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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토비트 입문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4-11-02 조회수4,652 추천수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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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비트 입문

 

 

토비트서는 유다 문학의 보물과 같은 책이다. 이 책은 주변 이교도 세계의 지혜 문학 전통을 본받은 대중적 설화이자, 당시에 이미 꼴을 갖춘 기존 성서의 내용을 풍부히 담은 교훈적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토비트서는 기원전 587년에 일어난 예루살렘의 함락, 성전의 파괴, 유다 왕국의 멸망으로 시작하여 50년 동안 지속된 유배 시대에 펼쳐진 유다교의 인간적, 종교적 생명력을 잘 보여 준다.

 

 

1. 토비트서의 줄거리

 

친족 관계에 있는 두 유다인 집안이 유배를 가서, 한 집안은 현재의 이라크에 있는 니느웨에서 살고, 다른 집안은 현재의 이란에 있는 엑바타나에서 산다. 이 두 집안은 유배의 땅에서도 율법을 충실히 지키는 모범적인 가정이었다. 그런데 둘 다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그만 불행에 빠지고 만다. 첫째 집안의 가장인 토비트는 임금의 “호의와 귀염”을(1,13) 받으며 높은 벼슬살이를 하면서도 동포들에게 자선과 선행을 베풀다가, 마침내는 사형감으로 수배를 받아 벼슬은 물론이고 재산도 모조리 압수당한 채 도망치는 신세가 된다. 게다가 얼굴도 모르는 동포를 장사지내 주고 난 직후에는 눈까지 멀게 된다. 다른 집안의 외동딸 사라는 악령에게 붙들려, 혼인만 했다 하면 첫날밤을 치르기도 전에 악령이 신랑을 죽여 버린다. 그러한 일이 벌써 일곱 번이나 일어났다. 하느님께서는 이 두 사람의 기도를 들으시고, 바로 ‘하느님께서 고쳐 주셨다’를 뜻하는 ‘라파엘’ 천사를 통하여 토비트와 사라를 고쳐 주기로 결정하신다. 토비트는 아직 하느님의 결정을 모른 채 아들 토비아의 장래를 안전하게 하기 위하여, 그를 메대 땅으로 보내어 자기가 전에 맡겨 놓은 돈을 찾아오게 하리라고 결심한다. 그리하여 먼길을 떠나는 아들에게 일종의 노자로서, 조상들에게서 내려오는 지혜의 가르침들을 일러 준다. 그리고 사람 모습을 한 라파엘 천사가 여행 안내자로 나선다. 라파엘은 모험 가득한 이 여행길에 토비아를 동반하면서, 마침내는 이 총각이 자기의 친족 사라와 혼인하여 사라를 구하도록 이끈다. 아내와 함께 집으로 돌아온 토비아는 다시 라파엘의 인도에 따라 늙은 아버지의 병도 고치게 된다. 그리하여 두 집안은 행복을 되찾는다. 라파엘은 자기의 정체를 밝히고 나서 사라진다. 그리고 이야기는 하느님에 대한 감사와 미래의 구원에 관한 전망 속에서 끝을 맺는다.

 

 

2. 대중적 설화

 

이 이야기에는 시간, 장소, 등장 인물, 그리고 기원전 734년부터 612년까지 아시리아와 이스라엘을 아우르는 큰 역사적 사건들과 관련된 세부 사항들이 숱하게 나온다(1장; 14장). 그래서 언뜻 보면 이 설화가 엄밀한 의미의 역사 이야기라는 인상을 준다. 토비트와 그의 집안은 납달리 지파와 함께 유배를 갔다고 한다. 2열왕 15,29에 따르면, 이는 이스라엘 왕국의 임금 베가가 일으킨 반란을 징벌하려고 아시리아 임금이 이 북왕국의 북부 지역을 점령하였을 때의 일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겉으로는 이렇게 역사적으로 정확히 서술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여기에 나오는 많은 사료를 비판적으로 조사해 보면 역사적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자기가 말하는 임금들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하고(1,2 첫째 각주; 1,15 각주 참조), 또 자기가 서술하는 지방에 가 보지도 않았음이 분명하다(5,6 각주 참조). 그가 자기 시대에서 볼 때에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조상들의 먼 옛날, 곧 기원전 8세기와 7세기를 이야기의 시대 배경으로 삼은 것은, 자기의 설화에 사실성과 권위를 부여하기 위함이다. 

