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야훼, 우리의 주여! 주의 이름 온 세상에 어찌 이리 크십니까! 주의 영광 기리는 노래 하늘 높이 퍼집니다.
2 어린이, 젖먹이들이 노래합니다. 이로써 원수들과 반역자들을 꺾으시고 당신께 맞서는 자들을 무색케 하셨습니다.
3 당신의 작품, 손수 만드신 저 하늘과 달아 놓으신 달과 별들을 우러러 보면
4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생각해 주시며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보살펴 주십니까?
5 그를 하느님 다음가는 자리에 앉히시고 존귀와 영광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6 손수 만드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고 모든 것을 발밑에 거느리게 하셨습니다.
7 크고 작은 온갖 가축과 들에서 뛰노는 짐승들하며
8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 물길 따라 두루 다니는 물고기들을 통틀어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9 야훼, 우리의 주여! 주의 이름 온 세상에 어찌 이리 크십니까!
12세기의 하느님의 작은 음유시인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읊조린 ’태양의 찬가’처럼 이 시편은 우주만상을 바라보며 창조계의 신비와 그 놀랍고 오묘한 의미를 되새기며 찬미를 드리고 있다. 하나 그것은 우주 그 자체에 대한 단순한 찬가라기보단 ’만물의 영장’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우주적 위치에 대한 경탄 어린 찬양이요, 더 나아가 한 신앙인으로써의 시인의 야훼 하느님을 향한 열정적인 황홀의 감사기도 - 신앙고백이랄 수 있다. 깊은 밤 홀로 깨어나 황량하고 적막한 사막의 맑은 밤하늘을 쳐다보며 인생의 모든 것들에 대해 조용히 묵상하다 그 신앙적 시인은 이런 놀라운 관상체험을 하였으리라.
현대를 인문주의 곧 인간중심주의적인 인간예찬의 시대라고 한다. 사실 인간은 자신을 전능자로 착각하여 바벨의 그 화살을 또 한번 손에 쥐려 한다. 인류는 못할 게 없다는 그 능력으로 잘못 또한 수없이 저질러 좌충우돌 우주만물에게 온갖 상처를 주고 있다. 아니 인간 역시 그런 몸부림 속에서 무수히 상처를 입고 심히 병들어 있다. 진실로 바울 사도가 말했듯 모든 피조물이 그 아픔으로 신음하고 있다. 그것은 아담의 범죄 이후 인간이 우주의 폭군으로 전락해 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현실상황에서 인간이란 하느님의 형상을 지니고서 "하느님 다음가는 자리에 앉은"(5절a) 존재라기 보단 온종일 망나니처럼 골목을 쏘다니며 장난치며 뒹굴다 저녁 늦게 돌아온 더러운 개구쟁이와 같은 비참한 절망의 존재라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게 볼 때 역설적으로 인간예찬의 시대에 인간은 오히려 더욱 절실히 구원(본래의 모습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필요로 하게 되었으니 인간의 상처는 그만큼 깊은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상처는 그토록 깊어도 하느님의 사랑은 그보다 더 깊다. 어머니가 그 꼬마의 더러운 손발을 씻어 주고 깨끗한 새 옷으로 갈아 입혀 고운 잠자리에 들게 하듯 하느님의 사랑은 어리석게도 "당신을 맞서다 스스로 꺾여"(2절b-c) 쓰러진 인류를 구원하시려 메시아 예수(말씀이신 그분)를 보내시어 그분을 ’속죄의 어린 양’으로 삼으셨고 그를 통해 모든 것 새롭게 하시고 결국에는 그냥 단순한 인간구원의 차원을 넘어 창조계의 질서를 다시 온전케 하시어 그날(천지창조의 6일)처럼 "손수 만드신 하늘과 달아 놓으신 달과 별들"(3절) 아래 "존귀와 영광의 관을 씌어 준"(5절b) 새로운 아담(그 첫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을 "가운데로 하고"(6절) "크고 작은 온갖 가축과 들에서 뛰노는 짐승들하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 물길 따라 두루 다니는 물고기들이 모두 함께"(7-8절) "주의 영광 기리는 노래 하늘 높이 퍼지게 할"(1절c) 그날을 이 땅에 오게 하시려 한다. 여기에서 시인은 감격하여 부르짖는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생각해 주시며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보살펴 주십니까?"(4절) 그것은 은총의 축복이며 그날은 아가페의 축제날이다. 그날이 올 것을 굳게 믿고 다가올 그날을 맑은 눈으로 바라보고 기다리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희망적이고 종말론적 신앙일 것이다. 그것은 "어린이, 젖먹이들의 노래처럼"(2절a) 티없는 마음만이 볼 수 있으리라. 하느님을 안다면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믿어야 하고 그분이 그리스도임을 믿는다면 하느님의 구원역사 역시 믿어야 할 것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을 믿는다면 그분이 다시 오실 것을 믿어야 하고 그분이 다시 오실 것을 믿는다면 그날의 실현 역시 믿고 바라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어떠한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온전한 희망을 버리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완성에로의 초대이니, 아담이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그 뜻이 그대로 이뤄질 날을, 인간이 지닌 그 고귀하고 고유한 가치가 그대로 드러날 그날을 믿기에, 아니 그 무엇보다 그 모든 걸 가능케 해주실 하느님 아버지가 계심을 믿으니 지금의 온갖 상처가 주는 모든 아픔의 가시는 오히려 그날을 향한 희망을 더욱 단단케 해주는 채찍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희망으로 볼 때 "온 세상엔 주의 이름이 가득하게"(1절b) 되는 것이다.
이 시인의 감격 어린 이 고백 역시 바로 그러한 깨달음, 곧 구원의 비젼을 신앙의 확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을 때 자연적으로 솟구쳐 나온 것이리라. 따라서 이것은 또 하나의 아름다운 창세기요 아마도 그날이 실현된 세계인 새예루살렘의 새 하늘과 새 땅 그날을 향한 예언적 찬가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