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외아들 이사악을 희생의 제물로 바치라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그 말씀과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찌 그럴 수 있는가!
그처럼 하느님께서
자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어
희생의 제물로 바치시겠다 하셨을 때에도,
역시 우리는 결국 하느님의 뜻인 그 사건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찌 그럴 수 있는가!
더욱이 이번에 그분은 자신의 이사악인 예수를 구하려
천사의 손으로 막지도 않았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전혀 도움을 주지 않으셨다.
아니 성부께선 그 아들을 구하시려
대속(代贖)의 희생양(犧牲羊)을 찾아 둘러보셨는지도 모른다.
부모의 마음은 한가지이니!
그것은 아브라함의 아픔 이상의 것이었다.
하지만 예수를 대신할 양(羊)은 그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
과연 그때처럼 나뭇가지엔
한 마리의 양(羊)이 걸려 있었다.
그러나 가까이 보니 그것 역시 예수 그리스도였다.
즉 나무에 걸린 것은 그분 자신이었다.
그리하여 어쩔 수 없이 그분은
나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당하시게 되었다.
그것도 가시나무에 머리가 얽어 매여진 양의 뿔처럼
머리에 가시관을 쓴 채로,
아브라함의 쇠칼과 같은
쇠못에 손과 발이 여지없이 찔리시면서,
그분은 돌아가셨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외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요구하셨듯
인류의 죄악은 하느님의 외아들까지 요구하였다.
그것은 하느님의 본질을 파괴하려는(루가 20,14-15)
곧 하느님을 꺾으려는(이사 14,13-14) 교만
죄악의 요청이었다.
그 사악한 짓에 하느님은
아브라함이 그러했듯 순순히 응하셨다.
더욱이 아브라함의 경우(창세 22,7)와는 달리
여기엔 인류를 향한 사랑 때문에인
성자의 자발적인 순종(히브 10,5-7)이 함께 하였다.
아브라함이 3일을 걸어 모리아산에 도달했듯
(그 시간이 얼마나 길었을까!
’지금이라도 하느님께서 이 분부를 거둬 주신다면!’
얼마나 매순간 마음 조였을까!)
성자(聖子)께선 33년을 사신 후 갈바리아산에 도달하셨다
(’이제라도 인류가 회개하여 준다면!’
얼마나 애태우셨을까!).
그러나 이사악은 살해를 모면했으나
인류의 끝간데를 모르는 죄악에 의해
성자는 끝내 피살당하셨다.
거기엔 ’야훼 이레’의 수양도 없었다.
오히려 "더 찔러! 더 찔러!"하는
패륜의 아우성만 악머구리처럼 들끓었다.
그런데 보라. 그 사건의 결과는 동일하니.
하느님의 사랑은 성자의 죽임 당함을 통해
오히려 인류의 죄를 속죄하는 ’십자가의 신비’를 드러내신다.
뿐만 아니라 인류는 성자를 죽였으나
하느님은 그분을 ’뼈 하나 부러지지 않은’(요한 19,36; 창세 22,12)
온전한 상태로 부활시키신다.
즉 모두 축복과 화해의 끝맺음이다(창세 22,1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