 

사실 토비트서의 저자는 그림을 그리는 듯한 서술과 생생한 세부 묘사를 좋아하는 이야기꾼이다. 토비아가 먼길을 떠나는 것을 눈물로 바라보며 따지는 아내를 타이르는 토비트의 모습이라든지(5,18-22), 개가 젊은 주인을 따라갔다가 함께 돌아오는 장면(6,2; 11,4), 또 하녀가 한밤중에 손에 등불을 들고 신랑 신부의 방에 살짝 들어가서 그들을 살피는 장면이라든지(8,12-14), 귀향길이 늦어지는 아들을 걱정하는 늙은 부모의 모습(10,1-7) 등은 이야기를 듣는 모든 이에게 전혀 낯설지 않은 일상의 체험일 수 있다. 그리고 서술되는 사실들은 서로 충돌하는 일 없이 매끄럽게 연결될뿐더러, 모든 것이 미리 정해진 결말로 순조로이 모아진다. 이러한 모습들은 토비트서 전체를 조금은 콩트처럼 보이게 한다. 예컨대 토비아가 동행자를 찾기 시작하자마자 라파엘이 그 앞에 나타나고(5,4), 또 여행을 시작하자마자 바로 큰 물고기를 잡음으로써 여행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약이 미리 마련된다(6,2-6). 이로써 토비트서의 저자는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이였고, 그의 청중은 전혀 바쁠 것 없이 그의 이야기를 느긋이 들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3. 토비트서의 출처 : 지혜 문학 전통

 

토비트서의 저자는 자기의 이야기가 ‘현인 아히칼의 이야기’ 또는 ‘아히칼의 지혜’라고 불리는 문학 작품에 근거를 둔다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낸다. 이 작품은 고대 근동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리고 그리스의 유명한 이솝이 우화를 지을 때에 이 작품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그리스 사람들까지도 이 작품을 알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이러한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아히칼 이야기의 가장 오래된 형태는 유다인들이 모여 살던 이집트 남부 엘레판틴에서 발견된 기원전 5세기의 것이다.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과 그 뒤를 이은 에살하똔의 대신이었던 아히칼은, 전설적 요소가 덧붙여져서 미화되기는 하였지만 본디 역사적 인물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1,22. 그리고 2,1.10 참조). 아히칼은 자식이 없어서, 자기의 궁정 일을 이어받게 하려고 조카 나답을 양아들로 삼는다. 그는 금언의 형태로 된 일련의 충고로써 나답을 현인이 되도록 교육한다. 그러나 나답은 양아버지와 관계를 맺고 나서는(11,19 참조) 자기가 받은 지혜를 멸시하고, 게다가 중상까지 하여 자기의 은인이며 양아버지인 아히칼을 형벌을 받아야 하는 지경에까지 내몬다. 그러나 어떤 형리가 지혜를 자기 형제처럼 여기는 아히칼을 숨겨 준다. 마침내 복권된 아히칼은 조카에게 비유로 된 꾸지람을 퍼붓고 나서 그를 감옥에 던지고, 나답은 그 안에서 최후를 맞이한다(14,10). 

 

토비트서에서는 이 유명한 아히칼이 바로 토비트의 조카로 나온다(1,22). 이렇게 하여 이 유명한 아히칼이 당시 근동인들 사이에서 누리던 특별한 지위와 권리를 삼촌인 토비트와 그의 백성인 유다인들에게도 부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토비트 이야기의 구조 자체가 ‘아히칼의 지혜’의 구조를 본뜬 것으로 보인다. 아히칼처럼 토비트도 아시리아 임금의 총애를 받다가 노여움을 산다(1,13-20). 그리고 토비트도 아히칼이 한 것처럼 아들에게 두 번에 걸쳐 일련의 금언을 들려 주는데(4,3-19; 14,8-11), 그 가운데에서 어떤 금언들은 바로 아히칼의 것들을 빌려 온 것으로 여겨진다(4,10.15.17.19). 그러나 나답은 배신을 하는 반면, 젊은 토비아는 지혜 교육을 충실히 받은 사람답게 행동한다. 이는 늙은 토비트가 가르친 지혜가 아히칼 현인의 지혜보다 뛰어남을 시사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이로써 이 책의 문학 양식이 분명해진다. 곧 대중적 설화이면서 동시에 교훈적이며 지혜 문학적인 의도를 지닌 이야기이다.

