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Re:사음죄를 끊을 수 있는 방법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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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서성필 | 작성일2010-05-25 | 조회수1,961 | 추천수0 | 신고 |
이런 죄에 빠진 사람들을 건져낼 방법이 없을까?
그런 죄를 회개시키는 데는 3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철석같은 결심이고, 둘째는 범죄할 기회를 피함이요, 셋째는 자주 성사를 받는 일이다. 그런데 고해가 어째서 이 무서운 사슬을 끊는 데 효력이 없을까? 그 고해가 바른 고해였다면 매우 강력한 무기가 되겠지만 바로 여기에 벙어리 마귀가 발동하기 때문이다. 이 마귀는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 사람의 입을 막고 죄를 고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죄를 바로 고하면 의심 없이 사함을 받고, 또한 사음의 악한 야욕을 차츰 눌러 이길 수가 있다. 왜냐하면 고해는 악한 야욕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무언의 마귀는 어둠을 좋아한다. 그러나 고해는 빛을 가져오고, 이 빛으로 마귀를 쫓으며 죄인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죄가 얼마나 더럽고 고약한 것인가를 알게 해준다.
마귀는 있는 힘을 다하여 바른 고해를 못하도록 노력한다. 그래서 이 꾐에 걸려든 사람은 대개 모고해를 하기 시작하고, 한번 모고해를 하면 그 다음은 계속해서 모고해, 모령성체까지 하게 된다. 천주님은 이런 죄인을 아주 버리시지는 않지만, 사음죄의 버릇이 든 사람은 스스로 하느님을 멀리하고, 하느님을 생각지도 않으려 하고, 점점 죄가 깊어지면 하느님을 업신여기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래서 사음은 참혹한 죽음의 어머니라고 불리운다. 어느 성인이 말하기를 "부정한 생활은 부정한 죽음을 부르나니 그 이유는 흔히 사음 버릇이 든 사람은 임종 때도 고해를 잘 하지 않으려 하며, 죄를 통회하여 다시는 그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결심도 못하여 고해하기를 꺼리고, 해봐야 모고해를 하여 스스로 하늘나라를 잃고 지옥으로 떨어진다" 라고 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30세까지 방탕한 생활을 해오다가 눈이 열려 지금까지의 생활을 청산하기로 굳은 결심을 하고 젊음의 쾌락을 버린 채, 신부가 되고 주교가 되었을 뿐 아니라 큰 성인이 되었다. 그 분은 교회의 유명한 박사로 존경받고 있다.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도 30세 때 종전의 세속생활에 싫증을 느껴 단단히 결심하고 어느 수도원의 문을 두드려 거기서 엄한 보속을 하면서 자기 죄를 깨끗이 청산한 뒤에 예수회를 창립하여 교회의 빛나는 성인이 되었다.
아브룻도의 귀족 리레스 성 가밀로도 젊었을 때 이 세상의 향락과 방탕에 빠졌다가 25세에 수사가 되어 자신을 온전히 예수와 마리아에게 바쳐, 남은 생애를 병자와 임종때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헌신했다.
통회의 성녀 막달레나도 그렇지 않았던가! 골드나의 성녀 마르가리타도 사욕과 기만의 그릇이었으나 하늘나라의 화분으로 변하지 않았던가? 저 성인 성녀들의 굳은 결심은 자신을 영원한 죽음에서 영원한 구원의 길로 인도했던 것이다. 그런 결심이 없었던들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둘째로 범죄할 기회를 멀리하여 죄를 피해햐 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성인들의 모범을 본보기로 하자. 성 토마스 데 아퀴노는 어떤 탑 속에 갇히어 음탕한 여성에게 유혹을 받았을 때 그녀를 쫓을 방법을 연구하다가, 화로에 타고 있던 나뭇가지를 집어들고, "나가라. 나가지 않으면 이것으로 지진다"라고 소리지르며 그 여성을 내쫓고 나무 끝으로 벽에 십자가를 긋고 그 앞에서 기도했다 한다.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이 18세 때 파도아에서 공부하던 중이었다. 품행이 좋지 못한 젊은 여성이 악의를 품고 그를 끌어 안으려 했다. 성인은 그때 어떻게 했던가! "사탄의 심부름꾼아, 빨리 가라"고 말하면서 침을 뱉었다 한다.
