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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Re:천주교 4대 박해 에 대하여 알려 주십시요 카테고리 | 천주교
작성자이수근 쪽지 캡슐 작성일2010-07-24 조회수1,247 추천수0 신고

♡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

천주교 4대 박해❞ 

❝신유박해(순조 1년.1801년)⤍조선 최초의 대대적이고 전국적인 박해로1801.1.10.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의 금교령으로 시작되어 12.22에 반포한 반교문, 즉 척사윤음 으로 끝났다. 정약종, 이승훈, 권철신, 이가환 등 남인과 중국인 주문모 신부, 강완숙이  처형 또는 옥사했고 정약전, 정약용 등은 유배됐다. 가을에는 황사영 백서 발각으로  관련자 처형 등 순교자는 모두 300여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1801년1월10일. 신유박해는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의 금교령으로 시작돼 12월22일 반포한척사윤음’   으로 끝났다. 2월 정약종을 비롯한 5명이 참수 당했고, 이가환과 권철신은 옥사했으며  이기양과정약용, 정약전은 유배됐다. 박해는3월 주문모

신부의 자수로 더욱 가열된다.

 주신부는 조선에 입국해 강완숙의 집에 숨어 활동했다. 그러나 자신의 도피로 신자들이    잡히자 자수해 4월 순교했다. 전주에서도 3월부터 박해가 시작돼 유항검, 유관검, 윤지충 등이 체포됐고, 9월 사형선고를 받아

처형당했다. 신유박해는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황사영은 체포돼 10월 참수 됐으며

정약용, 정약전 등은 공모의 증거가 발견되지 않아 강진과 흑산도로 각각 유배 됐다. 황사영이 전한 바에 따르면 신유박해 때 서울에서 희생된 신자들의 숫자는 300여 명이다. 그러나 이 숫자는 지방에서 희생된 신자는

포함되지 않았으므로 더 많았을 것으    로 추정된다.


기해박해(헌종 5년.1839년) 앵베르(라우렌시오),샤스탕(야고보),모방(베드로)신부,    정하상, 유진길, 조신철, 유대철. 유소사, 정정혜등 순교, 이때 정하상 바오로는 상제상서를 지어 교회를 옹호하고 박해의 비합리성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순교하였다. 기해박해  순교자70위는 1925년 로마에서 교황비오11세에 의해 복자로 선포되었다.  1839년 3월~10월 계속된 박해. 이박해로 인해 참수된 천주교 신자는 70명이고, 옥중에서 죽은 신자는 60여 명인데 이 중70명이 시성됐다.

 기해박해의 표면적 원인은 사학이라 불리던 천주교를 배척한다는 것이었지만, 시파인 안동김씨의 세도를

빼앗기 위해 벽파인 풍양조씨가 일으킨 정치적 갈등이라고 볼 수 있다. 5월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던 박해는

일단 누그러져 평온을 되찾는 듯 했지만 7월,천주교 신자 색출에 노력하라는 대왕대비의 전교가 있게 되면서 상황은 역전된다.   샤스탕 신부의 복사로 있던 현석문, 조선교회의 지도자 역할을 하던 조신철, 정하상, 역관 유진길 등이 체포됐다. 이에 따라 피신해 있던 앵베르 주교는 자수를 결심 하고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도 자수한다. 9월 21일, 이들은 새남터 형장에서 군문효수로 순교하고 정하상과 유진길, 조신철도 참수된다.


병오박해(헌종12년.1846년)-김대건(안드레아) 현석문 가를로, 임치백, 우술임,  김임이, 정철염, 남경문,

 한이형 등 순교, 이때 현석문은 앵베르 주교의 말씀에 따라 순교자들의 전기를 편찬하는 임무를 완수하였다.  병오박해순교자9위는 1925년 로마 에서 교황비11세 에 의해 복자로 선포되었다.  프랑스인 성직자들과 800 여명의 신도들이 새남터, 서소문밖, 양화진 ,갈매못 등에서 순교했다. 이박해로 인해 조선 천주교회   는 목자없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기해박해 후 7년이 지난1846년6월5일김대건 신부의 체포를 계기로 시작된 병오박해 는 9월 20일 종결됐다.

이 박해로 형벌을 받고 순교한 사람은 성직자 1명, 평신도 8명 등 모두 9명으로 1984년 모두 시성됐다. 순위도 등산진에서 선주와 사공 등과 함께 체포된 김신부는 9월 16일 어영청을 거쳐 새남터로 끌려가 군문효수를 받았다. 그로부터 3일 뒤인 19일, 신앙을 굳게 지켜오던 현석문도 군문효수형을 받고 임치백, 남경문 등도 장사로 순교했다. 병오박해 의 여파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여러 차례의 박해를 겪어온 신자들은 박해소문을 듣고 피신했고,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도 교우촌으로 피신했다.


