히브리서 등에서

제2경전과 같은 내용을 수록하거나 또는 인용한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와같이 예수그리스도께 직접 가르침을 받은 사도들로부터 비롯된 전통에 따라 하느님 말씀으로 인정되어 온

제2경전을 무엄하게도 빼어 버리고는 큰소리는 혼자 치고 있습니다.

또 제2경전은 이스라엘이 알렉산더 대왕을 시작으로 한 희랍제국의 지배 아래서 유다 백성의 본모습,

특히 팔레스티나 밖에서 살고 있는 유다인들의 본모습을 지켜 내기 위하여 지혜 문학의 형식으로 하느님께 충실하고

정의로운 유다인의 표본을 제시하고 있으며 특히 신앙의 전통과 가치를 다시 발견하고 재평가하도록 하여

그들의 충실성과 신뢰심을 자극하고 강화하려고 애쓰는 길잡이로써 극심한 압제 하에서의 유다 공동체의 상황 분석,

하느님의 섭리, 하느님의 뜻에 대한 충실성 분별 있는 행동과 저항 및 투쟁, 부모에 대한 사랑 기도와 단식,

온전한 결혼 생활, 죽은 사람들을 존중하는 마음과 순교에 대한 성찰의 기초를 보여주고

신앙의 영웅들을 찬양하고 있는 하느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누가 감히 손을 대어 훼손하거나 떼어버릴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가 팔레스티나에 살고 있는 유태인이란 말입니까?

그리고 매우 이상한 것은 AD90년경이라면 이때의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는데 동참했거나

혹은 죽이라고 고함치던 사람들, 아니면 바로 그들의 2세들로서 성 스테파노(스데반)를 돌로 치면서도

예수님을 지금까지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일 터인데 그들이 주장하는 히브리어 경전만을 구약으로 삼는

소위 종교 개혁가들의 의도를 도저히 알 길이 없습니다.

희랍(헬라)어 성서와 제1, 제2경전

할머니! 이스라엘 역사는 하느님께서 직접 개입하신 구원의 역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들의 역사 중 B.C1000년경 다윗의 아들 솔로몬 왕이 죽자 이스라엘은 두 왕국으로 분리됩니다.

북쪽은 이스라엘이고 남쪽은 유다인데 유다는 정통 다윗 왕가를 계승한 나라이지만

이스라엘은 다윗 왕가를 이탈한 나라가 됩니다(Ⅱ열왕기 17장).

그 이후 이들은 야훼를 배반한 죄로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 패망하고 유다는 바빌로니아에게 멸망당해

유배 생활을 하게 됩니다(Ⅱ열왕기 25장). 이것이 곧 바빌론 유배입니다.

이때 성전은 폐허가 되었고 예배 의식도 중단되었습니다.

예언자들은 그 까닭이 계약에 불충실한 때문이라고 정확하게 지적하고 자기네 죄를 깨닫고 물려받은 유산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때 율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과 주석가들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성서에 등장하는 율법학자 즉 랍비들(개신교: 서기관)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유배 기간 동안 자기들의 죄를 통회하는 랍비들에 의해

그들의 성서는 계속 기록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후 B.C333년 희랍의 알랙산더 대왕은 페르시아를 점령하고 소위 세계를 통일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지중해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공용어로서 희랍어를 사용하게 되지요.

이것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이때부터 랍비(서기관)들에 의한 성서 기록은 히브리어뿐 아니라 희랍어로도 쓰이기 시작합니다.

더욱이 나라를 잃고 떠돌이 하던 유다인과 알랙산드리아 지방에 이민해 온 많은 유다인들과

특히 그 후손들은 히브리말을 잊어 버리고 그리스 문화에 동화되어 버리게 됩니다.

더더욱 우려되는 것은 이들이 자기 민족을 구원하신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뿌리마저 잃어버릴 위기에

처해졌으므로 원래 히브리어로 쓰여진 성서를 희랍어로 번역할 필요가 절실히 요구되어

B.C250년경 희랍어에 정통한 유다인 학자 70명이 알랙산드리아에 모여 성서를 희랍어로 번역하게 되어

완성한 후 이를 70인역이라 부르게 됩니다.

여기에는 순수 히브리어 성서에서 희랍어로 번역된 39권과 희랍어로 쓰여진 7권을 합쳐

총 46권의 성서가 출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약 340여년간 사용해 오던 이 성서는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대로 AD(주후)70년에 로마제국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함락, 파괴되고 유대인들이 팔레스티나에서 쫓겨난 후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여긴 율법 학자들은

AD90년경 유대인들이 율법을 간직하고 유대인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하려는 취지에서

히브리 언어를 강조한 40권의 히브리어 성서 중 원본을 찾지 못한 1권을 제외한 39권만을 최종적으로 확정하고

희랍어로만 쓰여진 7권의 성서는 정경에서 제외 시켰습니다.

이때부터 구약성서의 정경이 두 종류가 나타나게 됩니다.

