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은
어찌하여 우상숭배화의 위험에 빠지지 않았던가.
그것은 그들의 신체험(神體驗)
곧 그분의 현존이
극히 인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자와 함께 살 때
나는 그의 모습을
조각으로 그림으로 추억의 시(詩)로
굳이 지닐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비로소 내 곁을 떠났을 때
나는 그에 관한 것에 관심을 두고
그를 떠올리게 해줄 것을 남겨 두려
애를 쓰며 안타까워한다.
그런데 그분은 ’임마누엘’로써
그들의 온 삶에 함께 계셨기에
그들은
신(神)의 현존을 확인하기 위한 ’물(物)’을
구태여 만들어 지닐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내’가,
’나의 삶’이,
아니 ’온 누리’가
모두 그분의 성전(聖殿)이요 성소(聖所)인데
특히 그분은
언제나 항상 지금 여기에 함께 계시면서
들리고 느껴지고 보이고 만져지는 데,
무슨
"이것이 그분이다"
"여기는 항시 그분이 계시는 곳이다"
같은 게 필요하겠는가.
하기야 그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는
그런 것을 만들어 지닐 정도로
한가한 틈이 전혀 없었기도 하다.
사실 참된 신앙의 삶도 근본적으로
백척간두의 긴장된 도정이다.
그 평화는 세상의 평화완 다르고
순간 순간이 모험과 도전인
나태와 안일이 용납되지 않는 쫓기는 삶이다.
그들이 우상화에 빠지지 않은 데는
그런 점도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그들이 간혹 우상숭배에 빠져든 때도
가만히 살펴보면
솔로몬왕 제위 기간처럼 한가한 시기였다.
여기에서 언급해야 할 점은
설사 그리스도인일지라도
신(神)과의 이러한
인격적 만남과 거룩한 민첩성을 지니고 있지 않는 한
우상숭배의 유혹에 빠질 위험은
항시 상존한다는 사실이다.
신(神)은 영원히 현존하시는 데
마치 죽은 님인 양,
떠난 그이 인양
폐쇄된 시간과 공간으로 가둬 놓으니
신(神)은 그대 안에서
생명력을 잃은 ’물(物)’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우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