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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시편 입문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4-11-02 조회수7,321 추천수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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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입문

 

 

1. 시편집

 

우리가 시편집이라고 부르는 구약성서의 책은 히브리말로 ‘찬양가들’ 또는 ‘찬양가들의 책’이라 불린다. 여기에서 ‘찬양’은 할렐루야[=‘야(훼)를 찬양하여라’]의 ‘찬양하다’라는 동사에서 나온 명사이다. 시편집은, 히브리어 성서의 세 번째 부분으로 율법서와 예언서 다음에 오는 성문서의 첫머리, 곧 욥기와 잠언 앞에 자리잡고 있으며, 이 두 책과 함께 다른 책들과는 다른 악센트 체계를 지닌다. 시편집에는 150개의 종교적인 시가들이 실려있다.

 

자세히 보면 시편집이 다섯 권으로 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곧 1-41, 42-72, 73-89, 90-106, 그리고 107-150이다. 각권은 이른바 ‘종결찬양’으로 끝을 맺는다. 다섯 권으로 나뉜 확실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모세의 다섯 책, 곧 모세 오경에 상응한 조처라는 추측이 일찍부터 제기되었다. 이러한 일반적인 구분 외에도 달리 나누어지는 (때로는 서로 중복되기도 하는) 부분적 모음집들이 있다. 시편 3-41과 90-150에서는 이스라엘 하느님의 특별한 이름인 야훼를(<히브리어 생략>영어식으로는 Yahweh 또는 히브리말의 네 자음을 따라 YHWH, 우리말에서는 “주님”으로 옮긴다. 1,3의 각주 참조) 주로 쓰고 있다. 반면에 시편 42-83에서는 거의 조직적이라 할 만큼 야훼가 엘로힘(<히브리어 생략>하느님)으로 대체되어 있다. 그래서 이 부분을 ‘엘로힘 시편’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밖에도 이른바 머리글에(시편의 첫머리 괄호 안에 들어있는 부분. ‘표제, 제목’ 등으로 부르기도 하나, 정확한 명칭이라 할 수 없다. 아래 참조) 나오는 사람 이름에 따라 세분하기도 한다 : “이새의 아들 다윗”(72,20 참조), “코라의 후손들”(42-49, 그리고 84-85와 87-88도 참조), “아삽”(73-83, 그리고 50도 참조) 등. 역시 머리글에 따라 120-134는 ‘순례시편’이라 불리기도 한다. 시편 113-118과 136, 그리고 146-150은 유다교에서 할렐(<히브리어 생략>)이라 부르는데(113의 각주 1 참조), 머리글과 시편 본문의 중간 성격을 지닌 것으로서 ‘전례적 환성’이라 할 수 있는 할렐루야가 시편의 앞에, 또는 뒤에, 때로는 앞과 뒤에 자주 나온다. 

 

시편 전체가 하나의 책으로 엮어지기 전에 이미 독립적이고 양적으로도 서로 다른 여러 작은 모음집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구체적인 과정은 알 수 없지만, 기원전 3세기 말에 이미 이 부분적인 모음집들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시편집은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손을 거치면서 점진적으로 형성되었고, 또 이것이 현대적 의미의 편찬 작업이 아니었기 때문에, 예컨대 중복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곧 시편 53은 14와 같고, 70은 40,14-18과 같으며, 108은 57,8-12와 60,7-14로 되어있다. 

 

시편은 시편집에만 들어있는 것이 아니다. 시편집이 이스라엘 또는 구약성서의 시나 시편을 전부 모은 시집이 아니라는 말이다. 구약성서의 다른 책들에도 여러 시대에 속하는 시편들이 흩어져있다. 예컨대 1사무 2,1-10; 이사 38,10-20; 요나 2,3-10; 나훔 1,2-11; 하바 3,1-19; 애가 5; 다니 2,20-23; 토비 13 등이 있다. 

 

시편 1은(또는 2와 함께) 시편집의 서문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일곱 개의 악기와 더불어 모든 피조물에게 하느님께 대한 찬양을 촉구하는 ‘대찬양시편’이라 부를 수 있는 시편 150은 제5권만이 아니라 시편집 전체를 끝맺는 ‘종결찬양’의 구실을 한다.

 

 

2. 머리글

 

히브리어 성서의 시편집에서 34개를 뺀 나머지 시편들에는 다양한 길이와 성격을 지닌 머리글이 붙어있다. 이것은 각 시편의 작가가 직접 쓰지 않고, 후대에 와서 수집자 또는 편집자들에 의해서 붙여졌다. 그런데 히브리어 성서의 머리글과 최초의 번역 성서인 그리스어 성서의 머리글이 서로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번역본에는 그리스어 번역자들이 머리글의 정확한 뜻을 파악하지 못했다고밖에 볼 수 없는 경우들이 가끔 있다. 이로써 히브리어 성서의 머리글과 그리스어 번역 사이에는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방면의 연구가 계속되고 있지만 머리글의 생성시기는 물론, 그 정확한 의미와 용도 등에 대해서는 아직도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 

 

머리글에는 많은 경우 전통적으로 시편 작가라고 생각해왔던 사람들의 이름이 들어있다: 모세(90), 솔로몬(72; 127), 아삽(50; 73-83, 그리고 1역대 16,4-7; 25,1-2; 느헤 7,44도 참조), 코라의 후손들(42; 44-49; 84-85; 87-88, 그리고 2역대 20,19도 참조), 헤만(88), 에단(89, 그리고 1역대 15,17-19; 25,5도 참조), 여두둔(39; 62; 77, 그리고 1역대 16,41-42; 25,1.3; 2역대 5,12; 29,14; 느헤 11,17도 참조). 이 이름들 가운데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다윗인데, 제1권(1-41)에 집중하여 모두 73개 시편의 머리글에 나온다. 이 가운데에서 13번은 다윗 임금의 생애에 일어났던 일들을 시사하는 말을 포함하고 있다. “이스라엘 시편의 작가”로서(2사무 23,1, 그리고 집회 47,8도 참조) 다윗의 탁월성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시인으로서(2사무 1,17.19-27; 3,33-34), 음악가로서(1사무 16,16-23; 18,10), 그리고 악기 발명가로서(아모 6,5) 명성을 누렸다. 다윗이 종교 예식과 전례 음악을 체계화했다는 전통도 있다: 1역대 15 - 16; 23,5; 에즈 3,10; 느헤 12,36. 물론 이스라엘에는 다윗 훨씬 이전부터 시가가 있어왔다. 구체적인 예로서 라멕의 복수의 노래(창세 4,23-24), 우물 노래(민수 21,17-18), 모세의 찬가와 미리암의 노래(출애 15,1-21), 그리고 드보라의 승리 노래(판관 5,2-31) 등이 있다. 그러나 성서의 전통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종교적 시가에 비약적인 발전을 일으켰다고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전통은 더 나아가서 다윗을 가장 뛰어난 시가 작가로 보았으며, 고통받는 의인으로서, 용서받은 회개자로서, 그리고 메시아의 예형으로서 후대의 시편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대부로 여겼던 것이다. 