 

 

4. 유배로 흩어져 사는 유다인들을 위한 가르침

 

저자가 유배자들의 전형인 토비트와 토비아의 이야기를 통하여, 여러 나라에 퍼져 사는 동포들에게 주려는 것은 종교적 가르침이다.

 

(1) 하느님의 섭리와 천사

 

토비트서가 다루려는 문제는 하느님께서 과연 곤경을 겪고 있는 당신의 성실한 백성을 배려하시는가 아닌가가 아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위하신다는 것은 분명하다(3,17). 이 책의 관심사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배려가 괴로움을 당하는 이들에게 어떻게 이루어지느냐는 그 방식이다. 곧 사람들이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일들을 통하여, 미리 확정된 계획 또는 끝에 가서야 밝혀지는 비밀을 성사시켜 가는 방식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하느님께서 토비트와 사라의 기도를 들어 주심(3,16-17)과 라파엘이 비밀을 털어 놓음(12,11-15)이 이 이야기의 두 기둥 구실을 한다. 

 

하느님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이는 천사들이다. 토비트서는 유배 시대에 특히 페르시아의 영향 아래 이 신앙이 어떻게 발전하는지 보여 준다. 천사들은 이제 수가 많아지고 저마다 이름을 가졌을뿐더러 특수한 직무를 부여받는다. 하느님의 행동이 인간의 자유를 위협하는 일 없이, 천사가 이처럼 인간적인 모습을 취하는 것은 구약성서의 다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현상이다.

 

(2) 행동 규범

 

토비트가 아들에게 해 준 충고(4,3-21; 14,8-11)는 이 책을 이해하는 열쇠 가운데 하나이다. ‘아히칼의 지혜’에서 빌려 온 계율들은 이보다 더 뛰어난 지혜 곧 모세의 율법에 나오는 계명들과 섞인다. 이것들의 내용이 이 책의 핵심을 밝혀 준다. 유다인이 이국 땅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보존하고 하느님의 도움을 받는 의인으로 계속 남아 있도록 해 주는 원칙들이 모두 여기에 들어 있다. 토비트의 영적 유언에 들어 있는 계명들은(4,3 첫째 각주; 14,3 각주 참조) 대부분 이 이야기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행동에서 구체적인 예증을 볼 수 있다.

 

(3) 가정과 혼인

 

가정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사회 조직의 근간으로서 한 민족의 정신적 유산이 전승되는 곳이다(1,8; 4,19; 14,3.8-9). 그 때문에 토비트서에서는 가족들의 단결, 특히 부모 공경을 잘하게 해 주는 모든 덕이 강조된다(1,8; 3,10.15; 4,3-4; 6,15; 14,12-13). 혼인은 한 가정의 삶에서 결정적인 일이다. 세대 교체가 이루어지는 혼인에 한 인간의 미래가 달려 있다. 특히 유배로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사는 유다인들에게는, 현지인들과 혼인함으로써 종교가 다른 그들에게 동화될 위험이 크다. 그래서 토비트가 아들에게 준 충고의 핵심에(4,12-13), 그리고 이 책의 한가운데에(6-8장) 왜 하필이면 혼인 또는 혼인 이야기가 자리잡고 있는지 이해하게 된다. 토비트서는 결국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는 혼인 이야기인 것이다.

 

(4) 선행

 

가정에서 대대로 전승되는 것은 하느님과 그분의 계명에 대한 충실성이다. 그 가운데에서 하느님에 대한 충실성이 기본이다(1,12; 2,2; 4,5; 14,8-9). 그러나 그것은 구체적 행동으로, 또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율법의 세심하고 면밀한 준수로 표현되어야 한다(1,8 넷째 각주). 여기에서 이미 장차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서 보게 될 열성을 예감하게 된다(1,8 넷째 각주; 3,15 둘째 각주). 성전과 그 전례에서 멀리 떨어져 산다는 사실이, 하느님과 이웃에게 개인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의무들을 강조하기에 이른다. 토비트의 이웃은 아직도 그의 친척과 동족으로 한정되어 있다(1,3.16.17; 2,2 등). 여러 형태의 도움(1,17; 2,2.10; 4,16), 올바른 보상(4,14; 5,3.7.10.15; 12,1), 장례(1,17-18; 2,3-8) 등, 참다운 가정에서 받을 수 있는 모든 혜택을 유다인 동포들도 빠짐없이 받아야 한다. 그 가운데에서 자선과 기도가 다른 모든 의무보다 더 중요하다.

