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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사목 서간 디도서(티토서) 입문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4-11-03 조회수4,011 추천수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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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 서간 입문

 

 

바오로의 이름으로 전해져 내려온 이른바 ‘바오로계 문헌’ 가운데에서 디모테오 1서와 2서, 그리고 디도서는 문학상으로든 교리상으로든 비슷한 성격을 지닌 한 부류를 이룬다. 그리고 아주 짧은 필레몬서를 빼면, 이 세 서간만 수신인이 한 사람이다. 바오로계의 다른 서신들은 모두 공동체에 보낸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면에서도 디모테오와 디도에게 보낸 세 서간은 특이한 경우가 된다. 18세기 초엽 이후 이 서신들은 전통적으로 ‘사목 서간’이라고 불린다. 사실 이 명칭이 근본적으로 교회의 원로 ‘사목자’가 젊은 사목자에게 보내는 지침을 담고 있는 이 문헌들의 특성을 잘 드러낸다.

 

 

1. 수신인

 

가. 디모테오

 

디모테오라는 인물에 관해서는 루가가 사도행전에서, 그리고 바오로가 자기의 서신에서 직접 우리에게 자료를 제공해 준다.

 

바오로는 장차 자기의 가장 가까운 “협력자”가(사도 19,22) 될 디모테오를, 소아시아 리카오니아 지방에 있는 리스트라 고을에서 처음으로 만난다(또는, “그는 내가 주님 안에서 사랑하는 나의 성실한 아들”이라는 1고린 4,17의 말에 따라, 바오로가 그 이전의 제1차 선교 여행 때에 이미 디모테오를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다고 보기도 한다). 디모테오는 기원전 6년경에 아우구스토 황제가 건설한 이 로마 식민시의 상류층에 속한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는 리카오니아 사투리를 쓰던 본토인들과 달리 그리스 말을 모국어로 하는 이른바 “그리스인”이었다(사도 16,1). 디모테오는 태어난 지 여드레만에 할례를 받는 유다교의 율법을 따르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그의 아버지는 유다인의 입장에서 볼 때에 이교인이었음에 틀림없다. 반면에 그의 어머니 유니게는 유다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이다(사도 16,1). 디모테오는 어머니와 또 신앙심이 깊은 할머니 로이스에게서(2디모 1,5) 어릴 때부터 성서를 배웠다(2디모 3,15).

 

이러한 디모테오는 바오로와 함께 일하기 시작할 때에 상대적으로 젊었다.1) 그래서 열다섯 해쯤 뒤에도, 사도는 디모테오에게 이런 말을 써 보낸다: “아무도 그대를 젊다고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십시오”(1디모 4,12. 그리고 5,1; 2디모 2,22 참조). 조용하고 수줍은 성격인 그는(1고린 16,10; 2디모 1,8 참조) 건강이 별로 좋지 않아 자주 아프곤 하였다. 그래서 바오로는 그의 건강과 관련하여 애정어린 말투로 타이르기도 한다: “이제는 물만 마시지 말고, 그대의 위장이나 잦은 병을 생각하여 포도주도 좀 마시도록 하십시오”(1디모 5,23). 바오로는 유다교를 고집하는 자들과 불필요한 말썽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이미 다 자란 디모테오에게 할례를 베푼다(사도 16,3). 디모테오는 또한 우리로서는 언제인지 알 수 없는 시기에 교회 원로들에게서 안수를 받기도 한다(1디모 4, 14; 2디모 1,6).