 

시편의 작가들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연구와 토의가 진행되고 있다. 여기에서 첫째로 문제되는 것은 머리글에 나오는 사람 이름 앞에 붙은 라메드(영어의 ‘l’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글자)라는 전치사이다. 이 전치사는 매우 다양하게 쓰여지는 까닭에 이러한 구체적인 경우에도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시편의 저자를 뜻할 수도 있고, 이스라엘의 주변 문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어떤 동일한 사건과 인물을 중심으로 엮어지는 일련의 서사시에 소속됨을 지칭할 수도 있으며, 시의 주인공을 가리킬 수도 있다. 여기에서 이 전치사를 우리말로 어떻게 옮기느냐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지금까지 해오던 바와 같이 단순히 “…의”로 번역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렇게 하면 의미상 다양한 가능성을 막고 여기에 해당하는 확실한 뜻도 모르는 채 그 의미를 한 가지로만 한정시켜버리게 된다. 두 번째 어려움은 우리말의 특성에 기인한다. 머리글에 이 전치사와 인명만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11; 14; 16 등등), 이를 예컨대 “다윗의”라고만 옮기면 어색하게 들린다. 우리말에서는 “…의” 다음에 그에 따르는 무엇이 와야 하기 때문이다(이에 반해, 서양말에서는 그대로 쓰고 있다 : 예를 들면, 영어 Of David, 불어 De David, 독어 Von David 등). 이러한 이유로 우리 번역에서는 머리글의 인명 앞에 나오는 전치사 라메드를 우리말로 옮기지 않기로 한다. 그래서 머리글에 인명, 또는 “코라의 후손들”과 같은 호칭이 나올 때는 반드시 그 앞에 전치사 라메드가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다만, 역시 머리글에 자주 나오는 동사의 명사형 “지휘자”는 예외로 취급한다(아래 참조). 이 낱말 앞에도 같은 전치사가 붙어있고, 그 확실한 뜻을 모르고 있긴 하지만 전통적인 번역에 따라 “지휘자에게”로 옮긴다. 이 전치사가 본디 무엇을 의미했든 간에 시편이 지니고 있는 생동력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많은 세대들이 이 종교적 시가들을 단순히 반복해서 읽지 않고, 살아있는 시가로, 특히 기도로 불렀다. 기도자들은 그들에게 전해진 시편들을 자기들이 처한 현재의 상황에 재적용함으로써 ‘옛 시편’을 ‘새로운 노래’로 되살렸다. 시편들은 특히 전례를 통하여 계속 ‘살아오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 그 본문이 자연스럽게 변화되기도 하였다. 물론 지금에 와서 이러한 변화의 정확한 범위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옛날에는 작가라든지 저작권 등에 대해서 지금과는 전혀 달리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시편들을 이스라엘의 역사에 따라 구분한다거나 시편들의 연대를 작성하는 일은 거의 넘을 수 없는 장벽에 부딪히게 된다. 후대의 문서들은 이미 오래된 전통들을 포함하기도 한다. 후대의 편자들은 전대의 작품들을 알고 있으며, 옛 자료들을 채택하고 개작할 수도 있다. 그래서 후대 작품 속에 매우 오래된 요소들이 들어가기도 하고(문학적 복고풍), 때로는 주변 문화권에서 유래하는 유물들이 포함되기도 한다. 시편 본문의 연대와 외국 문학의 영향에 관한 문제는 복잡하고 어려운 것으로서 앞으로도 논의가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다행한 일은 시편의 정확한 저작 시기를 아는 것이 곧 시편을 이해함은 아니며, 시편의 근본적인 뜻을 이해하는 데에 필요 불가결한 전제 조건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머리글은 각 시편의 성격과 성질을 시사하고 있다. 우선 해당 시편의 유형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현악기 반주와 더불어 부른다는 ‘시편’(히브리말로는, <히브리어 생략>, 미즈모르: 57번), ‘기도’(<히브리어 생략>, 터필라: 86; 90; 102; 142), ‘찬양(가)’(<히브리어 생략>, 터힐라: 145), ‘사랑 노래’나 ‘혼인 축가’(45) 또는 간단히 ‘노래’(<히브리어 생략>, 쉬르: 30번) 등이 나온다. 이 밖에도 뜻이 분명하지 않은 여러 용어들이 있다: 마스킬(<히브리어 생략>: 32; 42; 44; 45; 52 - 55; 74; 78; 88; 89; 142), 쉬가욘(<히브리어 생략>: 7). 다소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전자를 “교훈”, 후자를 “고백” 또는 “애가”로 옮기기도 한다. 그러나,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냥 음역한다. 때로는 번역의 시도조차 포기하고 본문을 그냥 음역하여 우리말로 옮기는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예컨대, 미크탐: 16; 56; 57; 58; 59; 60). 비록 뜻이 불분명하더라도 이러한 전문용어들은 일정한 관심을 드러낸다. 곧 이스라엘에 여러 종류의 시편들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주석가들에게 이른바 양식사학적인 방향으로 연구하도록 자극을 주었다. 이들에 의해서 지난 반세기가 넘는 동안 시편들을 그 문학 유형에 따라 분류하는 작업이 풍성하게 이루어졌다. 

 

머리글에는 음악적인 표기들도 나온다. 우선 55번에 걸쳐 “머나체아”라는 낱말이 나오는데, 고대 번역본들은 이 히브리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 뜻은 “(성가대, 합창단) 지휘자”라 하겠다(1역대 15,21; 23,4 참조). 음악 악기들도 지칭된다: 피리(5), 현악기(4; 54; 55; 61; 67; 76, 그리고 6; 12와 8; 81; 84도 참조). 합창단을 받쳐주거나 또는 반주하기 위하여 여러 음악 악기들이 사용되었다: 나팔과 뿔나팔, 십현금과 수금과 비파, 그리고 손북과 자바라 등. 시편 150은 ‘종교 관현악단’이라 할 정도로 여러 악기들을 나열하고 있다. 이 밖에 머리글에는 수수께끼 같은 표현들도 있는데, 해당 시편이 불려질 때 따라야 할 가락을 지시하는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새벽 암사슴”(22), “나리꽃”(45; 69), “부수지 마소서”(57; 58; 59; 75. 우리 번역에서는 그냥 음역한다). 지금까지의 많은 연구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많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부족한 그대로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9; 46; 53; 56; 60; 80; 88도 참조). 

 

끝으로, 어떤 시편들은 일정한 전례 예식과 연결된다. 시편 92는 “안식일(을 위한 노래)”, 그리고 100은 “감사(전례)를 위한 노래”로 되어있다(30,1과 각주도 참조). “기념으로”(38; 70)라는 표현도 어떤 전례적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나 하는 추측을 하게 한다. 시편 120에서 134까지는 계속 “오름/계단의 노래(또는, 오름/계단을 위한 노래)”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지형적으로 높은 곳에 자리잡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면서, 곧 순례 중에 부른 노래라 생각된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순례의 노래”라고 옮긴다.

