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욥기 입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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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4-11-02 | 조회수6,493 | 추천수0 | |
파일첨부 욥기입문.hwp [1,039] | ||||
욥기 입문
욥기의 목적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는 달리, 불의한 고통의 수수께끼를 풀려는 것도, 악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혼란에 빠진 한 인간이 거룩하고 전능하신 하느님께 대하여 자기의 자리를 찾으려는 시도라고 말할 수 있다.
1. 구조
욥기는 서로 다른 다섯 부분으로 명확히 나누어진다.
1. 산문으로 된 머리말(1-2장). 경건하고 부유한 주인공 욥은 한순간에 설명할 길 없는 재난에 휩싸인다. 그러면서도 그는 주님께 대한 신뢰심을 잃지 않는다(1,1-2,13).
2. 운문으로 된 대화(3-31장). 여기에서는 자부심이 강하고 반항적인 인간인 욥과, 고대 근동의 전형적 현인들인 그의 세 친구들(데만 사람 엘리바즈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바르)이 대결한다. 주인공의 독백이 앞과 뒤에서 일종의 테두리를 이룬다. 이 틀 안에서 주인공과 친구들은 서로 이어가며 저마다 세 차례에 걸친 담론을 펼친다(셋째 차례에서는 소바르와 욥의 담론이 빠져있다). 아래 세부 구조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이 대화 부분은 완만하고 장엄한 행보로 진행된다.
욥의 독백: 3장 첫째 차례(4-14장) 둘째 차례(15-21장) 셋째 차례(22-27장) 엘리바즈(4-5장) 엘리바즈(15장) 엘리바즈(22장) 욥(6-7장) 욥(16-17장) 욥(23-24장) 빌닷(8장) 빌닷(18장) 빌닷(25장) 욥(9-10장) 욥(19장) 욥(26-27장) 소바르(11장) 소바르(20장) 욥(12-14장) 욥(21장) (지혜 찬가 : 28장) 욥의 독백 : 29-31장
3. 운문으로 된 엘리후의 일련의 담론(32-37장. 도입 부분인 32,1-5는 산문으로 되어있다). 예기하지 않은 제4의 친구인, 부즈 사람 바라켈의 아들 엘리후가 나서서 자기 의견을 내놓는다.
4. 운문으로 된 주님과 욥의 대화(38,1-42,6).
주님의 첫째 말씀(38,1-40,2) 주님의 둘째 말씀(40,6-41,26) 욥의 첫째 답변(40,3-5) 욥의 둘째 답변(42,1-6)
5. 산문으로 된 맺음말(42,7-17). 욥은 자기의 건강과 재산과 명예, 그리고 자식들을 다시 얻는다. 그는 성조들처럼(창세 25,7; 35,29) 수를 다하고 죽는다.
2. 통일성과 저작 시기
욥기의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 어휘와 문체, 문화적 배경과 종교적 개념의 다양성은 이 작품이 단 한번에 지어지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가정을 세울 수 있다(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정이다. 이 밖에도 다양한 가설들이 주장된다. 상대적으로 정설이라고 할 수 있는 확실한 가설이 없음은 욥기 안팎의 증거가 불충분하고, 있는 증거조차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래의 가설도 피할 수 없는 약점들을 지니고 있음을 시인하면서, 조심스럽게 이를 제시한다).
산문으로 된 머리말과 맺음말은 본디 어떤 민속 설화를 이루고 있었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1,1-2,13; 42,7-17). 이 설화는 “동방인들”(1,3) 가운데에서 큰 명성을 누렸던, 우스지방(1,1과 각주 참조) 출신으로 욥이라 불렸던 한 인물의 모범적인 인내심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비길 데 없는 신앙심을 지닌 이 욥에(1,8; 야고 5,11) 관한 설화는, 이미 기원전 2천년대 말기 근동지방의 현인들 사이에 구두로 퍼져있다가, 사무엘 - 다윗 - 솔로몬 시대(기원전 11-10세기)에 히브리말로 옮겨졌으리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함락되고 성전이 파괴되는 대환난 이후 바빌론으로 끌려간 유다인들은 모든 것을 상실하였다. 그들이 겪어야 했던 혼란 때문에, 그들 가운데 일부는 기존의 모든 가치를 파기하고 하느님의 정의에 대한 믿음을 문제삼게 되었다. 이러한 때에 유배(기원전 575년경) 제2세대의 어떤 시인이 그의 선임자 에제키엘과(기원전 592-580년경) 비슷하게 사목적, 그리고 예언적 목적 아래, 당시 잘 알려져 있던 수난하는 욥 이야기를(에제 14,14. 20) 바탕으로 하여, 욥기 대화 부분의 시(3,1-31,40; 38,1-42,6)를 지었다(현재, 욥기의 저작 연대는 대체적으로 기원전 6-4세기로 잡는다. 그러나 욥기에는 이스라엘의 역사나 유배, 또는 유배 상황에 대한 직접적 언급이 전혀 없다는 사실도 시인해야 한다). 그는 인간 존재의 가치, 그리고 인간적 정의와 신적 정의의 관계 아래에서 인간이 지니는 권리를(31,35-37) 시적으로 토론하려고, 까닭없이 고통당하는 주인공과 그의 세 친구를 등장시킨다. 그리고 주님께서도 주인공 욥에게 자신을 변론하고 당신의 처사를 단죄하는 기회를 주신다(40,8-14). 그러나 욥은 다시 도전하는 것을 사양하면서 자기의 자만에 대하여 참회한다(42,1-6).