젊은 디오스고로는 자신의 신앙을 버리도록 하려는 적의 온갖 계교를 물리쳤지만 최후에는 그를 유혹하려는 여자에 의해 장미의 침대에 붙잡혀 묶이게 되었다. 이 경우에 그는 어떻게 했던가? 그는 천주께 기구하고 자기 혀를 깨물어 그녀의 얼굴에 피를 뱉었다. 순교자의 피를 뒤집어 쓴 그 음탕한 여자는 무서워서 달아났을 뿐 아니라 도리어 자기 죄를 회개하고 착한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 한다. 그런데 혹시 어떤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듣고 "저분들은 성인들이니까 그렇게 했지만 우리는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냐?"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는 저분들도 성인이 아니었고 우리와 똑같은 약한 인간으로서 범죄를 할 것이냐, 이 기회를 단단히 피하기로 결심할 것이냐 하는 두 갈래 길에 섰다가, 용감하게 그 유혹을 이겨 결국 성인이 된 것이 아닌가? 우리는 비록 성인이 아니지만 신자된 것만으로도 초성의 힘으로 능히 범죄할 기회를 끊을 용기를 가질 수 있지 않은가?
우리는 모든 죄의 어머니인 게으름에 주의해야 한다. 게으른 사람은 항상 죄에 떨어지기 쉽다. 심심하게 지낼 때 자주 사음의 마귀가 유혹한다. 그 유혹을 당하는 사람은 자칫하면 죄에 빠진다. 그러니 게으름은 모든 죄의 근원이요, 어머니로 불리운다.
셋째로 사음죄를 피하기 위해서는 자주 성사를 받는 것이 필요하다. 고해성사는 매주일 또는 한 주일 건너서 하든지,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해야 할 것이다. 영성체는 될 수 있는 대로 자주 받아야 한다. 성체성사로 벙어리 마귀를 이기며, 그 올가미를 물리칠 수 있다. 마귀가 제일 무서워하고, 제일 싫어하는 것이 바로 이 성체성사다. 성 필립보 네리와 성 돈 보스코는 자주 성체와 고해를 받는 사람은 사음죄를 계속 범할 수 없다고 말했다. 세상 사람들은 수많은 사제들과 수사, 수녀들의 정결(貞潔)을 믿지 않는다. 이 더러운 세상에서 어떻게 저들이 순결(純潔)과 정덕(貞德)을 지킬 수 있는지 믿지 않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성사의 위력을 모르기 떄문이다.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자주 고해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성혈로 영혼을 깨끗이 씻고, 자주 영성체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한 살을 먹어 거룩하게 일치되는 그 비법을 세상 사람들이 믿지 않거나 모르기 때문이다.
질문] ‘사음죄’ 자꾸 짓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6계명에 관련된 죄가 있는데 여기에서 벗어나기가 힘듭니다. 고해성사를 보아도 자꾸 반복하게 되고 내 힘으로 안되는 것 같습니다. 신부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답] 죄 반복되면 한 사제에게 계속 성사보는 것이 효과적 성체조배·묵주기도 등 병행할 때 극복할 수 있어
그렇습니다. 유독 성(性)에 관련된 죄는 반복의 가능성이 많고 잘 고쳐지지 않습니다. 심리적으로도 인간은 성적인 죄를 고해하기를 부끄러워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것과 관련된 마귀를 벙어리 마귀라고 한답니다.
수치심을 집어넣어 고백을 못하게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톨릭 출판사에서 펴낸 <영혼의 성약>이라는 책에서 알퐁소 성인의 말을 인용하여 지옥에 빠지는 대부분의 신자가 사음죄 때문이라고까지 하였습니다. 지혜의 최고봉을 달린 솔로몬도 바로 이 죄 때문에 늘그막에 우상숭배에 빠지게 되었고 다윗도 이 죄에 넘어졌잖아요!
