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강론 잘하십니다
안문기 프란치스꼬(천안 봉명동본당 신부)
세상에는 네 종류의 사람이 있다. 첫째는 나도 죽고 남도 죽이자는 사람이고, 둘째는 나만 살고 남은 죽이자는 사람이다. 셋째는 나도 살고 남도 살리자는 사람이며, 넷째는 나는 죽어도 남은 살리자는 사람이다.
작년 10월, 20대 청년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훔친 차를 타고 눈감은 채 광란의 질주를 하여, 두 명이 죽고 스물한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기자가 범인에게 왜 그런 일을 저질렀느냐고 질문하였다. 범언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선천적으로 시력이 나빠 초등학교 다닐 때 칠판 글씨가 안 보여 공부를 못했고, 졸업 후에도 직장마다 내쫓아 세상이 싫어졌다. 나도 죽고 다른 이도 죽여 세상에 복수하고 싶었다.”
강론 잘한다
세상에 살인처럼 잔악하고 처절하며 괴롭고 눈물겨운 일이 어디 있는가. 긴장과 초조, 위협과 공포, 울분과 회개가 온몸을 뒤흔든다. 이런 사건들은 세계적으로 매주 몇 차례 발생한다. 주일 강론에 이런 살인극 이야기를 들려주면 놀란 토끼처럼 신자들의 귀가 번쩍 뜨여 모든 눈망울이 강론자를 응시한다. 지루하거나 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 미사 후에 문밖에서 “안녕히 가십시오.” 인사하면 으레 “강론 잘 들었습니다.”고 대답한다.
성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삶과 죽음을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어느 주일 독서나 복음을 읽어 보아도 인간의 생과 사, 행과 불행을 다루지 않는 것이 없다. 또한 하느님은 인간을 죽음에 붙이기(죽이기) 위하여 창조한 것이 아니고 인간을 살리기 위하여 창조하셨다. 아담의 창조와 낙원은 ‘영원한 생명’의 보증이었다(창세 3,22 참조).
그러나 아담의 불순명은 세상에 죽음을 가져왔다. 카인이 아벨을 죽였다. 이스라엘은 에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였고 바빌론에 유배당하였다. 인류는 마치 길 잃은 양떼와 같았다(루가 15,4-7 참조). 반면 예수님은 이 양들을 구하기 위하여, 멸망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다. 예수님 편에서 본다면 필생의 목표가 구원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구세주라고 한다. 그리고 사도들이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이방인이든 유다인이든, 모든 사람을 구원한다는 한 가지 목적 때문이다.
강론은 바로 이 구원의 선포이며 ‘구원의 말씀’(사도 13,26)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시며 구세주라는 사실을 공적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강론은 신자들이 듣고 음미하여 선택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어떤 신부가 잘했다 못했다고 평가할 일이 아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 줄 것입니까? 고맙게도 하느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해 주십니다.”(로마 7,24-25)고 대답하면 그만이다.
강론은 사람의 입으로 전달되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우리가 늘 하느님께 감사하는 것은 우리가 여러분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에 여러분이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1데살 2,13). 강론을 잘 들었다면 그것은 신부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들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 강론 참 잘하십니다.”고 인사하는 것이 옳다.
강론과 설교
강론(Homilia)은 사제나 부제만 할 수 있고 내용은 성서 본문에 대한 해설이다. 그러면 평신도는 강론할 수 없는가. 옛 교회법에서는 평신도의 강론이 금지되었으나 1983년의 새 교회법은 평신도가 설교의 허락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그것은 강론이 아니라 설교(Praedicatio)이며, 공소 예절이나 미사 전후에 할 수 있다. 설교는 일정한 주제를 가지고 신자들 앞에서 연설하거나 체험담을 얘기하는 것이다.