이 시는 하느님의 신성, 곧 인간의 상상력 그리고 하느님의 섭리와 그분의 선성(善性)에 대한 관념까지도 한없이 넘어서는 그 신성을 수긍함으로써 끝을 맺는다. 또한 이 시 작품은 선과 악 사이의 지나치게 단순한 구분, 덕성스러운 인간의 자기 중심적 야망이 드러나는 그러한 구분을 초월하는 죄의 개념을 시사한다.
산문으로 된 맺음말은(42,7-17) 개인적 보상에 대한 대중적 신조를 주장하기 때문에, 대화 부분에서 욥을 통해 드러나는 저자 시인의 신학과 상반되는 듯이 보인다. 그러면서도 이 맺음말은 고대 근동의 일반 지혜문학에서 오래된 유산의 일부인 전통적 설화에 속하기 때문에 존속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서 대화 부분의 시를 후대에 전승시킨, 페르샤시대 유다교의 도덕적 전승가들에게 이 보상에 대한 교의가 훌륭하게 들어맞았을 가능성도 있다.
엘리후의 담론들은 욥기의 전통에 속한 후대의 한 제자가 아마도 호교론적인 목적 아래 첨가하였을 것이다(32,1-37,24). 사실 이 부분에서는 엄밀한 의미의 대화와는 매우 다른 어법과 문체와 수사학적 방법들이 눈에 띈다. 엘리후는 고통의 교육적인 가치를 강조하고, 엘리바즈와 빌닷과 소바르가 충분히 전개하지 못하였다고 전통적인 지혜학파 교사들이 유감스럽게 보아왔을 몇 가지 논증을 덧붙인다.
욥과 세 친구 사이에 벌어지는 시적 대화의 세 번째 마당의 본문(특히 25,1-27,3)은 구두 전승이나 필사 과정에서 훼손을 입은 듯하다. 소바르의 세 번째 담론이 없고, 욥의 말로 된 어떤 구절들은 차라리 친구들의 입장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24,18-25; 26,5-14). 어떤 비평가들은, 본디 소바르가 한 말을, 시 부분의 편집자들이 욥의 대담성을 완화시키려는 의도 아래 그의 말로 옮겼다고 설명한다. 많은 이들은 지혜 찬가도(28,1-28) 후대에 첨가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 찬가의 문체는 주님 말씀(38,1 이하)의 문체와 매우 가까워서, 그것이 대화로 된 토론 부분과 욥기의 결론 부분을 분리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여졌다고 가정할 수도 있다.
3. 문학 유형
이미 오래 전부터 욥기가 성서에서 하나밖에 없는 문학 형식을 이룬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비록 유다교와 그리스도교 전통은 욥기를 지혜문학 작품들 사이에 배열하고, 욥기 안에서도 지혜문학에서 유래하는 문장들이 많이 발견되기는 하지만, 오늘날에는 유형별로 분류하려는 어떤 노력도 욥기에서는 별 성공을 거둘 수 없다는 점이 인정된다.
플라톤에 의해서 유명하게 된 대화 형식은, 이미 상고시대에 메소포타미아와 나일강 계곡에서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생성 시기가 기원전 3천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여겨지는 설형 문자로 된 어떤 문헌은 대담한 말투로 악의 문제를 제기하는데, 오늘날 ‘수메르의 욥기’라고 불리기도 한다. 바빌론말로 쓰인 다른 설형 문자 문헌은 고통받는 의인을 다루는데, 흔히 ‘바빌론의 욥기’라는 제목이 붙기도 한다. 이 밖에 ‘바빌론의 신정론’, ‘바빌론의 전도서’, ‘인간의 비참에 대한 대화’ 등으로 불리는 또 다른 문헌이 있다. 각 행의 첫 글자를 모으면 하나의 문장이 되는 특별한 시 형태로 이루어진, 변신론(辯神論)에 대한 이 대화의 사본 연대는 기원전 9세기 중엽까지, 생성 연대는 아마도 기원전 1400-1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리라 본다. 각각 11줄로 된 28개의 연이 전개되는 동안, 병자와 그의 친구는 신의 정의를 논한다. 이 친구는 욥기에 나오는 데만 사람 엘리바즈의 연설에 나오는 논조를 드러내기도 한다.