* 팔레스티나 유대인 정경 : 제1정경(히브리 정경)

* 헬라(희랍)문화권 유대인 정경 : 제1경전 및 제2경전이라 불리는 정경 목록 - 바룩서, 토비트서, 유딧서,

마카베오 상․하, 집회서, 지혜서 (7권)

* 이중 마카베오 상권은 원래 히브리어로 쓰여졌으나 원본이 분실되고 희 랍어 번역본만 남아 있다고 하여

이것마저 제1경전에서 제외시켰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고집센 유다인의 한 모습을 또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 사도들과 사도시대 교부들 중 누구도 제 2경전이 성령의 영감을 받은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원래 제2경전이라는 용어는 중세기에 시에나의 식스토(1528-1569)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고 초기 교부 시대에는 제1경전, 제2경전 구분 없이 그저 “교회의 책들(Libri ecclesiastici)” 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소위 종교 개혁자들은 16세기 이르러 제 2경전을 성경에서 제외시켜 버렸습니다. 그리고 루터는 또 1534년

독일어로 번역한 구약성서 끝에 제2경전을 "외경(Apokrypha)" 으로 간주하여 부록으로 붙여 놓았습니다.

원래 외경이란 용어는 “감추어진” 이라는 의미를 지닌 그리스어(희랍어, Apokryphos)에서 나온 말로서 보통 사람으로

서는 이해하기 힘든 “감추어진”내용을 담고 있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지금은 이것마저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가톨릭 교회에는 정경(즉 교회의 책들)이외에 유다인들과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읽혀지고 있던 책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책들을 “외경”이라고 하며 신앙생활에 유익이 된다고 믿고 있으나 개신교에서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이를 “위경(僞經)” 즉 “거짓된 책(Pseudepigrapha)” 이라고 합니다.

때문에 이 성서에 관하여 현재까지 가톨릭과 개신교간에는 그 용어상 차이가 있어 여기에 표시합니다.

가톨릭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개신교

제1경전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정경

제2경전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외경

외경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위경

※최근 꿈란동굴에서는 히브리어로 쓴 제2경전이 일부 발굴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는 믿는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은 예수님을 배척한 사람들이 주장한 것만을 믿는다?” 어쩐지 좀 어색합니다.

소위 종교개혁 이후 500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까지 저는 성경이 66권으로 변경된 이유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몰라도 믿기만 해라”? 그것은 무리입니다. 다만 저는 할머니와 여러 목사님들이 성경이 66권이라니까

그저 그런 줄로만 알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성경은 73권이며 하느님은 유대인의 하느님만이 아니라 만인의 하느님이십니다.

“유대인이나 그리이스인(희랍인)이나 할 것 없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그가 곧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지혜입니다”(Ⅰ고린토 1,24).

할머니 물론 그렇기는 하지만 저는 약120여 년 밖에 안 되는 짧은 우리나라의 개신교 역사 속에서도

그분들이 매일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애써 노력하고 있음은 너무나 존경스러운 일이라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다만 이 기쁜 소식의 복음을 생활화 함에 있어 오직 자기 구미에만 맞도록 유한한 인간의 머리로

자유 해석함에 있어서는 찬성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같은 행위가 자칫하면 또 다른 교회 분열, 교파 분열을 자초하는 악의 씨가 뿌려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 정경의 시대적 변화

BC450년… 모세5경

BC150년… 70인역(구약46권)

AD 90년… ① 팔레스티나 지방 유대인 정경 : 히브리어 성경39권

② 희랍 문화권 지방 유대인 정경 : 희랍어 번역본 46권(70인역)

신약(AD)에 들어와서

382년… 70인역(46권)+신약성경(27권) = 73권으로 약 1700년간,

1517년… 가톨릭교회 : 제 1경전(히브리어39권)+제2경전(희랍어7권)

+신약성경 27권 = 73권

개신교회 : 제1경전만 인정(히브리어39권)+신약성경 27권 = 66권

(교파마다 약간씩 다르나 제2경전을 외경 또는 위경이라 함)

1954년 이후… 세계 기독교 통일신령회 : 원리강록(예수를 실패한 그리스 도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 몇 년 전 남미계의 어떤 신학자는 「제2경전을 하나의 “소설 또는 사랑 이야기” 정도로 평하면서

엄격히 따져서 마카베오 상권만을 역사서로 여길 수 있다」고 한말이 기억납니다.

할머니께 죄송스러운 말씀이기는 하나 이제 이 손자도 나이가 들어서인지는 몰라도 그 신학자라는 사람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하기야 신학자답지 못한 신학자의 이름을 저로서는 일일이 기억할 필요도 느끼지 않습니다. 그는 성서 해석 방법을

제시하면서 이 같은 말을 하였으나 성서의 의미를 알아듣게 해주시는 열쇠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또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는”(마태 11,25) 분이시며

그분께서는 12살 나시던 사생활 시절이나(루가 2,46) 공생활 중에서도 소위 “소설이나 사랑 이야기” 를 읽으시며

이를 인용하시어 말씀하시거나 그렇게 하심으로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의 구원은 신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 을 통해 그분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로마 3,28) 으로서

그런 신학자는 우리들에게 혼란을 주지말고 차라리 그의 머리로 추리소설이나 쓰는 편이 더욱 나을듯도 합니다.

왜냐하면 훌륭하시고 많은 신학자들이 우리 교회에 큰 공헌을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잘났다하는 적지 않은 신학자들이

그들만의 지식으로 교회 분열을 조장해 왔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믿음의 첫 단추가 잘 끼워져야 합니다.  주님의 가호가 있으시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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