 

공동체를 결속시켜 주는 방도인 자선은(1,16; 4,7-8.16; 14,8-9) 또한 하느님의 은혜를 받게 해 주는 보장이기도 하다. 이러한 자선은 그것을 행하는 이에게 보물이 되고 속죄가 되며 하느님께서 기꺼이 받으시는 제물이 된다(4,9-11; 14,8-11). 하느님에 대한 충실성에 모든 것을 거는 의인은 당연히 기도에 의지한다. 이러한 기도는 일련의 형식적 의식이 아니라 언제라도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로 여겨진다(4,19). 실망(3,1-6.11-15), 불안(8,5-8), 그리고 기쁨(8,15-17; 11,14-15) 등 갖가지 상황에서 올려지는 기도는 하느님을 찬양하고(3,11 둘째 각주), 또 그분께 감사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분께서 의로우시고 그분의 모든 행동이 올바르며, 그분의 모든 길이 자비와 진리이기 때문이다(3,2).

 

(5) 성조들의 삶의 회상

 

토비트서의 장면들은 성조 이야기의 장면들과 흡사하다. 토비아도 이사악이나 야곱처럼 여행 중에 배우자를 얻는다. 또 야곱이 다른 자식들의 말만 듣고 요셉이 없어졌다고 믿은 것처럼, 토비아의 부모도 한동안 그가 어디에 있으며 무슨 일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다른 이유에서이기는 하지만, 토비트서의 사라도 성조들의 부인들처럼 자식 없이 살 운명처럼 보인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마므레에서 천사의 방문을 받았듯이, 토비트에게도 사람 모습을 한 천사가 찾아간다. 

 

토비트의 이야기와 성조들의 이야기 사이의 유사성은 이러한 상황들에 그치지 않는다. 이야기에서 쓰이는 용어들까지 비슷하다. 대수롭지 않게 보이는 세부 사항도 거의 말 그대로 창세기에서 빌려 온다. 곧 만남(7,3-4와 창세 29,4-6), 싹터 오르는 사랑(6,19와 창세 24,67), 그리고 혼인(7,11과 창세 24,33.50-51) 등이다. 

 

성조들의 유랑은 유배자들의 방랑으로 이어진다(4,12 참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은 채 은밀히 이루어지는 당신의 섭리로 조상들을 보살피셨듯이,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까지 보살펴 주신다. 이러한 섭리는 만남을 주선하고, 구원과 혼인을 통해서 하느님의 약속이 대대로 이어지게 하며, 마침내는 “아브라함의 땅”으로 돌아가는 날을 맞게 해 준다(14,7).

 

(6) 예언자들의 빛

 

토비트는 자기의 개인적인 운명뿐만 아니라 유배를 당한 동포들의 운명도 예언자들의 빛으로 해석한다. 나단이 다윗에게 전한 예언을 상기시키는 이러한 토비트서 안에는 예루살렘과 그 임금에 관한 열렬한 회상도 자리잡고 있다(1,4. 그리고 5,14 참조). 토비트가 동포들과의 연대성 속에서 겪는 불행은, 아모스 예언자가 죄 많은 이스라엘인들에게 예고한 징벌을 채우는 것이다(2,6). 선택된 백성의 미래는 아직도 닫혀 있다. 그래서 우리는 토비트가 눈이 멀게 되었다는 사실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고픈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가문을 이을 토비아를 통하여 육적인 눈만이 아니라 영적인 눈까지 열어 주신다. 그리고 눈이 멀었던 토비트 자신이 예언자가 되어, 민족 전체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예언자들을 통하여 약속된 구원을 예고한다(13장). 니느웨가 황폐하게 되리라는 나훔의 예언이 성취되면, 예루살렘 성전은 시간이 다 찰 때까지 임시로 복구될 것이다. 토비트는 더 나아가서 이사 60-62장과 흡사한 어조로, 때가 되면 모두 고국으로 돌아가고 예루살렘은 눈부시게 화려한 모습으로 재건되리라는 밝은 전망을 펼쳐 보인다. 여기에서 예루살렘은 민족들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된다(13,10-18; 14,3-7). 