에집트의 어떤 문헌은 삶에 싫증이 난 사람이 자기 영혼과 전개하는 대화의 형식을 취한다. 비참한 병자인 이 사람은 저주받은 사람처럼 가족들에게 쫓겨나서, 자살에 대하여 서정시풍으로 논한다. 욥이 히브리말 문학에서 눈앞에 다가온 자기 죽음의 매력에 대하여 이야기한 유일한 인물이라는 사실은 이미 잘 지적되어 오고 있다. 더 나아가서, 욥기에 나타난 어휘와 수많은 암시들은 이 시 작품이 에집트 문명과 일정한 친분관계를 지니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래서 욥기의 시인이 국제적 지혜문학의 세계에 속하고 대화의 문학적 형식을 알고 있었으리라는 점은 상당한 개연성을 지닌다. 이러한 문학 유형은 체제 비판적 의견들이나, 또는 최소한 인습에 젖은 사회의 교조주의적 사상에 거역하는 생각을 공적으로 탈없이 드러내는 데에 적합한 것이었다. 그러나 욥기의 시인은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4. 시인의 국적
욥기의 운문으로 된 대화 부분에는 이스라엘의 선택과 소명, 모세의 계약과 다윗의 계약, 거룩한 시온산, 성전, 제물 봉헌 의식, 메시아 희망 등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이 밖에도 주인공 욥에 대한 민속적이고 고풍스런 이야기는 이스라엘적인 특색이 전혀 없는 이국적인 모습으로 표현된다. 히브리말 성서의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낱말들과 어법은 욥기의 예외적인 성격을 확인해 준다. 어떤 학자들은 이러한 고찰에서 출발하여, 욥기의 저자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근동의 어떤 현인이었다고 결론짓기도 하였다. 또는 현존하는 히브리말 본문이 아람말이나 아랍말로 된 원본을 번역한 것이라는 의견도 제시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추측들은 근거가 없다. 예루살렘에서 쓰여졌던 히브리말과는 다른 방언의 채택과 시인이 취한 언어적 자유로써, 욥기의 문학적 특수성을 설명할 수 있다. 운문으로 된 대화의 저자는 유다인이었다. 이는 그가 대 예언자들의 신탁, 특히 예레미야의 고백록(예레 11,18-20; 12,1-4; 15,10-21; 17,12-18; 18,18-23; 20,7-18. 특히 예레 20,14-18과 욥 3장 비교)을 잘 알고 있다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불렸던 시편들과 유다 임금들의 궁궐에서 전해지던 잠언들을 암기하고 있었다.
성전은 약탈당하고 예루살렘 성읍은 불탔으며, 백성은 살륙을 당하고 생존자들은 흩어지거나 바빌론으로 끌려가던 때인 기원전 587년의 동란을 겪으며 살아남은 욥기의 시인은 최초의(예전의 ‘이스라엘’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유다인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에제키엘 예언자와는 매우 다른 자기만의 방법으로 유다교의 탄생에 공헌하였다. 예언자도, 사제도, 시편 작가도 아니었지만, 보편적 지혜문학의 이 상속자는 동시대 사람들에게 예언적, 그리고 사목적 직무를 수행하였다. 종교의식을 박탈당하고 삶의 터전에서 뿌리가 뽑힌 공동체에게 극적인 형태로 일종의 문학적 ‘유흥’을 제시하려고, 시인은 여러 다양한 유형들, 곧 탄원시편, 찬미가, 금언, 풍자, 법적 논쟁, 저주, 예언자적 독설, 그리고 신의 현현에 대한 고대의 이야기 등을 결합시킴으로써 새로운 문학을 창조하였다.
5. 저작 동기
이미 말한 대로 욥기의 저자, 그리고 역사적 배경에 대한 명확한 단서가 없기 때문에, 이 책의 저작 동기에 대해서도 추측을 내세울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래에 전개되는 내용 역시 여러 가설 가운데 하나가 되겠다. 구약성서에 보존되어 있으며, 전통적으로는 처음부터 글로 쓰여진 문서로 여겨져 왔으나, 실제로는 구전을 통해 전승된 다른 시 작품들과 운율적 산문 작품들처럼, 욥기의 대화 부분도 의심의 여지 없이 먼저 구두로 ‘발표’되었을 것이다. 이 작품들의 생성 단계에는 사람이 들고 읽었던 필사본이 먼저 있지 않았다. 오히려 암송되거나 음악 반주로 높낮이를 붙인 시가를 먼저 생각할 수 있겠다(우리 나라의 판소리 참조). 욥기의 탄식은 유배당한 사람들 사이에서, 성전이 없어서임은 물론이고 ‘더러운’ 이국 땅이기 때문에 축제일이면서도 제대로 축제를 지낼 수 없는(시편 137 참조) 그 ‘축제의 아픔 속에’ 불리어졌으리라 생각된다. 뿌리가 뽑힌 동족 또는 동일한 종교를 신봉하는 집단은 자기들만의 전례력 준수에 완고하게 집착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바빌론으로 유배 간 사람들은 성전은 물론 제단도 없었기 때문에 아무런 전례의식을 거행할 수 없었음은 두말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혼돈과 불확실성의 이 시대에 유다인들은 새해 축일과 초막절 전의 대속죄일(레위 16 참조)을 지내기 시작하였다. 욥기의 시인은 이러한 기회에 대중의 기분을 전환시키고, 그들에게 ‘유사 전례’적 형태로 참 믿음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 것일까?