 

 

3. 시로서의 시편

 

시편(詩篇)은, 이 한자 명칭이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전체가 운문으로 되어있다. 이것은 시편의 번역본에서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산문에서와는 달리 시편의 절 구분은 원래의 히브리어 본문의 시구와 실제적으로 거의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한 절은 대부분의 경우 두 행, 가끔은 세 행으로 이루어져있다. 이러한 절은 독특한 운율에 따라 구성된다. 히브리어 시의 운율은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시에서 볼 수 있는 음절의 수에 따른 음수율 또는 길고 짧은 음절의 배합 곧 음의 양에 따른 그리스어와 라틴어 시의 장단율과는 달리, 강음(强音)에 따른 운율이다. 이는 영어나 독일어 시의 강약률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가장 흔한 운율은 절의 두 행이 각각 세 개의 강음으로 구성된 3+3이다. 가끔은 이 3박자의 음률이 절의 2행에 와서 2박자가 됨으로써 3+2가 되기도 한다. 이 경우, 2행이 1행보다 짧다. 그러나 우리말과 히브리말의 기본 구조 등이 다르기 때문에 번역문에서는 많은 경우 이러한 형태가 그대로 재생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우리말의 특성 때문에) 원문에서는 짧은 2행이 1행보다 길게 옮겨지는 수가 많다. 어쨌든, 옛날 이스라엘 시인들은 운율의 선택과 배열에서 매우 자유로운 자세를 보이고 있으며, 어떤 시들은 산문에 가까운 운문을 쓰고 있음을 아울러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히브리어 시에도 후렴이 있다. 후렴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반복될 때(42; 43; 46; 49; 59; 67; 80; 99; 107) 절보다 큰 단락으로서 연(聯)을 알아볼 수 있다. 그리고 시편의 중간중간에, 특히 1권에서 3권 사이에, 셀라(<히브리어 생략>)라는 낱말을 볼 수 있는데, 명확한 뜻은 알 수 없지만 본디 쉼표의 구실을 했으리라 추측하기도 하는데, 때로는 이를 기준으로 연을 구분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대부분의 경우, 주제나 내용의 동일성에 따라 시편들을 연으로 나눈다. 물론 판단의 기준과 구체적인 판단이 학자마다 다르기 때문에 한 시편이 달리 나누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히브리어 시편에서는, 같은 시편 안에서도 하느님께 직접 2인칭으로 말씀드리다가 어떠한 외적인 변화도 없이 곧바로 3인칭으로 (또는, 그 반대로) 말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한 절 안에서도 인칭을 바꾸어 말하는 수가 있다. 이러한 인칭의 변화는, 우리말의 특수한 언어 예법으로 인해서 원문에는 없는 결과들을 초래한다. 또한 우리말에서는 하느님께 대해 연이어 2인칭과 3인칭으로 말하는 것이 거북스럽게 여겨진다. 그래서 우리말 번역문에서는 2인칭으로 말씀드리는 부분과 3인칭으로 말하는 부분 사이를 띄움으로써 구분한다. 

 

시편을 연으로 구분하는 데에 시편 119는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가장 긴 시편인 이 노래에서 연의 개수는 히브리어 알파벳의 수와 일치한다. 곧 이 시편에서는 알파벳의 순서에 따라 여덟 절이 같은 글자로 시작한다: 8(절)22(알파벳의 글자 수) = 모두 176(개의 절). 여덟 절로 된 한 연은 항상 같은 글자로 시작하고 연의 수는 22개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알파벳의 순서에 따라 전개되는 시편을 ‘알파벳 노래’라 부른다: 9-10; 25; 37 등. 물론 이러한 시작(詩作) 기술은 번역문에서 도저히 재생할 수 없다. 

 

넓게는 셈족 전체의 시, 좁게는 히브리어 시의 가장 큰 특징은 병행법 또는 대구법이라 불리는 현상에 있다. 이는 문장의 구성원들 사이에 병행 또는 대구를 이루게 하는 수사학적 기법으로서, 하나의 생각을 병행적 또는 대구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병행법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우선 같은 생각 또는 같은 이미지가 동의적 표현을 통해서 다시 한번 반복되는 ‘동의적 병행법’이 있다. 

 

  어찌하여 민족들이 술렁거리며 

  겨레들이 헛일을 꾸미는가? 

  ……………… 

  자 이제 군왕들아, 깨달으라. 

  세상의 통치자들아, 징계를 받아들여라. 

 

시편 2의 1절과 10절이다. 1절에서 “민족들”과 “겨레들”이 같은 사람들이고, ‘술렁거림’과 ‘헛일을 꾸밈’이 같은 동작이다. 10절도 이와 마찬가지로 표현되었다. 

 

또한 절의 1행에서 말한 내용에 대비 또는 반대되는 것을 2행에 내세우는 방법이 있는데, 이를 ‘반의적 병행법’이라 한다. 

 

  그분의 복을 받은 이들은 땅을 차지하고 

  그분의 저주를 받은 자들은 뿌리째 뽑히리라(37,22). 

 

여기에서 1행과 2행이 말하고 있는 바가 단순히 반의적인 것은 아니다. 반의적 병행법 역시 같은 사물 또는 같은 내용을 두 번 반복한다. 하나의 두 면인 것이다. 위 구절에서는 하느님의 동일한 역사하심의 두 가지 양상이 대립적으로 서술된다. 

 

하나의 생각이 사고의 전개와 더불어 점진적으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이를 ‘점층적 병행법’이라 한다. 

 

  주님께 노래하라, 새로운 노래를. 

  주님께 노래하라, 온 세상아(96,1). 

 

병행법이 항상 완벽하게 쓰이지는 않는다. 비록 이것이 히브리어 시의 가장 큰 특징이고 이 시를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구실을 하지만, 시편의 모든 절들이 계속해서 병행법으로 되어있지는 않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수사학적 기법들이 있지만, 이러한 현상들은 히브리어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기 때문에 번역문에 그대로 살리기는 불가능하다.

 

 

4. 시편의 유형

 

일가 친척들 사이에는 용모, 외관, 말, 행동의 여러 유사점들, 그리고 사고, 감정, 전통의 공동체성 등등 서로 공통된 특징들이 나타난다. 그러나 한 혈족은 자체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다른 혈족들과 인척관계를 맺음으로써 각 혈족에만 공통된 특징들을 서로 나누기도 한다. 물론 친척들간에 서로 전혀 닮지 않은 경우도 있다. 

 

시편도 이와 비슷하다. 많은 시편들이 서로 그 구조, 어법, 어조 등의 유사점들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같은 주제를 다루는 공통되고 유사한 상황을 전제한다. ‘삶의 자리’라는 전문용어로 불리는 이러한 상황에서 서로 친척이라 할 수 있는 일련의 시편들이 탄생한다. 시편들의 이러한 ‘혈족’ 또는 ‘일가’를 ‘(문학) 유형’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모든 시편들을 각각의 유형에 따라 분류한다는 것은 쉬운 작업이 아니다. 많은 경우에는 개연성에 의해서 짐작할 수 있을 뿐이고, 때로는 한 시편 안에 여러 유형들이 혼합되어있어서 그 시편을 어느 한 유형에 한정시킬 수 없는 경우도 있으며, 어떠한 유형에도 속하지 않는 것들도 있다. 그래서 조심스럽지만 일단은 아래와 같은 세 개의 큰 유형을 들 수 있겠다. (이러한 연유로 해서, 학자마다 다른 분류와 설명을 내세운다. 여기에서는 프랑스 「공동번역 성서」의 분류와 설명을 거의 그대로 소개한다.) 