병인박해(고종3년.1866년)- 병인박해순교자 24위는 1968년 로마에서 교황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되었다. 가장 오랫동안 전국적으로 지속돼 수많은 순교자를 탄생시킨대 박해다. 일반적으로 1866년 초 시작돼   1873년 흥선대원군이 정계에서 실각할 때 까지를 박해 기간으로 설정한다. 병인박해로 순교한 천주교 신자는 대략 8천명에서1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는데 그 중 대부분이 무명 순교자이고 이름을 알 수 있는 순교자 중    에서 24명만이 시성됐다. 1866년 베르뇌 주교 등이 3월 새남터에서 순교하며 시작된 박해는 서울뿐만이 아니라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후 병인양요로 인해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더욱 가열됐다. 이 시기에 순교한 신자 수는 모든 기록을 종합해 볼 때, 대략 1만 명 내외로 추산된다.

신유박해(1801년).기해박해(1839년).병오박해(1846년).병인박해(1866년)❞⦿

 

❝한국천주교 대 박해❞

 한국에서의 박해는 한국교회가 창설된 지 1년만인 1785년3월(음)에 벌써 시작되었다. 중인인 역관 김범우는 그의 집에서 종교의 모임을 가졌다 하여 고문을 당하고 유배지에    서 한국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천주교와 유교 사이의 이러한 대립은 정조15년(1791    년)전라도 진산에서 현실로 나타났다.

신해진산지변으로, 신자인 윤지충이 모친상을 당하여 교리에 따라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살랐다 하여 주자가례)를 어긴 죄목으로 처형당한 사건이다. 이것은 충효를 절대적인    윤리로 여기는 유교의 봉건사회에서 양반가문의 일이고 보면 더구나 묵인될 수 없는 사회 변혁적 대사건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내용에 관한 종교적 의미의 박해라기 보다 유교윤리와의 충돌에서 오는 국가 이데올로기적 단죄였던 것이다. 즉 다른 사 상과 종교를 모두 이단으로 보는 유교사상의 독재적 박해였다. 1795년 을미년에 윤유일  등이 순교하고,

충청도 일대에 박해를 가하기는 했지만, 정조는 성품이 온화하고 탕평책 을 견지하였으므로, 그의 치세에는 천주교에 큰 박해는 없었다. 그 시대의 박해는 주로 항상 노론벽파가 남인시파를 꺼리고 질투하여 함정에 빠뜨리려는 당쟁의 소산이었다. 경신년(1800년) 6월에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정세는 일변하였다. 정조의 뒤를 이은 것은 11세의 순조였다.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가 섭정이 되었는데, 대비는 노론벽파에 속 하는 여인이었다. 순조(1801년)대왕대비가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를 선포하고, 전국에오가작통법을 세워 빠짐없이 고발케 하여 근절을 기하라고 하였다. 이것이 신유박해이다.   

 인의 거두인 이가환 권철신은 옥사당하고, 정약종과 홍낙민 등은 순교 하였으며, 이승훈이 처형되고,

정약전 약용형제는 유배됨으로써 남인세력은 거의 몰락 하였다.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3월 12일(음) 자현

하여 박해는 재연되고 그에게 은신처를 제공해온 독실한 여회장 강완숙과 궁녀 등이 순교하고 주 신부는 군문효수 되었다.  황사영이 체포되어 대역부도 죄 로 순교하였다. 이른바 황사영 백서가 탄로되어 큰 파란 을 일으키고 천주교에 대한 정부의 태도를 일변시켰다. 위정자들은 그것을 마치 천주교    회의 가르침인 양 단정하고, 외세를 불러들이는 매국도당으로 몰아 박해를 합리화시키는 구실로 삼게 된 것이다. 이해 12월(음)에 대왕대비는 토사교문이라는 것을 발표하여 천주교 신유박해는 약 100명의 순교자를 내는 한편 400명에 달하는 천주교인을 유배 시켰다.

 1839년 헌종5년에 또 기해박해가 일어났다. 사학토치령 에 의해 시작된 이 박해는 사학인 천주교를 퇴치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내면적으로는 시파인 안동김씨의 세도를 꺾으려는 벽파 풍양조씨 들의 책동에서 온 것이었다.  시파인 안동 김씨는 천주교에 대하여 비교적 너그러웠으나, 벽파인 풍양 조씨는 천주교    를 원수처럼 미워하였다. 한국교회는 1836년 이래 조선에 입국한 프랑스인 신부들을 중심으로 크게 교세의 확장을 보게 되었다.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오라버니 김유근이 중병으로 정계에서 은퇴하자, 실권은 풍양 조씨의 세도를 등에 업은 우의정 이지연  에 넘어갔다. 결과 역적 명분을 내걸고 천주교도를 몰아세운 이 박해로 남명혁 과

궁녀 박희순 등 9명이 순교하고, 6월부터는 유진길 정하상 조신철 등 한국교회 재건운동의 요인들이 잇따라 체포되었다.  앵베르주교가 수원에서 자현 충청도 홍주에서 모방신부 샤스탕신부도 자현하여 서울로 압송

되었다. 3인 선교사가 한강변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았고, 이튿날 유진길과 정하상 서소문 형장에서,

나흘 후 조신철 등 9명이 순교하였다.