부제 이상의 성직자는 공식적인 복음 선포자로서 교육과 수련을 받았기 때문에 강론은 바로 성직자 고유의 직무이다. 또한 말씀의 전례 즉 말씀의 식탁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복음 봉독과 강론을 듣고 성찬의 식탁으로 이어지는 전례의 성격 때문에 성사를 집행하는 성직자 대신 평신도가 강론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이미 예수님과 바오로 사도는 유다인의 회당에서 강론하였고 2세기의 호교론자 유스티노도 그의 저서(“제1호교론”)에서 초기 교부, 주교들이 강론 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중세기에 강론을 소홀히 한 경향도 있었으나 현재는 강론이 전례의 한 부분으로 중요시된다. 전례 헌장(52항)은 “강론을 전례 자체의 한 부분으로 적극 권장”하고 있다. 주일이나 축일, 신자가 많은 미사에서 강론은 중대한 이유 없이 생략될 수 없다(미사 경본 총지침 41항. 42항 참조).
사절, 중재인, 증인
강론자는 사절(使節)이고 중재인이며 증인이다. 사절은 한 나라를 대표하여 사명을 띠고 남의 나라에 가는 사람이다. 강론자는 하늘 나라를 대표하여 파견된 하느님의 사절이다. 그러므로 국가의 사절, 공사, 대사에 비할 수 없는 고귀한 자이다. “파견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로마 10,15) 개인의 재주나 경험이나 성덕 때문이 아니며, 교회의 위임도 아니고, 오로지 아버지의 권한으로 그리스도가 파견되고 또한 사도와 그 후계자들도 파견을 받았을 뿐이다(요한 17,18 참조).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로서 그분을 대신하여 여러분에게 간곡히 부탁합니다”(2고린 5,20).
강론자는 하느님 말씀과 하느님 백성의 중재인이다. 본래 진정한 중재자(仲裁者)는 그리스도이시다. 하느님과 인류를 화해시켜 준 분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분은 하느님의 말씀(요한 1,1)으로 오셨다. 그리고 이 말씀은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한다. 이 말씀의 봉사자가 바로 강론자이다. 그러니 강론자가 하느님 말씀을 모르면 되겠는가. 그래서 강론 전에 성서를 읽고 묵상하며 연구하고 기도하기 마련이다.
강론의 주제는 무엇인가. 하느님이다. 그래서 강론은 신학이나 교리나 사목 상담이 아니다. 서두의 예처럼 나도 죽고 남도 죽이면 되겠는가. 하느님의 입으로 대답하라. 이것이 강론이다. 믿음과 용서, 기도, 정의, 사랑, 희망 등이 하느님의 뜻이다.
강론자는 증인이요 증거자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진리의 증언이요 구원의 보증이다. 강론자는 단지 하느님 말씀을 전할 뿐 아니라 그 말의 증인이 되고 삶을 통해 ‘제2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 개인의 신앙체험은 신자들에게 큰 관심과 감동을 준다. 그래서 강론 중에 강론자 자신의 내면 생활과 깨달음을 제시하는 것이 좋다.
정적을 죽이는 정치가들, 민중을 해치는 재벌 기업가들, 부정 입학시킨 교수들, 모두가 나만 살고 남은 죽어야 좋은 사람들이 아닌가. 이것이 우리 사회 현실이 아니던가. 이에 대한 예수님의 증언은 무엇인가. “도둑은 다만 양을 훔쳐다가 죽여서 없애려고 오지만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 또한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은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증인으로 확정되었다.
다음 강론은 당신 차례
어떤 부인이 주일 미사 강론을 듣고 집에 돌아가 신자 아닌 남편에게 전수하였다. 몇 달을 이렇게 하였다. 어느 날 남편이 부인의 전달 강론을 들은 후 “다음 주일부터는 내가 나가서 직접 듣겠소.”라고 말하였다. 남에게 전하려는 사람은 듣는 태도부터 달라진다. 더구나 다음 강론은 내 차례라고 생각하면 성서 말씀과 현실 문제와 해석과 결심을 위해 신부의 강론을 잘 알아들으려고 노력을 경주할 것이다.
예언자 이사야의 말씀이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은 그 받은 사명을 이루어 나의 뜻을 성취하지 아니하고는 그냥 나에게로 돌아오지 않는다”(이사55,11). 강론은 ‘나도 살고 남도 살리자’는 뜻이고 더 나아가 예수님처럼 ‘나는 죽더라도 남은 살리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즉 남에게 그리스도를 소개하여 친교를 맺어 주는 것이다. “우리가 보고 들은 그것을 여러분에게 선포하는 목적은 우리가 아버지와 그리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사귀는 친교를 여러분도 함께 나눌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1요한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