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Re:축일 알려주세요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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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수근 | 작성일2010-04-21 | 조회수948 | 추천수0 | 신고 |
♥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 오따 주리아 의 자료를 전해드립니다. 일본성인이 아니라 이수란 이라는 우리나라의 최초의 성녀이셨습니다. 임진왜란 7년(1592~1598)전쟁 때 왜병들은 조선의 어린이와 부녀자를 포함하여 5만 여명을 일본의 포로로 끌고 갔는데 그 중에는 왕족 출신의 3살 짜리 어린아이도 있었습니다. 이 아이를 왜장 고니시 유끼나가는 자기 양녀로 삼았고,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그는 이 아이를 예수회 선교사 모레혼 신부에게 세례를 받게 하여 줄리아라는 예쁜 세례명도 지어 주었습니다 이때부터 이 아이는 오따 쥴리아로써 왜장인 양부모 아우구스티노와 유스티나에 의해 종교적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당시의 박해를 피해 밤늦도록 성서를 읽고 기도를 바쳤습니다. 1600년 도꾸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자 양아버지 아우구스티노는 처형당하였으며 오따 쥴리아는 도꾸가와 이에야스의 시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따 쥴리아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고해성사를 보고 성체를 영하는 등 신앙 생활에 충실하여 주위 사람들을 감격케 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 남몰래 양식도 많이 나누어주었습니다. 오따 쥴리아가 가톨릭 신자인 것을 안 도꾸가와 이에야스는 21살된 그녀의 타고난 사람을 감화시키는 덕성을 보고 배교하면 죽이지 않겠다고 했으나 오따 쥬리아는 목숨을 버리면 버렸지 신앙은 버릴 수 없다고 단언하였습니다. 결국 그녀는 1612년 4월 오오시마로 유배를 당하는 몸이 되었으며, 오따 쥴리아는 배를 타기 위해 부두로 가는 길에 일부러 맨발로 자갈길을 걸어가 그의 발에서는 피가 낭자했다고 합니다. 그녀가 맨발로 험한 자갈밭을 걸어 간 것은 십자가를 메고 사형장으로 향하던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기 위함이었으며 유배도 하나의 긴 순교로 생각한 그녀는 기쁜 마음으로 유배 길에 올랐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오따 쥬리아의 유배는 오오시마에서 니이시마를 거쳐 고오즈시마로 옮겨졌는데 이는 그녀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파하였기 때문에 이를 두려워한 관졸들은 장소를 바꾸어 그녀를 유배시킨 것입니다. 오따 쥬리아는 고오즈시마에 사는 동안 혼자 제대를 꾸미고 미사 드리는 흉내를 내기도 하고 멀리 육지에 있는 신부님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유배지에서의 신앙 생활의 어려움을 호소하는가 하면 순교자 전기, 성인성녀전, 기도서 등을 보내 달라는 부탁을 하여 그곳 섬사람들에게 신앙을 전했습니다. 오따 쥬리아는 극기와 인내와 기도로 40년간의 유배 생활을 마치고 유배지인 고오즈시마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오따 쥴리아는 신앙을 가진 완고한 조선의 여인으로 섬사람들의 후손 대대에 전해져 내려왔으며, 그녀의 성덕은 300년이 지나도 그곳 사람들의 신앙의 등불이 되어 1970년에는 일본 사람들이 제1회 쥴리아제를 개최하게 되었으며 해마다 열리는 쥬리아제를 통하여 많은 일본 사람들에게 오따 쥬리아는 죽어서도 하느님의 나라를 전하는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오따 줄리아(?∼1651). 오따(大田)는 일본식 성(姓), 줄리아는 세례명.
1900년 중국 상해에서 간행된 심용제(沈容濟) 신부의 ≪高麗致命事略≫에는 왕족 출신이라는 것이 밝혀져 있다[有一高麗王族李氏女子 聖儒立亞被倭將]. 임진왜란 때 천주교인 왜장(倭將) 고니시 유끼나가(小四行長)에게 3살의 어린 나이로 붙들려 일본으로 끌려간 뒤, 고니시 유끼나가 부부(夫婦)에게 입양되어 어려서부터 양모(養母) 유스티나의 종교적 교육을 받아 성장했고 예수회 선교사 모레혼(Morejon)신부에게 영세하고 수도자와 같은 극기 · 인내 · 기도로써 생활하였다. 1600년 양부모가 죽은 뒤 도꾸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가 정권을 잡게 되자 도꾸가와의 시녀(侍女)로 들어갔고, 그 뒤 도꾸가와의 천주교 박해령으로 일본내의 많은 천주교인들이 처형, 또는 유배당하게 될 때 오따 줄리아도 도꾸가와에게 배교의 위협을 받았으나 배교를 거부하고 21세 때인 1612년 4월 20일 유배형을 받아 오오시마(大島), 니이시마(新島)를 거쳐 이해 6월 고오즈시마(神津島)로 유배되었다. 유배형을 받고 배에 오르기 전 항구까지의 자갈길을 맨발로 걸어 피투성이가 되면서도 십자가를 지고 갈바리아 산을 오르는 예수를 묵상했고 또 예수회 선교사 파에즈(Paez) 신부에게 자신의 유배소식과 함께 기도를 부탁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고 한 교우로부터 유배도 일종의 긴 순교라는 말을 듣고 기뻐하며 유배길에 올랐다. 고오즈시마에 도착 후, 양부(養父)의 친구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의 후손들의 보호를 받아가며 어렵게 생활했으나 그러한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항상 극기와 인내와 기도를 잊지 않았다. 1651년 40년간의 유배생활 끝에 유배지인 고오즈시마에서 사망하였다. 함께 기억하겠습니다.
12월 25일 그리고 10월26일
또한 모든 성인들의 축일인 11월 1일에도
특별히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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