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Re:혼배성사에 대해 여쭙니다 | 카테고리 | 천주교 | ||
---|---|---|---|---|
작성자하경호 | 작성일2009-05-14 | 조회수1,042 | 추천수0 | 신고 |
설경구씨는 송윤아양과 결혼하기 위하여 세례성사를 받았다고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카이사르의 법은 카이사르에게 맞기고 하느님의 법은 하느님께 맞겨라'' 하시는 예수님 말씀을 복기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소식을 읽는 독자층 역시 ''하느님의 뜻으로 설경구씨가 성세성사를 받았구나!''라며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신자가 있는가 하면 ''거룩한 성사혼을 통하는 새로운 부부가 과연 사실혼, 사회혼도 보호받아야 마땅할 교회법 안에서 설경구씨가 나쁘고 사회혼을 이루었던 전 부인이 불쌍하게 되었구나!...''로 손가락질을 할 소지도 엿보입니다. 이럴경우 우리는 묵상을 통하여 하느님이 바라시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지혜가 과연 무엇인지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답은 간단합니다. 관할 방배동 성당 주임 신부님께서 설경구씨와 송윤아씨의 혼인성사전 면담을 통하여 이 결혼을 승인하셨기에 우리가 굳이 세세한 세상 소문에 휩쓸릴 필요는 없다고 보여집니다. 자칫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지어내는 이야기들에 부화뇌동할 소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뜻을 잘 받아들여 모든이들이 함께 축복을 받고 서로 용서와 화해로서 이어지도록 기도 기울이면 되겠습니다. 그러나 이 논리 역시 피해의식에 젖을 수 있는 설경구씨의 전처 가족측에게 마치 암으로 죽어가는 환자에게 그 고통을 참으라는 가족의 무지를 넘어선 폭력적 언어처럼 무조건 참으라는 논리로 비화될 수 있기에 우리는 또다시 하느님과의 대화 즉 기도로서 이 모든이들의 축복을 기원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마치 다수 성당 카페 회원들의 미온적 참여율속에는 카페의 생명인 댓글이 결여되고 있기에 우리도 또한 하느님의 그 풍성한 질문들에 가급적 응답으로서 논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설경구씨가 성세성사로 임했다는 것은 놀라운 은총도 숨겨져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세상의 레드오션이 아닌 더욱 깊고 넓으며 소중해야 할 블루오션을 필자 역시 글 쓰고 있는 논리와도 같을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법은 성사혼, 사회혼, 사실혼의 보호를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복을 가져오심은 세상의 행복과 다르기에 우리가 바라보는 그러한 보호가 아닌 혼인 생활 보호와 가족 건강 자체를 위해 그것을 가지고 오셨기에 우리는 초대 교황 성베드로께서 하느님과 내가 도저히 비교 대상이 아니기에 이 죄인을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라고 그들에게 설파하였음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신성과 인성의 하나됨으로 부활하시는 예수님을 묵상하면서 우리의 인품만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설경구, 송윤아 커플의 숙제를 함께 사랑의 행위까지 풀어가려는 자세가 필요할 것입니다. 한마디로 설경구씨의 전처와 딸의 행복을, 또한 설경구씨와 송윤아씨의 행복을 함께 빌어줘야 하는 난제가 놓여있는데 이 때의 어려운 사랑은 어차피 어려운 우리네 인생사에 있어 보람된 어려움으로 일차 승화로 이루려는 각오가 필요하겠지요. 누구한테 이것을 의탁하면 되겠습니까? 하느님의 제대위에 올려놓고 나역시 내려놓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땅의 작은신 엄마의 마음으로부터 더 나아가 성모마리아님의 마음으로 우리는 이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를 조금씩이나마 더해 나갈 것입니다. 설경구, 송윤아 커플의 부모님 마음을 유추한다면 좋은 힌트가 되겠지요. 그러나 이 때에도 설경구씨의 전처 부모님이신 장인, 장모님의 마음도 있겠군요. 점점 답이 멀어집니다. 마치 최고 지향의 하느님 사랑이 너무 멀기에 가까운 최선 결여의 우리 자신의 모습을 닮아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 부모님의 사랑이 모두 원하시는 방법 역시 분명히 우리 가까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아내가 남편의 부모를 이론적으로 남중 내편의 부모 섬기듯, 남편이 아내의 부모를 안의 해의 부모님으로 바라봄으로서의 다시 섬김이듯 답은 역시 아주 가까운데 있으며 그것을 작품화 해 나가는 것은 우리들 저마다의 몫인것니다. 그것은 주님의 느낌과 나의 느낌의 일치인 '공감'이 첫번째 제대봉헌이 아닌가 합니다. 두 번째 제대봉헌은 주님과 나의 느낌이 다를지라도 생각이 같은 '동감'일것입니다. 이로서 주님과 나의 느낌과 생각이 다를지라도 함께할 수 있는 동의가 이루어집니다. 