 이때 정부는 공적인 처형이 너무 많은 것을 두려워하여 서울의 교우들에게만 교수형을 처하였다. 당시의 기록인 ≪기해일기≫에 의하면 참수된 순교자가 54명, 옥중에서 고문 또는 병들어 죽은 교인이 60여명이나 되었다. 기해박해는 서울 경기도에서 가장 많은 교자를 배출하였으나 규모가 광범했던 만큼 천주교에 대한 관심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는 데 큰 의의가 있었다. 지도자를 잃은 반면, 교회세력은 무식하고 가난한 서민층으로퍼져나갔다. 신앙내용도 윤리 중심에서 복음적 신앙으로 변해 간 것이 특징이었다. 교우    들은 산간벽촌으로 모여 신앙의 이상촌을 이루는데 힘을 모았다. 정하상은 순교에 앞서 호교문을 만들어 옥중에서 재상에게 진정서를 제출하였는데, 이것이 오늘에 전해지는 <상재상서>이다.

그는 이글에서 옛 군자는 어떤 이단자라도 법으로 금하기 전에 반드시 그 뜻과 이치를 연구하였거늘, 어찌하여 천주교에 대해서만은 그 기원과 전통을 조사도 하지 아니하고 무조건 사도로 규정하여 사형을 시키는 뜻이 어디에 있느냐고 정부의 부당한 처사를 신랄히 비난하였다. 헌종 12년(1846년)정부는 김대건신부의 체포를 계기로 천주교에 또 박해를 가하였다. 병오박해 이다. 김대건은 선교사들의 입국을 비교적 안전한 해로 개척하고자 서해의 등산진 까지 갔다가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마침내 7월 25일(음) 26세의 젊은 나이로 한강변 사장에서 순교하였다. 이 박해는 김 신부와 관련되어 투옥된 현석문 남녀교우 9명이 처형된 외에 다른 희생자는 없었다.

 

고종3년(1866년) 대원군 치하에서 한국교회사상 최대의 가혹한 박해가 또 일어났다. 병인박해이다. 박해의

 원인은 당시시베리아를 차지한 러시아의 남하정책에서 비롯되었다. 고종 초년에 러시아인이 함경도 경흥부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였을 때 대원군 이하 정부요인들의 놀람과 당황은 대단하였으나 이에 대한 대책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런데 고종 2년(1865년9월음)에 러시아인들이 또 경흥부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해 왔다. 이때 대원군은 천주교의 협조를 청해왔고, 승지인 남종삼 등은 대원군에게 한불조약을 맺어 나폴레옹 3세의 위력을 이용하면 능히 러시아의 침입을 막을 수 있다고 건의하였다. 대원군은 이를 만족히 여기고, 남종삼에게 한국교회의 책임자인 베르뇌주교를 만나도록 해달라고 청하고, 만일 러시아의 세력을 막아준다면 천주교에 대하여 신앙의 자유를 주겠다고 제의하였다.

황해도인편을 보내어 포교 중이던 베르뇌 주교를 서울에 돌아오게 하였는데, 그의 도착은 남종삼이 대원군의 요청을 받은 지 한달뒤의 일이었다.

1866년1월31일 남종삼은 주교의 도착을 알리기 위해 다시 대원군을 방문하였다. 1860년 영불연합군에 의해서 북경이 함락되었을 때, 청조의 위신은 물론, 한국의 고관들도 당황하여 피난 갈 궁리에 바쁠 정도였다. 그런데 그 때의 보복으로 중국 도처에서 양인살육의 피비린내 나는 사태가 벌어져 외국인 선교사와 중국인 신부, 신자들이 닥치는 대로 살해되고 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천주교를 증오해온 보수적인 정부고관들은 대원군의 천주교에 대한 교섭을 공공연히 비난하고 교도들의 탄압을 촉구하고 나섰다. 더구나 당시 운현궁에도 천주학쟁이가 출입한다는 소문이 퍼져 조대비)까지 들고 나오자, 대원군은 천주교의 탄압을 결심하고 선교사들의 체포에 서명하였다. 이 가혹한 박해로 한국에 있던 선교사 12명 중 9명이 처형되고, 남종삼 등 수많은 저명인사들이 참수되었으며, 전국방방곡곡에 철저한 탄압을 가하여 불과 수개월 동안에 약 8천명에 달하는 교인의 생명을 앗아갔다. 모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자생교회)의 전통을 지닌 한국교회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불사조와 같은 신앙의 생명력에 의해 심산유곡에 교우촌을 이루고, 후일 신앙자유의 날을 맞게 되었으며 1962년에는 숙원이던 교계제도의 설정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1984년에는 순교한 선인들 가운데서 거룩한 박해시대에 수난받는 신자들을 표현한 서소문 순교자기념탑 부조. 다가오는 2009년 한국 천주교회는 103위 순교자 시성 25주년을 맞는다. 그보다 한 해 앞선 2008년 순교자성월을 맞아 한국 천주교 4대 박해를 종합하고 당시 박해의 특징과 주요 순교자 등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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