 

(1) 찬양시편 

(2) 탄원, 신뢰, 감사 시편 

(3) 교훈시편

 

(1) 찬양시편 

 

이 유형은 시편집에서 여러 전형들을 보이고 있으며, 시편집 전체에 골고루 퍼져있다. 널리 알려진 한 의견에 따르면, 대부분의 찬양시편들은 이스라엘의 축일을 기해서 전례 때 사용하기 위해 창작되었다고 한다. 찬양시편들 가운데에서 한두 시편은 어떤 특정한 장엄 축제에 속하리라는 추측을 수긍케 하는 근거를 지닌다. 그러나 시편에 있는 찬양 노래들에서 출발하여 여러 전례들에 대한 예식서를 다시 꾸밀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가설이 될 수밖에 없다. 어쨌든 이 유형에서는 공동체성이 강하게 강조되고 있는데, 이는 대화 형식을 취하는 부분, 합창단, 후렴, 환호와 환성, 아멘이나 할렐루야 같은 응답에서도 알 수 있다. 공동체의 참여는 행진, 행렬, 그리고 극적인 행동들(춤, 손뼉을 침, 무릎을 꿇음, 땅에 부복함)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찬양시편들은 일반적으로 동일한 구상에 따라 이루어진다. 앞부분에서부터, 짧거나 긴 찬양에의 권유, 때로는 간략한 감탄이 도입부의 구실을 한다. 시편 작가는 자기 자신을 부르기도 하고(103; 104; 106), 더욱 빈번하게는 공동체, 여러 부류의 사람들, 자연의 피조물들(148), 또는 천상 존재들까지(29; 148) 자기의 찬양에 동참하도록 부른다. 이러한 서막 또는 도입부가 이미 시편 전체의 어조를 드러내며, 주위에 환희에 찬 분위기를 조성한다. 시편 작가는 때로 도입부에서 이미 앞으로 전개될 찬미의 동기들을 시사하기도 한다. 찬양시편은 여러 모양으로 끝을 맺는다: 도입부의 부분이나 전체의 되풀이, 찬양 동기들의 요약, 찬양, 간청 또는 기원. 이런 변형들은 결국 찬양시편의 틀이 획일적으로 동일하지 않음을 드러낸다. 이는 여러 다른 상황에 기인할 뿐만 아니라, 찬양을 받는 주체가 항상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찬양 노래들은 하느님, 시온과 성전, 또는 임금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다.

 

(가) 계약의 하느님을 향한 찬양시편들은 나름대로 잘 짜인 무리를 형성하고 있다(8; 19; 33; 100; 103; 104; 111; 113; 114; 117; 135; 136; 145-150, 그리고 78과 105도 참조). 이스라엘은, 유일하고 영원하며 전지 전능하신 하느님, 창조주, 역사의 주인, 당신께서 뽑으신 백성에게 항상 성실하신 하느님을 노래한다. 이러한 찬미는 주님의 말씀에 대한 이스라엘 공동체의 대답이며, 그들의 역사 안에서 계속 만나는 살아계신 하느님, 그들의 인도자, 재판관, 옹호자, 그리고 해방자이신 분께 대한 응답이다. 시편 78과 105와 같은 이른바 ‘역사시편’에서는 찬미의 형식으로 하느님의 업적, 곧 구원의 역사에서 볼 수 있는 하느님의 놀라운 ‘기적들’을 노래한다. 이러한 하느님의 행동들은 말씀이고 표징이며 현현들로서, 결국 하느님의 말씀과 행동은 동일한 것이다. 이스라엘을 찬양으로 이끄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어떤 철학적 사고의 귀결이 아니라, 그들의 영성적인 체험의 결과이다. 자연을 서술함에 있어서 시편 작가들은 그 당시의 자연관을 따르고 있기는 하지만, 나아가 우주에 대한 어떤 시적인 시각보다는 삼라만상에 대한 그들의 종교적인 생각을 증언하고 있다. 대기의 여러 현상들, 계절의 변화는 하느님의 개입을 감추기도 하고 드러내기도 한다. 자연은 창조주의 현존을 명백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주석가들은 창조주에 대한 찬양가들을 당시 고대 근동의 찬미가들과 비교 연구하기도 한다. ‘천둥비의 노래’라 할 수 있는 시편 29는 가나안의 신 바알에 대한 찬미가를 연상케 하고, 시편 19의 앞부분은 (에집트의) 태양신에 대한 기도의 흔적을 담고 있으며, ‘창조시편’이라 할 수 있는 시편 104는 에집트의 신 아톤에 대한 찬미가의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시편 작가들은 가나안, 바빌론, 에집트 등에서 유래했을 수 있는 모형들을 단순히 모작하지 않고 이들을 넘어선다. 구약성서의 시인들은 유일하신 하느님을 노래한다. 만일 그들이 주변 문학권에서 무엇인가를 빌려왔다면, 이는 자기들의 신앙에 따라 모든 것을 흡수, 정화, 동화시켰음을 뜻한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어떠한 우주적인 힘과 결코 혼동될 수 없는 분이시며, 무엇보다도 먼저 역사의 하느님이시고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신 것이다.

 

(나) 하느님의 통치에 대한 노래들은(93; 96-99, 그리고 47도 참조) 찬미시편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이 작은 유형의 시편들은 그들 사이의 독특한 유사점들, 보편주의적 어조, 이들 가운데 여러 노래에서 울려퍼지는 “주님께서는 임금이시로다!”(93,1; 96,10; 97,1; 99,1, 그리고 98,6도 참조)라는 환성 때문에 시편집 안에서 한데 모아진다. 이 시편들은 당신 어좌에 좌정하신 하느님, 임금이시며 판관이신 분, 민족들의 주님을 열광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이 노래들의 뿌리는 전례에서 찾아볼 수 있다(96,8-9; 99,5). 임금의 대관식이 거행되는 날과 같이 즐거움이 넘친다. 이스라엘, 뭇민족들, 멀리 있는 섬들, 그리고 우주의 모든 피조물들이 환희의 소리를 지른다. 일부 학자들에 의해서 ‘즉위식 노래’로 불리는 이 시편들은 성전에서 거행되던 어떤 특정 전례 때(예컨대, 초막절, 예루살렘 축제, 새해 축일 등) 불려졌으리라고 추측되기도 한다. 그러나 확실한 결론을 내리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 시편들과 이사야서의 마지막 부분(이사 52,7 참조) 사이의 관계에 주목하여 이 ‘새로운 노래’들에 종말론적 전망이 담겨있음을 발견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전례에서, 현재는 과거를 재현하며 동시에 미래를 앞당긴다(선취; 영어로는 anticipation). 전례는 과거를 재생시키고 희망을 소생시키는 것이다. (이 시편들은 다양한 학설에 따라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린다: ‘야훼 군왕시편’, ‘야훼 왕권에 대한 찬양시’, ‘등극시편’ 등. 우리는 ‘하느님의 통치시편’으로 부르기로 한다.) 