바빌론의 새해 축제는 자연과 동식물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풍요다산의 쇄신이라는 틀 안에서, 임금의 상징적 고통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강조점을 둔다. 그래서 욥기의 저자가 주인공의 고난과 긍지를 묘사하려고, 왕권 이념의 수많은 특성을 사용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저자는 더 나아가서, 자기의 작품 여러 군데에서 세상의 창조를 시사한다. 그리고 오랜 건기 끝에 가을비가 다시 오는 시기를 정점으로 하여(38,37) 일년 절기의 순차에 따라 주님의 말씀을 꾸미는데, 이는 엘리후의 담론을 지은 저자가 하는 것(36,27-37,24)과도 일치한다. 아무튼 시인의 의도는 전례력 존중 이상의 것을 지닌다. 그는 비유로써 경고와 희망의 예언적 신탁을 선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비할 데 없는 국난으로 인한 쓰라림(애가 3,15), 그리고 더 나아가서 약속을 지키지 않으신다고 여겨지는 하느님께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찬 이들에게, 시인은 우스지방에 살던 어떤 흠없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는 이 이야기에서 “욥이 까닭없이 하느님을 경외하겠습니까?”(1,9) 하고 묻는데, 이것은 바로 유배자들에게 그들의 패배주의에 대하여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이 여러 세기 동안 온갖 부패를 저질렀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에서도 전례적 정결과 사회적 책임감을 어느 정도 성실히 유지하였다. 그런데 그런 노력이 아무런 소용도 없었던 듯이 여겨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은 자기들을 정복하고 억누르는 자들과 비교하면서, 이스라엘은 지금 겪고 있는 운명을 스스로 불러들일 만큼 잘못을 하지는 않았다고 쉽게 주장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은 자기의 창조주에게 요구할 수 있는 일정한 권리를 지닌다고 믿었던 것이다. 욥기의 시인은 모든 자연 종교에서 볼 수 있는 이러한 환상에 반대하여 자기의 목소리를 높인다. 대 예언자들과 시편 작가들처럼, 그는 참된 믿음에 타산적 사고방식은 끼어들 자리가 없으며, 은혜의 숭고함에는 오직 헌신적 감사의 정만이 상응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6. 욥기의 신학
현대 독자는 시 작품이 탄생한 역사적 맥락과 작품 구성의 복잡성을 간과할 수 없다. 그래서 욥기의 신학도 이러한 면을 충분히 고려하면서 논해야 할 것이다.
산문으로 된 이야기
이 민속 설화의 어떤 면들은 대화 부분에서 드러나는 저자의 생각에 상응하지 않는다. 예레미야 예언자의 제자라 할 수 있는 이 유다의 현인은, 겸손한 이들의 불운과 악인들의 번영이라는 걸림돌에 대하여 숙고하였다. 그는 아마도 ‘까닭없는’ 고통을 어리숙한 하느님과, 천상 조정 신하들 가운데에서 가장 냉소적인 존재 사이에 벌어진 내기의 결과로 설명하는 것을(1,6-12; 2,1-6)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 밖에도 시인은 이 신화적인 ‘적대자-사탄’(1,6과 각주 참조)에 대한 언급을 가능한 대로 피한다. 오히려 그의 시적 천재성을 부양하고 그의 신학적 탐구의 엄정성을 촉진한 것은 이상적인 신심, 곧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까닭없는’(1,9) 신심이었다.
그러므로 시인은 산문으로 된 설화의 모든 세부 사항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는 않는다. 그는 다만 대화 부분을 내세우려고, 이 산문을 일종의 발판으로 삼았을 따름이다. 신심 깊은 욥의 이야기가 이미 여러 인물들을 등장시켰기 때문에, 시인은 그들이 자기의 방식에 따라 말하도록 한다. 그는 인간의 조건과 경신례 때의 ‘주고받음’(2,4와 각주 참조), 그리고 하느님께 셈을 요구하지 않는 믿음의 순수성에 대한 토의를 유발하려고 민속 설화를 사용한다.