그러므로 이 죄에 대해서는 특별한 대책이 필요합니다. 고해성사를 솔직히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당부 드리고 싶은 것은 사음죄가 반복된다면 이 신부님 저 신부님 찾아가지 말고 한 신부님에게 계속 성사를 보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것입니다. 10번이고 100번이고 한 신부님한테 본다면 이겨낼 수 있습니다. 부끄럽다고 여러 신부님한테 돌아가면서 성사를 보면 성사를 이용할 수가 있고 결국 합리화의 명수가 되게 합니다.
그리고 그럴 리가 없지만 6계명에 대해 그 고해신부님이 별 것 아닌 죄로 취급한다면 그 신부님을 피해야 합니다. 같이 망합니다. 그 다음 중요한 것이 성체조배와 영성체, 묵주기도입니다. 이것과 병행해야 6계명과 9계명에 관련된 죄를 효과적으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사실 지금은 음란의 시대입니다. 이 음란은 한가한 눈을 통해서 먼저 들어오고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합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 몸도 환하고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 몸도 어두울 것이다.”(마태 6, 22~23)
예수님께서 또 이렇게 강조하셨습니다. “네 눈이 너를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외눈박이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마르9, 47)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성적(性的)인 죄에 대해서는 이렇게 적극적인 대책을 세우라는 것이고 죄에 대해서 단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측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성난 파도도 잠재우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죄를 통해 더 큰 은총을 누릴 수 있는데 그것은 더 큰 겸손과 더 큰 신뢰로 그것을 누립니다. 포기는 모든 것을 잃게 만듭니다. 그것은 일명 합리화라고도 합니다.
현대 사회학이나 심리학은 자위행위를 죄가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교회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자위행위를 대죄로 규정합니다. 자위행위를 자주하게 되면 사람은 아주 이기적으로 바뀝니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오로지 자신에게 집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성(性)의 목적은 자기증여입니다. 여기서 자기증여는 인격적인 것이고 희생과 절제의 산물입니다. 이 시대의 가장 큰 비극은 절제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마음껏 즐기는 것이 자유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성(性)이 상품화되는 비극을 양산하였습니다.
습관적 자위행위는 부부생활에도 치명적인 장애가 됩니다. 배우자에 대한 인격적 대우, 더 나아가 자기증여와 포기나 희생이 아니라 소유와 자기만족이 되기 때문에 일방적인 것이 됩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몸에 대해서도 존경이나 보호하려는 마음이 사라집니다. 네가 아니라 나, 나에 집중하는 것 이것이 근본적인 죄입니다 그러나 성이 상품화되는 이 시대에 이런 것에 대해 초연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아주 어렵게 여겨집니다. 신앙과 기도만이 이것을 해결합니다.
첫 번째 노력은 오감의 절제입니다. 특히 눈의 절제가 필요합니다. 성적인 유혹은 주로 눈을 통해서 옵니다. 눈을 조절하지 못하면 몸과 마음도 조절이 안 됩니다. 말초신경은 면역이 아니라 오히려 개발됩니다. 눈의 정결이 몸과 마음의 정결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노력은 결코 포기되어서는 안 됩니다.
두 번째는 한가함을 피해야 합니다. 한가함은 특별히 성적인 죄의 기회가 됩니다
세 번째는 기도입니다. 특별히 평일미사와 묵주기도는 모든 악을 물리치게 합니다. 정성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효과는 클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고해성사는 한 신부님에게만 보도록 한다면 더 효과적입니다.
부끄럽다고 여러 신부님에게 다니다보면 지도를 온전히 못 받습니다. 한 신부님에게 10번이고 100번이고 꾸준히 찾아가서 고해성사로 다시 시작한다면 이겨낼 수 있습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합리화와 핑계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어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사도 14, 22)
우리는 그렇게 살라고 초대받았습니다.
-김연준 신부(광주대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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