 

(다) ‘시온의 노래’들은 예루살렘과 거기에 있는 성전을 기린다(46; 48; 76; 84; 87, 그리고 24; 68; 132도 참조). 시온은 여러 화려한 명칭들을 지니고 있다: 다윗 왕조의 도읍, 종교 중심지, 지존의 거처들 가운데 가장 거룩한 거소, 하느님의 도성, 대왕의 도읍 등. 시온에 대한 이러한 찬양은 결국 시온산을 당신의 거처와 당신의 안식처로 선택하신 주님께로 향하는 것이다. 시편 132는 하느님에 의한 예루살렘과 임금의 이중 선택을 기념하기 위하여 불려졌으리라 추측되는데, 사무엘 하권 7장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창작된 것 같다. 시편 68의 작가는, 고대 시들의 잔재를 잔뜩 지닌 채 서사시의 양식으로, 승승장구하는 기마병들의 행진, 더 정확하게 말해서, 최종적 장소로 향하는 계약의 궤의 장엄한 행렬을 노래하고 있다. 거룩한 산 위에 자리잡은 새로운 도읍 예루살렘은, 가나안 신화에 따르면 바알의 처소에 부여되었던 명칭인 “북녘의 맨 끝”(48,3)이라는 칭호로 불리게 된다(68,18도 참조). 전능하신 분께서 항상 현존하심으로써 이 도성은 안정과 안녕이 보장되고 함락될 수 없는 피신처가 된다. 바로 여기에서부터 어떠한 극한적인 상황 속에서도 선택된 백성이 드러내 보이는 자신감이 나온다. 시온의 노래들은 장차 민족들의 도읍이 될(87) 이 도성을 이상화하는 하나의 신비를 구상하고 있다고 하겠다. 어떤 주석가들은 여기에서 종말론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한번 더 말해서, 전례는 선취한다. 의식은 전례적 오늘 속에서 이미 내일의 개화(開花)를 경축한다. 예루살렘의 미래는 이미 결정되어있는 것이다(이사 2,2-4; 60; 미가 4,1-3; 즈가 8 참조). 

 

동일한 영감 속에 이른바 ‘순례시편’들도 등장한다(120-134). 일반적으로 이 시편들은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오르면서(이사 2,3; 예레 31,6; 시편 84 참조), 특히 이스라엘의 삼대 축일(출애 23,14-17) 때 성전으로 순례하면서 불렀으리라고 생각된다. 상당히 후대에 생성되었다고 여겨지고 때로는 매우 짧은 이 시편들은 상호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문학적으로 다양한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내용면에서도 여러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라) 위에서 말한 바 있는 ‘하느님의 통치시편’들이 임금 그 자체이신 주님을 찬양하는 데에 반해, 이른바 ‘군왕시편’들은 현세적 왕국의 군주들을 노래한다(2; 18; 20; 21; 45; 72; 89; 101; 110; 132; 144). 임금의 축성식, 즉위식과 대관식 및 그 기념일 또는 혼인식 때, 전쟁 수행 전이나 또는 승리한 후에, 그리고 국가적 영고성쇠 속에 궁전과 성전에서는 여러 가지 의식들이 거행되었다. 상황의 다양성은 노래의 다양성을 내포하고 있다: 임금과 그 왕조에 대한 칭송의 말, 찬양가, 감사가, 탄원가, 기원, 신탁 등등. 이렇게 여러 기회에 불려진 노래들이기 때문에 군왕시편들은 그 구조와 궁중 의전의 영향을 받은 어법 및 그 주제들로 인해서 풍부한 다양성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다양성 속에서도 존재하는 그들의 공통된 유사성은 그 원래의 환경인 궁중과 그 중심 인물인 임금에게서 유래한다. 하느님께서 직접 통치하신다는 생각(신정주의)이 근본을 이루기 때문에 국가의 우두머리에게 부여되는 영광은 결국 하느님께 향한 것이다. 사실 이스라엘의 임금은 하느님의 아들이며 상속자이다.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 곧 메시아는 지존의 오른쪽에 자리잡는다. 그는 “이스라엘에 대한 주님의 어좌”(1역대 28,5)이기도 한 다윗 왕좌의 안정성과 항구성의 혜택을 받는다. 나단의 중재를 통하여 다윗에게 주어진 약속(2사무 7)은 군왕시편들의 여러 곳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2,6-7; 45,7; 89,4-5.20-38; 132,10-12). 군왕시편, 하느님의 통치시편, 시온의 노래 사이에는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이 모든 시편들은 그 안에 완전한 실현을 향한 약속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 하느님의 최종적 왕국에 대한 기다림, 그리고 이상적 도읍에 대한 기다림이다.

 

(2) 탄원, 신뢰, 감사 시편

 

이 시편들에도 찬양시편들에서처럼 전능하고 의로우신 주님, 최고의 은인이신 하느님께 대한 찬양이 나온다. 그러나 이 세 범주의 시편들은 별개의 한 큰 유형으로 합쳐질 수 있다. 이들은 원래 곤경과 고통이라는 공통된 상황에 그 생성의 뿌리를 두고 있다. 위기를 맞아 기도자는 하느님께 간절히 도움을 청하고 자기의 신뢰를 고백한다. 모든 것이 잘 해결되었을 때는 구원해주신 분께 감사를 드린다. 때로는 한 시편에(22; 30; 31; 54; 56; 61) 탄원과 신뢰와 감사, 이 세 요소가 밀접하게 결합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이 시편들에는 개인 기도들이 들어있어 개인적인 신심들을 엿볼 수 있게도 한다. 또한 어떤 전례 의식을 거행하기 위하여 모인 공동체에 의해서 드려지는 공동 기도들도 있다(요엘 1,13; 2,17 참조). 그러나 개인과 공동체 사이, 그리고 개인 신심과 전례 의식 사이를 너무 엄격하게 구분짓는 것은 좋지 않다. 어떤 이가 설사 홀로 기도한다 해도, 그는 혼자가 아니다. 그는 하느님 백성의 일원임을 자각하고 있으며(25,22; 28,9; 61,7; 63,12; 69,36 참조), 동시에 공동체의 전례에도 합당한 구성원으로 참여한다(5,8; 28,2; 140,13-14 참조). 더 나아가서, 예컨대 사제나 임금과 같이 공직을 가진 사람이 집단의 이름으로 말하는 경우에, 시편 기도자의 ‘나’는 때로 공동체를 뜻하기도 한다. 끝으로, 원래 고통 중에 있는 이 또는 감사드리는 이의 개인적이고 자발적인 신심을 표현했던 시편들이 시편집에 모아짐으로써 공동체의 기도가 되기도 하였다. (이와는 반대의 움직임도 있었음이 또한 사실이다. 이스라엘에서 전례의 주체는 일차적으로 백성 공동체이다. 전례에서 일익을 담당했던 시편들 역시 원래는 공동 시편들이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다가 공동체 안에서 개인의 위치가 점차 부각되면서 개인 시편들이 나오게 되고, 이 시편들은 이미 있어왔던 공동 시편들의 영향을 받게 된 것이다.) 