욥의 공언과 주님의 발언 내용과는 반대로, 산문으로 된 맺음말은 보상에 관한 전통 신조를 재확인한다. 바로 이것은 시인의 감성에 어긋나는 것으로서, 그가 욥을 통하여 고대 이스라엘의 문학에서 유례없이 맹렬하게 공격하던 바이다. 여기에서 지난 몇 세기 동안 성서 해설가들을 괴롭혀온 문제가 발생한다. 곧 ‘욥기의 대단원은 어떤 감추어진 방식으로 시인의 신학과 일치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이다.
여기에서 시 작품의 구두 암송과, 훨씬 후대에 이루어진 성문화(成文化)한 글 사이에 놓여있는 구분을 기억해야 한다. 욥기의 머리말과 맺음말의 바탕을 이루는 ‘민속 설화’는 민족 유산에 속하기 때문에, 민족 문학 보배의 보존가들이 페르샤시대(5-4세기)의 유다 후손들에게 물려준 수사본들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운문으로 된 부분도 자기 자리를 얻게 되었으니, 이 역시 전통적 설화를 통하여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욥의 반항이 품고 있는 대담성과 하느님의 대답이 풍기는 냉소성이 하느님의 정의를 문제시하거나 적어도 하느님의 정의를 인간의 정의 밖으로 자리매김하는 대화 부분을 쉽게 전승하도록 해준 것이, 바로 산문으로 된 설화의 경건한 결론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운문으로 된 대화
대화 부분의 저자는 고통의 수수께끼에 직면할 때 늘 인간의 정신을 휘어잡는 격정이 거침없이 토로되도록 한다. 그는 유다교가 역사 안에 출현한 이후, 혼란을 일으키고 사람들을 계속 불안하게 만들어온 지성적-윤리적 걸림돌에서 결코 눈을 떼지 않는다. 욥기의 시인은 모든 시대의 인류에게 말한다. 왜냐하면 그는 존재와 죽음의 걸림돌에 맞설 뿐만 아니라, 고뇌 속에서 거의 신성 모독에 이르면서도 동시에 자기가 사랑하는 하느님의 현존을 추구하는 보편적인 신앙인의 모습을 그리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재산을 약탈당하고 자녀들을 잃어버리고, 부인과 친우들의 몰이해 속에 사회에서 추방당하고, 또 치명적인 질병으로 단말마의 아픔을 겪기보다, 하느님의 침묵이야말로 가장 큰 고통이다.
이것에 또 다른 주제가 덧붙여진다. 욥은 자기의 무고함이 공적으로 인정되는 것을 자기의 당연한 권리라고 주장한다. 불행에서 구원해 주십사고 여러 모습으로 탄원하는 시편집의 탄원시편에 나오는 기도자들과는 달리, 욥은 하느님께서 자기의 무죄를 시인해 주시기만 요구한다.
욥은 덕뿐만 아니라 긍지의 본보기이기도 하다. 질병과 윤리적 고통의 교활한 공격의 작용 아래, 그의 격화된 긍지는 점점 초인적 오만으로 변해 간다. 그는, 아카디아의 신화에 따르면 질서의 신이 인간이 거주할 수 있는 땅의 경계를 보호하려고 사슬로 묶어 감시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는, 바다와 바닷괴물에 자신을 비유한다(7,12). 엘리바즈는, 도덕적 인간이 시련의 격정 속에서 자신을 반신(半神)으로 잘못 생각하도록 몰고 가는 (신에 대한) 교만의 새로운 차원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원초적 인간에 관한 신화를 분명히 암시하면서 욥에게 묻는다.
자네가 첫째로 태어난 사람이기라도 하며 언덕보다 먼저 생겨나기라도 하였단 말인가?(15,7. 그곳의 각주도 참조).
주인공은 결코 굴복하지 않고, 질병에서 낫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씌워진 비난과 고소로부터 무죄 선고 받기를 고집한다. 이는 그 역시 항상 찬동해 왔던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죽음의 절대적 성격에 대한 전통적 믿음을(7,21; 14,10) 한 순간 깨뜨리도록 그를 이끌어가는 완강한 갈망이기도 하다. 그는 하느님을 거스르면서까지 자기를 변론해 줄 증인이 하늘에 계시다고 선언한 다음(16,18-21), 마지막 숨 너머, 무덤의 경계에서 그가 산 채로 하느님을 뵙도록 해주시려고, 그를 구해 주실 분이 일어서시리라는 확신을 갖고 부르짖는다(19,25-27).
그의 가족들이 모두 죽었거나, 또는 그가 일종의 추방을 당하였기 때문에(19,13-22), 그가 죽은 다음에 그의 명예를 회복시켜 줄 상속자가 없다. 그렇지만 그는 어떤 신비한 존재가 자기의 상속자 구실을 해주시리라는 것을 알고, 그에 대한 확신을 장엄하게 선포한다. 이 ‘상속자 - 구원자’는 구약성서에 의해서 잘 알려진 ‘구원자’와 맥을 같이한다. 고대의 관습법에 따르면, ‘구원자’는 죽은 이의 친척으로서, 흘린 피에 대한 복수를 하거나(여기에서 ‘피의 구원자/복수자’라는 표현이 나온다), 또는 조상의 땅이 훼손되지 않도록 그것을 법적으로 대신 사들여 보존하는 의무를 지닌다(2사무 14,11; 룻 2,20 등).