그리하여 생각으로/ 말로/ 행동으로/ 습관으로/ 인격으로/ 인생으로 오늘 하루를 새 부대에 담아봅니다. 하늘나라 보따리 장사로 특채될 수 있는 것 참으로 행복한 일들입니다. 결론적으로 설경구, 송윤아씨는 약자인 공인입니다. 우리 가톨릭 신앙인들이 보호해줄 가치가 많을 것입니다. 설경구씨의 이혼 경력을 손가락질 할 권리는 가정에서 사회에서 미숙한 우리들 역시 아무에게도 없습니다. 설사 간음을 하였다 하더라도 그것 역시 마찬가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중 죄없는 자 이 여인에게 먼저 돌을 던져라'' 하였을 때 비지스가 I started a joke로 노래하며 죄 없으신 성모마리아께서 예수님께 순명키 위하여 돌을 던지실지도 모르겠군요. 아무튼 남 이야기를 쉽게하려는 우리들의 태도도 개선되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도 이왕이면 복음 평화의 도구자로서의 아빠보다 엄마들이 더 많은것인가요? 성당에서 혼인성사를 올린다는 것은 말이 되는 것이 아닌 마땅히 말씀이 됩니다. 이는 주님 모독죄가 아닌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이끌어주실 것이고 이미 모르고 짓는 오류의 수많은 사람들이 설경구, 송윤아 커플의 축복보다 애석하게도 질타를 더 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참으로 슬픈 일이며 세계적인 낙태, 교통사고, 이혼율을 안고 있는 우리나라 환경의 문제와 관련된 일이며 자살율조차 치솟으니 과연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언지 돌아보아야 할 때인 것입니다. 평신자인 우리는 이를 계기로 더욱 기도에 매진해야 할 것이고 이도 저도 아니라면 내 앞가림과 가까운 주변을 다시 돌봐야 하겠지요. 외인들 역시 이도저도 아닌것에서 손가락질만 일삼을 수도 있을테니 우리가 더욱 구체적으로 선교하는 것이 소중하겠습니다. 성모 엄마 손잡고 꼬치꼬치 사랑 나누면 될 것이며 율법과 바리사이적인 우리안의 내재적 사고를 경계하고 대처해 나가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단편적인 그것에 머물기 쉽상입니다. 그러나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 당당히 복음을 나눌 수 있으니 어 얼마나 기쁜 일이겠습니까? 가톨릭 교회법은 예수님 탄생과 더불어 2009년째 이어오며 보전되고 있으며 지금도 우리는 신약의 사도행전을 집필할 때입니다. 따라서 복음나누기가 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정화해 나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설경구씨가 외인이었기에 관계없는 혼인성사 성립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역시 그 반대입니다. 내 생각이 아닌 하느님 은총이 내 안에서 활동하심을 실피듯 우리는 외인이었던 설경구씨의 성세성사와 혼인성사를 기뻐하고 환호하며 예수님 예루살렘 입성시 '호산나 다윗의 후손!'하며 환호하고 다시 돌을 던졌던 군중에서 벗어나 성모마리아님을 따라서도 위로하는 신자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설경구씨는 마땅히 교회 법원을 통하여 바오로 특전법의 혜택을 입고 성사에 임했을것입니다. 전처와의 '혼인무효'는 그렇게 이루어집니다. 이는 ''아니면 말고'', 또는 ''카더라''통신과 다른 십자가 안테나인 것입니다. 아니면 더 보속하면 그만인 것이지요. 보속함으로써 우리도 두 번째 탄생인 영세를 통하여 새로운 태교에 임하여 참 행복의 영원한 탄생인 죽는 그날을 맞으면 그 뿐인 것이고 역시 하느님이 다 해결해 주실 것이기 때문인데 너무 전가가 되는건가요? 그래도 젊은날의 베드로처럼 무식하게 봉헌하다 보면 바오로의 지혜를 다시 얻을지도 모를 일이겠지요. 형제님이 배운 교리선에서 이해가 안 됨을 감사드리십시오. 그것도 분명 그리스도의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한 십년정도 열심히 믿음생활 하시다 보면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연예인이라서 세간의 질타를 많이 받기에 일반 연예인들처럼 이혼을 쉽게 안하고 더우기 이혼율이 가장 적은 기성 천주교인들처럼 살 가능성도 엿보이는군요. 우리의 기도가 더해진다면 더욱 좋은 결과 이어지겠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이혼에 대해 결코 관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전례를 이어오는 과정에서의 한편으로 인간적 기준들로는 본당 인준이니 뭐니 하면서 율법이나 앞세우고 본당 카페 한 번 들여다보지 못하는 단편적 사목 분과장들이 즐비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이 또한 우리 외모가 아닌 내면적 거울로 활용하면 누이좋고 매부 좋고로 이어질 것입니다. 아무튼 하느님의 눈으로 예수님의 입으로 성령의 의지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심을 믿나이다(성호경으로 해석할 수 있겠네요)의 과정 될 수 있게 해주시어 고마움도 전합니다. 덕분에 행복하였습니다. 행복하십시오.
海棠 하경호 Domingo |
||||
태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