 

(가) ‘개인 탄원시편’ 또는 ‘공동 탄원시편’은 일반적으로 네 단계로 전개된다.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도움을 청하고, 이어서 자기가 처한 상황을 설명드린 다음, 본격적으로 간청을 드리고, 하느님께서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시리라는 확신을 고백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기본 골격일 뿐 그에 따른 변형들이 많다. 시편 작가는 다른 것을 더 보태기도 하고 빼기도 하며, 뒤섞기도 하고 순서를 뒤집기도 하며, 또한 되풀이하기도 한다. 서정적이고 격정적인 토로는 엄격한 순서나 논리를 따르지 않는다. 또한 탄원 기도가 드려지는 가운데에 가끔 (사제 또는 전례 예언자를 통해서) 신탁이 주어짐을 볼 수 있다. 

 

‘개인 탄원시편’은 시편집의 거의 4분의 1을 차지한다(5; 6; 7; 13; 17; 22; 25; 26; 28; 31; 35; 36; 38; 39; 42; 43; 51; 54-57; 59; 61; 63; 64; 69; 70[=40,14-18]; 71; 86; 88; 102; 109; 120; 130; 140-143). 인간은 자기 운명에 대해 기뻐하기보다는 훨씬 더 자주 한탄한다. 고통에 처한 기도자들이 묘사하는 상황과 토로하는 하소연을 통하여 그들의 구체적인 상태, 그들의 개인적인 또는 그가 속한 공동체의 어려움을 볼 수 있다. 곧 참회, 병고, 탄압, 고소, 강제 이주, 유배생활 등이다. 많은 탄원시편에서는 원수들의 무리가 횡행하는 것으로 서술된다. 이 적들은 그들의 제물이 된 사람들을 병자라 할지라도 사정없이 괴롭힌다. 자기들의 억압자들을 묘사하기 위하여 시편 작가들은 다채로운 어휘들을 사용한다. 그래서 시편 번역가들과 주석가들은 이 적대적인 사람들이 누구인가라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당황할 정도로 적지 않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시편의 기도자들은 원수들의 활동을 서술하기 위해서 지혜 문학에서 유래하여 어느 정도 관습으로 굳어진 표현양식과 다양한 은유들을 이용한다: 전사, 그물과 올가미로 무장한 사냥꾼, 피에 주린 맹수, 사자, 황소, 들소, 개, 독사 등등. 원수들은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특히 악의에 찬 독을 품은 언사(거짓 증언, 험담, 중상, 요술사들의 주술을 연상케 하는 저주 등)가 그들의 주무기이다. 곤경 속에서 시편 작가들은 하느님의 정의에 하소연한다. 그러나 때로는 수세에만 몰리지 않고, 그들 역시 적극적으로 저주의 말로써 적들에게 대항한다. 그들의 공포에 찬 부르짖음은 예레미야나 욥의 외침을 연상케 한다. 

 

이러한 기도들, 특히 병자들과 죽음의 위험에 처한 이들의 시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불행한 이들의 상황 속에, 그리고 당시의 종교, 사회적 맥락 속에 서보는 것이 중요하다. 시편의 기도자들은 “산 이들의 땅”(27,13) 곧 이승 밖에서는 행복을 누릴 수 없다고 여긴다. 이러한 세계관은 인간의 육체적인 조건에 대한 생각(건강, 장수 등이 행복의 주요 요건들이 된다), 인생, 이승에서의 생활, 아직 불완전하게 알려진 하느님의 정의 등에 대한 개념들을 내포하고 있다. 성서의 인간학은 현대 인간학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들은 특히 우리가 일반적으로 하듯 육체와 정신을 구분하지 않는다. 흔히 “영혼”으로 옮겨지는 히브리어 낱말은 시편의 번역에서도 가끔 볼 수 있듯이 실제로는 목구멍, 목, 열망, 욕구, 숨결, 생명 등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때로는 단순히 인칭 대명사로 쓰이기도 한다. 구약성서의 사람들은 생명 또는 생명력을 다양한 강도를 지닌 하나의 힘으로 생각한다. 질병이나 고통스러운 상태, 역경이나 원수들의 공격 같은 것들이 생명력을 감소시키고, 원수 그 자체인 죽음의 세력과 그 영역 속으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병자들과 박해받는 이들이 암흑과 침묵, 그리고 망각만이 다스리는 죽은 이들의 땅으로 내려간다고 탄식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땅 속 깊은 곳’에 자리잡은 이곳을 “저승(히브리말로는, 셔올)”이라 부른다(만일 우리말의 다른 번역에 ‘지옥’으로 되어있다면, 이는 천당/연옥/지옥의 세 차원에서 말하는 지옥이 아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개입하여 해방시키신다는 것은 고통받는 이들의 원기를 회복시켜주고 소생시켜주심을 뜻한다. 

 

곤궁에 빠진 이들은, 고통을 그들이 알게 모르게 지은 죄에 대한 벌로 여긴다. 그래서 이들은 자연히 이러한 결과를 인정하면서, 아울러 하느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릴 방도를 찾는다. 죄의 고백은 용서를 부르고, 하느님의 은혜는 구원을 가져다 준다. 탄원시편 가운데 일곱 개의 기도가(6, 32; 38; 51; 102; 130; 143) 그리스도교 전례에서 전통적으로 ‘참회시편’으로 애송되어왔다. 그 가운데 라틴어 번역의 첫마디를 따라 Miserere와 De profundis로 불리는 시편 51과 130은 커다란 영성의 성숙을 보여주고 있다. 

 

‘개인 탄원시편’과 같은 구조를 지닌 ‘공동 탄원시편’은(12; 44; 58; 60; 74; 79; 80; 83; 85; 90; 123, 그리고 126도 참조) 공동의 재앙을 전제한다: 전쟁에서의 패배, 외군의 침입, 학살과 파괴, 성전의 모독, 약자들에 대한 강자들의 박해, 의인들에 대한 악인들의 억압, 권세가들에 의한 폭정 등. 이스라엘은 그들의 불안과 공포를 하느님께 소리지르며 토로한다. 그리고 구원을 앞당기기 위해 주님께서 개입하셔야 하는 여러 이유들을 들면서 간청한다.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무죄를 내세우거나(44,18), 자기들의 죄를 인정하기도 하면서(79,8-9), 하느님께서 과거에 베푸신 구원(44,2-9; 74,2.12-17), 특히 계약을(74,20) 상기한다. 종국에는 하느님 자신의 명예(74,18; 79,10.12), 그리고 이스라엘에 대한 당신의 진실성과 성실성이 문제가 된다(44,27). 선택된 백성의 일이 주님의 일과 동일시되는 것이다. 