이제 우리는 널리 알려진 19,26의 몇몇 낱말이 히브리말 수사본에서 잘 보존되어 있지 않고 고대 번역본들도 별다른 도움을 주지는 못하지만, 그 둘째 줄의 히브리말 본문을 그런 대로 다음과 같이 옮길 수 있다. “이내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뵈오리라(또는, ‘내 몸으로부터 ……’, ‘내 몸이 없이도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왜 이 구절에서 육신의 부활에 대한 믿음의 서곡과 죽음을 이기실 ‘구원자’의 예시를 읽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내 몸으로(또는, 내 몸으로부터)”라는 표현은, 기원전 6세기에 아마도 자기의 온전한 구체적 정체성 속에 있는 인간을 뜻하였을 것이다. 이 해석은 이 말 다음에 따라오는 문장이 되풀이됨으로써 한층 더 명확히 확인되기도 한다(27절). 더구나 이는 유다인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후세의 삶에 대한 믿음과,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헬레니즘적 생각과는 전혀 다른 형태를 부여한 것이기도 하다. 육신의 부활에 대한 믿음은 하느님과 일치하는 삶 안에서 일어나는 실제적 체험을 전제하며, 이는 불멸의 영혼에 대한 비히브리적 사고의 실체가 없는 관념적 방식과 대조를 이룬다. 더 나아가서 육신 부활의 이 믿음은, 불멸성을 인간 본성에 내재한 당연성으로 생각하는 것을 배제하고,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새로운 창조의 지고한 행동을 그 전제 조건으로 한다.
이 괄목할 만한 ‘신앙 고백’(19,23-27)에 대한 해석은 매우 다양하다. 그렇지만 욥기의 시인이 유다교의 여명기에서부터, 멀리 계시면서 적대적으로 보이시는 하느님과 세상에 버려진 인간 사이를 중개하는 신학을 준비하였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가 마음속에 품고 있던 희망을 그의 주인공을 통하여 토로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는 그가 이 소망을 세 단계에 걸쳐 성공적으로 표현해 냈기 때문이다. 첫째, 하느님과 인간 위에 손을 얹고 둘이 서로 얼굴을 마주하게 함으로써, 화해자의 직무를 수행할 심판자에 대한 이룰 수 없는 꿈(9,33); 이어서, 욥이 살해당한 뒤에 최고 법정에서 자기의 증인에게서 사후(死後) 변론을 얻게 되리라는 확신(16,18-22); 끝으로, 자기의 명예를 되찾아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보게 해주실 구원자의 지고한 현존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확실성(19,25-27).
자기의 긴 변론의 종결에 이르기까지 주인공은 어떠한 죄의식도 지니지 않은 한 인간의 존엄성을 간직한다. 그는 다만 젊은 날의 사소한 잘못들만 기억한다. 그는 왕적인 모든 위엄을 갖춘 채 하느님을 맞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제후처럼” 전능하신 분께 마주 나아가리라는 것이다(19,27).
폭풍 한가운데에서 일어나는 현현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 대한 욥의 대답은 놀라우리만치 갑작스럽게 그 어조를 바꾼다. 여기에서 시인의 깊은 의도를 엿볼 수 있다. 그의 의도는 악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도, 인간적 도덕에 따라 하느님의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너무나 인간적인 형태를 취한 모든 도덕주의를 순화하고, 신앙의 현실에 대한 새로운 접근의 초안을 마련하며, 흠없고 경건한 인간을 위협하는 죄의 교활한 성격을 지적하는 것이다.
욥기 운문 부분의 첫째 목적은, 정의에 관한 인간적 관념에서 하느님의 절대성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폭풍 한가운데에서 욥에게 ‘대답하실’ 때(탈출 19장의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느님의 현현과 1열왕 19장 엘리야에게 나타나신 하느님의 현현에 대한 암시와 함께), 주님께서는 사실 고통받는 인간의 질문들에는 어떠한 대답도 주지 않으신다. 새로운 질문들을 던지시는 분은 오히려 하느님이시다. 질문들이 계속됨으로써 결국 인간에게 가장 당혹스런 물음에까지 이른다.
불평꾼이 전능하신 분과 논쟁하려는가? 하느님을 비난하는 자는 응답하여라(40,2).
욥이 이 도전에 응할 것을 사양하자(40,3-5), 주님께서는 싸움을 원하는 이 투사를 다시 한번 다그치시면서, 조금은 빈정거리는 말투로, 최종 결판을 내기 위해 준비하라고 촉구하신다.