 

이러한 성조 이야기와 예언의 배경에서, 모세와 선조들로부터 내려오는 지혜에 대한 나날의 충실성이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된다. 그 의미는 선조들이 들어간 바로 그 길로 “아브라함의 땅”에 돌아감을 준비한다는 것이다.

 

 

5. 본문과 원어

 

토비트서의 본문은 번역본으로만, 그것도 서로 매우 다른 세 가지 형태로 전해 내려온다. 

 

1. 첫째는 시나이 사본이라고 불리는 기원후 4세기의 그리스 말 수사본에 들어 있는 본문이다. 이 본문은 다시 예로니모 성인이 옮긴 대중라틴말성서 이전의 고대 라틴말역에 상당히 충실하게 번역되어 있다. 이를 ‘긴 본문’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이 본문은 셈족(곧 히브리 말, 또는 아람 말)의 어조를 띠면서 때로 조금은 장황하기도 하지만 문장이 화려하면서 일관성이 있다. 쿰란에서 하나는 히브리 말, 넷은 아람 말로 쓰인 토비트서 단편들이 발견되었는데, 이것들은 대개의 경우 이 ‘긴 본문’을 지지한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이 본문을 지금은 잃어버린 원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간주하는 추세이다. 우리도 이 본문을 번역하기로 한다. 

 

2. 둘째는 위의 것보다 간략한 본문으로 가장 많은 수의 그리스 말 수사본에 들어 있는 것이다. 이를 ‘짧은 본문’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이는 부차적인 세부 사항들을 제거하고 더욱 분명한 형태가 되게 간추린 내용을 더 정확한 그리스 말로 제시하기 위하여 이미 있던 본문을 개정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이 본문을 채택하고 있으며, 현대의 번역본들에서도 더러 이 본문을 대본으로 삼는다. ‘긴 본문’에는 4장과 13장에 명백하게 누락된 부분이 있는데, 이를 이 ‘짧은 본문’의 도움을 받아 채운다. 

 

3. 학적으로는 덜 중요하지만 토비트서의 셋째 형태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기원후 5세기부터 라틴 교회의 전통에서는 이 본문만 알았고, 현재도 가톨릭 교회의 전례에서는 이 본문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예로니모가 아람 말로 쓰인 원문을 번역한 대중라틴말 성서이다. 예로니모는 토비트서를 경전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번역할 마음이 없었지만, 몇몇 주교가 간곡히 부탁하는 바람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다면서도 마지못해 번역하였다. 그리고 그가 아람 말을 몰랐기 때문에 어떤 유다인이 아람 말 본문을 즉석에서 히브리 말로 번역해 주면, 자기가 다시 서기에게 라틴 말로 불러 주는 방식으로 단 하루만에 토비트서 번역을 끝냈다. 이렇듯 짧은 시간에 자유롭게 번역한 것이기 때문에, 이 번역본에서는 원문의 의미만이 아니라 번역자의 금욕주의적인 개성과 혼인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 등도 엿볼 수 있다. 

 

토비트서는 본디 무슨 말로 쓰였는가? ‘긴 본문’은 그리스 말로 쓰여 있지만 그 안에는 아람 말 또는 히브리 말에서 나온 셈족식 표현들이 허다하다. 그것들을 살펴볼 때에 아람 말이 원어였다고 우선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토비트서가 본디 히브리 말로 쓰였으리라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6. 저작 시기

 

토비트서에 담긴 종교적인 생각이라든가 후대 예언서들을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책이 유배 시대 이후의 작품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더 나아가서, 기원전 190년경에 쓰인 집회서와 유사한 점이 많다는 사실, 또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예고하는 신앙, 그리고 이 책에서 제시되는 이상적 신심 등을 볼 때, 토비트서의 저작 시기는 기원전 200년경일 것으로 여겨진다.

 

[출처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홈페이지 새번역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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