 

(나) 때로는 탄원의 원동력인 신뢰가 전면으로 부각되어 해당 시편의 주제가 된다(11; 16; 23; 62; 121; 131, 그리고 91도 참조). 영성적으로 큰 영향력을 가진 이 노래들은 아마도 레위인들의 환경에서 유래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들 시편 작가들은 평화와 기쁨 속에서 그들의 안녕(23,4-5, 또한 27,1.3; 3,7; 4,9; 131,2-3도 참조), 그리고 하느님과의 지속적이고 긴밀한 관계를 노래한다(16,5-11). 그들은 자기들의 신앙을 고백하며(16,2.4-5; 62) 동포들에게 자기들의 경험을 따를 것을 촉구한다. 하느님과의 친교가 가져다 주는 기쁨과 안녕은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시고(11,7; 16,11), 당신께 피신하는 이들의 청을 들어주시는 성전과 연결되어 있다(11,4; 23,6). 이 밖에 시편 115, 125와 129에서는 공동체의 신뢰도 고백된다. 

 

(다) ‘개인 감사시편’은 그 숫자가 상대적으로 많지 않다(30; 32; 34; 40,2-12; 92; 116; 118; 138). 탄원시편에서 이미 감사가 예고되고 그 윤곽까지 잡혀있다(22,23-32; 56,13-14). 애원이 받아들여진 후에 기도자는 친척과 친구들을 동반하고, 서원을 채우기 위하여 성전으로 올라간다. 개인적이든 공동적이든 감사시편들은 바로 이러한 전례 의식에서 유래한다고 하겠다. 이 시편들의 구조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지니고 있다. 도입 부분 또는 때로 찬양의 주제를 발전시키는 선포 뒤에(92,2-7; 118,5-18) 시편 작가는 그가 처했던 위험, 고통 중에 바쳤던 기도, 그리고 하느님의 도움 덕분에 상황이 반전된 것을 상기한다. 그리고나서 회중을 공동의 감사로 초대함으로써 끝을 맺는다. 특히 시편 107에 관심을 쏟을 필요가 있다. 연출자의 지도 아래 특전을 받은 이들의 네 무리가 줄을 지어 행진한다: 사막에서 되돌아온 대상, 석방된 포로들, 치유받은 병자들, 바다에서 구조된 사람들. 동일한 구성을 지닌 이 시편의 각 연은 하나의 축소된 감사시편으로서 서술, 감사로의 초대, 그리고 후렴으로 되어있다. 개인 감사시편의 형태 아래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해방자’를 향한 사은의 정을 노래했던 시편 118에서 우리는 아직도 그 감사 전례의 박동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3) 교훈시편

 

지혜 문학적인, 그리고 교육적인 요소들이 위에서 말한 두 개의 큰 유형 속에도 들어있다. 그러나 어떤 시편들은 특별히 가르치기 위한 목적을 지니고 있다(머리글에 있는 “마스킬”[‘가르치다’의 뜻도 지니고 있는 동사에서 나온 명사형]과 60,1의 “교훈을 위하여” 참조). 교육은 어떤 특정한 문학 형태에만 연계되어있지 않다. 사실 시편 작가들이 역사적 교훈, 예언자적 방식의 훈계, 전례적 충고, 도덕적 문제에 대한 지혜 문학적 반성 등 다양한 방법을 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현자들의 본보기를 따라 이들은 잠언적 문학 유형을 사용하기도 하고, 기억을 쉽게 하는 동시에 모든 것을 말하고자 한다는 의미를 지닌 ‘알파벳 노래’(37; 112; 119 등)와 같은 교육 방법을 이용하기도 한 듯하다. 그래서 이 문학 유형의 단일성은 느슨할 수밖에 없다. 이 시편들의 공통점은 교훈적인 의도이다. 

 

(가) 세 개의 시편(78; 105; 106)이 구원 역사를 길게 회상하면서 그 주요 주제들을 나열하고 있다: 약속과 계약이 이끄는 선조들의 전통(105), 기적이 선행되고 동반되는 에집트 탈출, 사막 횡단과 시나이에서의 계시, 약속된 땅으로의 입주와 그 소유(78; 105; 106). 그러나 시편 작가들이 사건 자체만을 열거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의 의미, 주님의 명예 칭호(78,4; 105,1.5), 하느님의 성실과 신의, 인내와 자비에 대한 증거를 드러낸다. 이러한 역사 회고는, 신명기가 가르치는 바와 같이, 구체적인 대답을 촉구한다. 

 

(나) 교훈적인 관심은 이른바 ‘전례시편’에서도(15; 24; 134, 그리고 91과 95도 참조) 나타난다. 어떤 의식, 예컨대, 성전문에 도착하여 거행하는 예식은(24,7; 118,20 참조), 성전으로 들어가는 데에, 하느님의 현존 앞에 나타나는 데에, 그리고 하느님 앞에 머무르는 데에 요구되는 조건들을 상기시키는 기회가 된다. 

 

(다) 신명기적 작풍을 따른(81) 신탁과 약속과 경고를 골고루 갖춘 ‘예언적 훈계’는(14; 50; 52; 53; 81, 그리고 75; 95도 참조) 진정한 신심과 계약이 요구하는 바를 강조하며, 사악과 배신을 고발한다(14; 52; 72). 시편 50은 도덕적인 조건과 무관하게 자동적으로 효력을 발휘한다는 제사의 기계적 효력에 대한 백성의 믿음을 단죄한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빚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느님께 빚을 진 것이다. 

 

(라) 마지막으로 몇몇 시편은 전적으로 ‘교훈시편’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만하다(1; 37; 49; 112; 119; 127; 133, 그리고 73; 128; 139도 참조). 이 지혜시에서 다루어지는 주제들 가운데에서 율법은 특별한 자리를 차지한다(1; 119, 그리고 19,8-14도 참조). 애정과 함께 묵상되는 율법은 은혜의 무진장한 근원이다. 시편 작가들은 의인의 행복과 악인의 멸망을 선포하며 응보의 문제를 다룬다. 그러나 현실은 전통적인 가르침과 항상 들어맞지는 않는다. 악인들이 성공하고 의인들이 실패한다. 이것이 신앙인들의 마음을 괴롭힌다. 몇몇 시편 작가들은 이 위기를 거의 절망으로까지 몰고 가면서, 진정한 신앙의 위기를 거치기도 하지만(73), 고통을 통해서 자극을 받아 그들의 생각과 감성을 순화시키게 된다. 그들은 이승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균형이 저승에서 회복된다는 응보를 예측한 것인가? 아직은 분명치 않은 언명 속에 이러한 의미의 희망이 내비쳐보인다(49,16; 73,24, 그리고 창세 5,24와 2열왕 2,1-11도 참조).