사내답게 네 허리를 동여매어라. 너에게 물을 터이니 대답하여라. 네가 나의 공의마저 깨뜨리려 하느냐? 네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나를 단죄하느냐?(40,7-8).
이러한 이중 질문은 토론의 핵심을 꿰뚫으면서, 욥기 전체에 대한 이해의 열쇠를 제공한다. 시인은 하느님의 신비를 탐구하려고 고통의 신비를 이용하는 것이다.
주인공은 자기의 무죄를 선언하기를 중단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의 불행이 하느님의 정의를 부정(否定)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에 걸쳐 지적한다. 사실, 그는 하느님께서 자기의 무죄를 분명히 인정하시리라 여기고, 은연 중에 전능하신 분께 자기의 조건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면서,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시도한다.
친구들은, 자기들이 ‘변신론(辯神論)’, 또는 하느님의 정당화라는 정신적 과업에 투신하였음을 내보이면서, 하느님의 보상과 회심의 가치를 꾸준히 대변한다. 반면에 욥은 인간이 도덕적 행위를 통하여 얻는 권리를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변인론(辯人論)’, 또는 인간의 정당화를 추구하는 데에 몰두한다. 시인은 이제 인간의 정당화가 하느님의 단죄라는 대가를 치르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음을 보여준다.
욥 40,2에 드러나는 예언적 논쟁은 8절에 다시 나타나는데, 여기의 ‘깨뜨리다’라는 낱말은, 예레미야 예언자가 옛 계약의 파기를 말할 때에도 쓰이는 동사이다(예레 31,32). 이러한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시인은, 욥이 사실은 그의 친구들과 함께 상호 의무에 대한 계약 사상과 연관된 응보에 관한 옛 신조를 공유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욥은 “까닭없이 하느님을 경외”(1,9)하지는 않았다. 욥도 친구들처럼 함축적으로는 사고 파는 상업적 사고방식에 바탕을 둔 정의의 인간적 의미를 하느님께 부과하였던 것이다.
인간의 도덕적 완전성과 그의 행복 사이에 직선적인 관계가 있어야 한다고 바라는 것은, 하느님을 고객들과 상대하는 상인처럼 이해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주고받음’이라는 표현은(2,4와 각주 참조) 산문으로 된 설화에 나오는 신화적 ‘적대자’의 사고방식일 뿐만 아니라, 운문으로 된 대화 부분에 나오는 인물들에게서도 똑같이 드러나는 특성이다. 이는 또한, 폭풍 한가운데에서, 하느님께서 욥에게 계시하시는 내용이기도 하다. 시인은 계약상의 의무에 대한 교의가 변질되어 하느님의 자유가 제한되었다고 믿게 될 때마다 드러나는 계약신학의 위험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처럼 욥도 근동의 모든 사람들보다 우월한 자기의 무결성(無缺性)이 자기에게 하느님께 대한 권리를 가져다 주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주인공은 결국 자기의 입장이 지니는 미묘한 과오를 똑바로 주시해야 함을 깨닫는다. 그는 하느님을 단죄하지 않고서는(40,8. 또는 직역해서, 하느님께서는 악하시다고 선포하지 않고서는) 자기 자신을 정당화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세 친구처럼 자기도 같은 길에 들어서 있음을 이제 깨닫게 된다. 하느님을 변호함은 항상 인간을 변호하는 것이다. 변신론은 사실 일종의 ‘변인론’이다.
세상 창조주의 무한한 성성(聖性)을 염두에 두면서 욥은 자신을 구원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는 경건함을 행복과 안녕을 얻는 일종의 수단으로 여기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 그가 하느님을 진정 “까닭없이”(1,9) 경외하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에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느님 현존의 은혜로써 충분하게 된다. 그는 다른 것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래서 시인의 두 번째 의도는 신앙 현실에 대한 새로운 접근의 초안을 잡는 것이다. 옛 ‘야훼계’ 전승이 이미 오래 전에,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두 인격체 사이의 단순한 신뢰관계로 표현하였음이 사실이다(창세 15,6). 그리고 대예언자들, 특히 이사야는 진정한 신앙에 내재해 있는 항구함의 비밀을 밝혀내었다. 그것은 ‘아멘’의 삶을 사는(이사 7,9: “너희가 믿지 않으면, 정녕 서있지 못하리라.” 히브리말의 ‘믿다, 서있다, 신앙, 아멘’은 모두 같은 어근에서 나온다), 또는 정의롭고 공정한 삶을 사는 능력이다(하바 2,4). 욥기의 시인은 이러한 언어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하느님 현존의 기적이 고통에 대한 승리의 원천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모세와 엘리야의 현현을 상기시키면서, 그리고 가을 축제의 찬미가에서 불리는 최후의 현현을 선취하면서, 이 시인은 같이 유배 간 동료들에게(곧 성전도 왕정도 조국도 국가적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는 이들에게)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계속하여 그들 가운데에 계시다고 말한다.
