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나는 씨의 비유"는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 현대 그리스도교의 가장 큰 병폐 중의 하나는
"물질적 체험주의"이다.
곧 우리는 신앙에 있어서도 증거를 요구하고
뜨거운 특별체험을 중요시하고
외형적 신앙에 아직도 큰 비중을 두고 있다.
그리하여 성령충만을 은사로 가름하려 하고
기적이 없으면 기도회나 신앙대회가 안될 지경에 이르렀다.
더욱이 개인적으로도 자기신앙의 성숙도를
드러나는 것으로 채점하려 든다.
특별체험이 없으면 초조해 하고
물량적으로 많은 신앙행위를 해야 불만이 가시게 된다.
결국 신앙은 마약에 중독된 듯
쾌감만 쫓으며 메말라 가고 병적이 되어 가고
"신앙의 신비"는 전혀 사라져 가고 있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는 어떻게 자라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뉴먼 추기경도 말했지만
온전한 신앙은 "온유한 빛"인 것이다.
진실하고 성숙된 신앙은
뜨거움이 없어도 달아오르고,
보이지 않아도 있음을 알고,
듣거나 말하지 않아도 대화의 깊음에 잠겨 들고,
어둔 밤에서도 빛을 믿는
그것이다.
씨 뿌린 농부처럼
그는 "뿌린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는 모르지만"
언젠간 그것에 열매가 맺혀지고
풍성한 추수의 날이 올 것을 믿고 바란다.
그리하여 목마름 속에서도 촉촉이 젖어 있는 신앙이,
슬픔 안에서도 기쁨과 같은 믿음이 변함없이 있게 되고
그를 품어 온전히 지니게 된다.
마치 언젠간 병아리가 나오리라 믿고서
달걀을 품고 있는 암탉처럼,
언젠간 나비가 되리라 믿고서
번데기 속에 들어가 있는 애벌레처럼,
언젠간 새벽이 오리라 믿고서
어둡고 긴 밤을 지키는 파수꾼처럼,
그는 결국 나를 구원하시리라 믿고서
사랑으로 하느님을 믿고 있는 것이다.
과연 "밝아 오는 새벽을 누가 막을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