 

 

5. 시편집의 어제와 오늘

 

기원전 2세기 중반에 외국에 흩어져있는 유다인들을 위하여 히브리어 성서가 그리스어로 번역된다. 칠십인역이라 불리는 이 번역본에서 시편집은 욥기와 잠언 사이에 위치하며 추가분의 시편 하나가 더 붙는다(151). 칠십인역 시편의 번호 매김은 히브리어 시편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두 번에 걸쳐 히브리어 시편 하나가(116과 147) 둘로 나누어진다. 거꾸로, 역시 두 번에 걸쳐, 히브리어 시편 둘(9와 10, 그리고 113과 114)이 칠십인역에서 하나의 시편으로 모아진다. 이로써 번호 매김이 서로 어긋나게 되는데, 아래의 도표로 그 차이를 볼 수 있다.

 

  히브리 시편                    칠십인역과 라틴말의 불가타 번역

     1 - 8                  =                     1 - 8 

     9 - 10                =                     9

     11 - 113             =                     11 - 112 

     114 - 115           =                     113 

     116                   =                     114  - 115 

     117 - 146           =                     116 - 145

     147                   =                     146 - 147

     148 - 150           =                     148 - 150 

 

우리는 히브리어 성서의 번호 매김을 따른다. 그런데 교회 전례에서는 전통적으로 칠십인역을 따르기 때문에, 아래의 번역에서는 히브리어 성서 번호 옆 괄호 안에 칠십인역의 번호를 표기한다. 

 

히브리어 성서에서 머리말이 없었던 시편들에 그리스어 성서에서는 새로운 설명들이 첨가된다. 84개의 노래들이 다윗과 결부되고, 다른 노래들은 예레미야, 에제키엘, 즈가리야, 하깨, 요나답의 후손들과 관련지어지며, 때로는 시편이 지어진 상황에 대한 새로운 설명도 첨가된다. 칠십인역은 히브리어 성서의 머리말의 뜻이 명확하지 않은 것들을 나름대로 해석한다. 그리고 히브리어 본문이 불분명한 곳에서(이런 부분이 시편에 상당히 많다) 그리스어 번역은, 비록 많은 부분에서 왜곡되었지만, 때로는 더 올바른 본문을 복원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이 번역은 아직도 그리스어를 쓰는 여러 교회에서 경전의 위치를 차지한다(그러나 일반적으로 유다교는 물론이고 가톨릭교회나 프로테스탄트교에서도 원문인 히브리어 성서만이 경전의 권위를 인정받는다). 기원후 2세기 중반에 아퀼라(Aquila), 심마쿠스(Symmachus)와 테오도시온(Theodotion)에 의해서 재작업된 다른 세 개의 그리스어 번역본은 교부들의 인용과 특히 3세기 초 오리게네스의 역작 헥사플라(Hexapla) 덕분에 우리에게 부분적으로나마 전해지고 있다. 

 

시편집은 쿰란 공동체에서도 중요시되었다. 실제로 유다 광야의 동굴들에서 몇몇 개별 시편의 단편들이, 특히 제11번 동굴에서는 커다란 시편 두루마리가 발굴되었다. 더구나 이제 경전의 시편들을 쿰란에서 지어진 찬미가들과 비교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러한 대조를 통하여 히브리어 성서 본문의 독창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고난에 가득 찬 역사를 거치면서 유다인들은 국가적 또는 종교적 축제 때에, 회당의 의식 때에, 그리고 가정에서 그야말로 시편집과 함께 태어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끊임없이 시편들을 낭송하고 묵상하며 노래해 왔다. 

 

히브리어 성서를 아람말로 번역하여 설명한 시편의 타르굼(Targum)은 상대적으로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이것 역시 이븐 에즈라(Ibn Ezra)나 라쉬(Rash) 같은 중세 유다 학자(랍비)들의 대주석서들과 함께 현대의 번역자들이 참조해야 마땅하다. 

 

시편은 신약성서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는 시편이 신약성서에서 100번 이상 인용된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예수께서는 메시아의 위대성을 입증하기 위한 출발점으로 시편 110을 선택하신다(마태 22,41-46). 또한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만찬을 종결짓는 할렐 노래를 부르시고(마태 26,30), 십자가 위에서는 시편 22의 첫머리를 외치신다(마태 27,46). 그리고 시편 31의 절 하나를 외우면서 숨을 거두신다(루가 23,46). 시편을 낭송하고 노래하는 관습은 이미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에게서도 볼 수 있으며(1고린 14,26; 에페 5,19; 골로 3,16; 야고 5,13), 일찍부터 개인 신심행위와 공동 전례에도 퍼지게 된다. 

 

기원후 1세기 말 또는 2세기 초에 시편집은 시리아어로 번역되어 페쉬타(Peshitta)라는 이름으로 전해져오고 있다. 이 고대 번역본은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히브리어 성서에 가까운 히브리어 본문을 반영하고 있으며, 여러 시편에서는 특이한 머리말을 가지고 있다. 조금 후, 곧 2세기 말경에 아프리카와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라틴어 번역본이 탄생한다. 예로니모 성인은 4세기에 그리스어 본문을 바탕으로 한 라틴어 번역의 수정 작업에 들어간다. 그는 우선 칠십인역에 따라 개정하고(Psalterium Romanum) 다음에는 오리게네스의 헥사플라를 이용해서 개정 작업을 한다(Psalterium Gallicanum). 끝으로 직접 히브리어 성서를 바탕으로 하여 번역한다(Psalterion juxta Hebrae-os). 이 세 개정판들 가운데서 두 번째 것이 라틴어로 된 불가타(Vulgata)의 시편집이 된다. 이 불가타 번역본은 또 새로운 교정을 거쳐, 1971년에 발간된 로마 전례의 성무일도(Liturgia Horarum iux-ta Ritum Romanum)에 받아들여졌다. 

 

우리 번역의 각주에서는 이런 칠십인역, 타르굼, 시리아어역(페쉬타) 아퀼라, 심마쿠스, 테오도시온, 예로니모, 불가타 등과 같은 고대 번역본들의 가장 특징적인 주요 이문(히브리어 본문과 다른 글)들만 열거한다. 

 

간략하게 기술된 시편집의 이 긴 역사에 영성과 관련한 하나의 긴 역사가 상응한다. 사실 유다인들, 그리고 계속 이어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와 생활 속에서 시편들로부터 영감을 받아오고 있다. 교부 시대부터 시편들은 설교집과 주석서를 탄생시켰고, 개인적, 공동체적 신심에 활기를 불어넣었으며, 주석학적 연구를 유발시켜오고 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의 새로운 전례를 통하여, 특히 제1독서와 복음 사이의 화답송을 통하여 시편들은 성무일도를 드리지 않는 신자들에게도 어느 정도 친숙해지고 있다. 물론 진정한 신앙심은 각자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지, 문학적으로 고정된 언어에서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시편집이 이미 완성된 기도문을 우리에게 제공하지는 않는다.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가고, 또 우리가 직접 만들어야 하는 기도들을 제시한다. 시편은 우리에게 “새로운 노래”(96,1)를 제안하는 것이다.

 

[출처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홈페이지 새번역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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