폭풍과 암흑은 가면 뒤에 가린 하느님 현존에 대한 옛 상징이다. 신화적 괴물들(레비아단과 베헤못)은 우주에 걸맞는 악의 수수께끼를 상징하는 반면, 천지만물의 건축가께서는 욥이라는 일개 개인에게 하느님 자유의 경이로움을 드러내 보이신다. 인간적 실용주의는, 인간이 살지 않는 광야에도 비가 내리는(38,26) 자연질서 안에서 어떠한 자리도 차지할 수 없다. 믿음을 가짐은, 비록 가끔 반대의 모습을 취하시는 것같이 보이기는 하지만, 나약과 몰락에 이끌리는, 또는 당신의 피조물들 가운데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존재의 긍지에 이끌리는 자유로우신 하느님을 믿는 것이다.
이러한 주제들을 극적 진행의 도움을 받아 우회적 방법으로 전개해 나아가면서, 시인은 죄에 대한 옛 관념을 이해하기 위한 새로운 길을 섬세하게 찾고자 시도한다. 이것이 주님의 발언과 욥의 최종적 대답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세 번째 목적이다. 자기의 이해력을 넘어서는 성성(聖性) 앞에서 투사 욥은 결국 포기한다. 그의 눈을 뜨게 해준 것은 바로 하느님의 현존이다. 지금까지 그는 풍문으로만 들어서 알아왔던 하느님을, 이제 자기 눈으로 직접 뵙게 된다(42,5). ‘성성’을 봄으로써 그는 자기에 대한 죄의식을 얻는다. 비록 친구들이 비난하는 범죄 행위들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그는 도덕적 인간의 죄악 그 자체를 범한 것이다. 그는 ‘심판자 하느님’이 되어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피할 수 없이 다음과 같이 고백하게 된다.
그래서 제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42,6).
욥은 자기의 명예를 변호하려고 하느님께 알현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그의 도덕성은, 그가 모르는 사이에, 초인의 자질을 획득하기 위한 일종의 수단이 되어버렸다. 이는 자신들을 신적 권리의 허식으로 치장한 고대 임금들의 그것과 유사하다(40,10-14).
욥의 유죄성은 도덕적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이는 자기가 제 운명의 주인이라고 믿으면서, 하느님께 대한 판단을 내림으로써 자신을 무의식 중에 신적인 존재로 들어올리는 그러한 인간의 유죄성이다. 주님의 말씀과 욥의 대답은 인간 사고의 규범에 따라 하느님을 규정짓는 인본주의적 주관주의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욥기의 시는 하느님의 현실을 인간적 이성, 또는 인간적 도덕성의 제한에서 벗어나게 한다. 시인은 바오로 사도를 예고한다. 그는 주님을 ‘뵈옴’으로써 자기 정당화의 원천으로 이해되는 율법의 우상성을 타파하였기 때문이다.
7. 본문과 번역
1952년 사해 부근의 한 동굴에서 히브리말의 옛 글씨체로 된 욥기 수사본의 단편들이 발견되었다. 이 옛 글씨체는 그때까지 모세 오경의 책들에만 제한되어 있던 것으로 여겨졌었다. 이로써 이미 그리스도 탄생 이전부터 특정 계층의 유다인들이 욥기에 중요성을 부여하였음을 보게 된다.
욥기의 히브리말 본문은 난감한 문제들을 안고 있다. 이미 고대 그리스말 번역자(칠십인역) 역시 이에 맞닥뜨린 것으로 여겨진다. 이 번역자는 때로는 매우 느슨한 의역으로 어려움을 비껴가고, 때로는 여러 절들을 번역하지 않고 뛰어넘기도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욥의 고통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오리게네스의 비평적 작업과 번역자 예로니모의 재능을 기다려야만 하였다.
가끔 욥기 히브리말 본문의 특수성은, 우리가 성서의 다른 책들에서 알고 있는 고대 히브리말과 뚜렷한 대조를 드러낸다. 그래서 지난 한 세기 이래 많은 번역자들은, 습관적으로 욥기의 많은 구절들이 훼손되어 변형되었다고 판단하고, 교묘한 방법으로 추측에 의한 수정을 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대의 주석학은, 이제 문화적 맥락 속에서 욥기를 격리시키지 않는 동시에, 이러한 ‘추측들’의 취약성에 대하여 점점 더 생생한 감각을 얻어왔다. 이 번역은, 비록 때로는 문제의 미해결과 이해의 어려움을 안고 있기는 하지만, 본문 수정을 최대한 자제하고 히브리말 본문에 대한 충실성을 유지하도록 노력하였다.
[출처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홈페이지 새번역성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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