 

바오로 사도의 제자가 펼친 사도직 활동은 자연히 스승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는다. 스승 바오로는 이 제자를 “우리의 형제이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하느님의 협력자”라고 정답게 부른다(1데살 3,2). 이는 바오로가 선교 여행을 할 때에 자주 디모테오를 데리고 다녔음을 뜻한다(사도 17,14-15; 18,5; 20,4; 2고린 1,19 참조). 사도가 서간을 쓸 때에도 디모테오가 곁에 있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곧 데살로니카 1서와 2서(1데살 1,1; 2데살 1,1), 고린토 2서(2고린 1,1), 로마서(로마 16,21), 필립비서(필립 1,1), 골로사이서(골로 1,1), 필레몬서이다(필레 1). 바오로는 이러한 디모테오에게 특수 임무를 맡겨 마케도니아로 보내기도 하고(사도 19,22), 주님의 재림과 관련하여 걱정 속에 지내는 데살로니카의 신자들에게 보내어 그들의 기운을 북돋게 하고 그들의 믿음을 격려하게도 한다(1데살 3,2.6). 그리고 고린토 신자들에게 파견하여, 자기가 어디에 가든지 모든 교회에서 가르치는 그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지켜야 하는 원칙들을 상기시키게도 한다(1고린 4,17. 그리고 16,10 참조). 신약성서가 전해 주는 이러한 증언들을 종합할 때, 바오로와 디모테오의 선교 협력이 특별히 밀접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디모테오에 대한 바오로의 애정은 끝까지 이어진다. 생애의 막바지에 다다른 바오로는 “믿음으로써 나의 착실한 아들이 된 디모테오”를(1디모 1,2)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볼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원한다(2디모 4,9.21).

 

나. 디도

 

디도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루가가 사도행전에서 그를 한 번도 언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디도는 ‘그리스계’ 가정 곧 유다교의 입장에서 볼 때에 이교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으로(갈라 2,3), 틀림없이 바오로의 인도로 그리스도교에 입문하였을 것이다(디도 1,4 참조). 바오로는 예루살렘 사도회의에 그를 데리고 간다(갈라 2,1-3). 이러한 디도는 디모테오의 경우와 달리, 바오로에게서 할례를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서도 할례를 강요받지 않는다(갈라 2,3 참조). 바오로와 고린토 신자들 사이에 문제가 일어났을 때, 디도가 결정적 구실을 한다. 고린토 신자들에게 호감을 얻고 중개 역할을 훌륭히 수행한 것이다(2고린 7,7 참조). 바오로는 고린토 신자들에게 서간을 보내면서 다음과 같이 디도를 높이 평가하는 증언을 한다: “그가 여러분의 그리움과 여러분의 한탄, 그리고 나를 위한 여러분의 열정을 우리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더욱 기뻐하였습니다.……우리가 받은 이 위로 외에도, 디도의 기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더욱더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영이 여러분 모두의 덕분에 안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디도는 여러분이 모두 자기를 두려워하고 떨면서 맞아들여 순종한 것을 회상하며, 여러분에게 더 큰 애정을 지니게 되었습니다”(2고린 7,7.13.15).

 

바오로는 하느님에 대한 디도의 사랑과 그의 재능을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인정한다. 그래서 자기 뒤를 이어, 그레데 섬에 있는 여러 공동체의 조직을 마무리짓는 책임을 맡기기도 한다(디도 1,5). 2디모 4,10에 따르면, 디도는 바오로가 로마에서 두 번째로 감옥살이를 할 때에 한동안 함께 지내다가 달마디아로 떠난다.

 

 

2. 집필 시기와 장소

 

가. 디모테오 2서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디모테오 2서가 더 많은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이 서간부터 시작하도록 한다. 이 서간은 사목 서간 가운데에서 가장 늦게 쓰인 것으로 보인다. 사실 바오로는 이 서간에서 “달리기를 마쳤다”고 말한다(4,7). 이에 따르면 이 서간의 집필 시기가 사도의 죽음 직전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도가 순교한 시점을 추정하여, 이 서간이 제공하는 자료를 그의 생애 속에 배치할 수가 있는 것인가? 이러한 작업은 쉽지 않다. 이와 관련하여 두 가지 해결안이 제시된다.

 

첫째 해결안은, 사목 서간들을 바오로가 직접 썼음을 인정하고, 그 결과로 사도가 60년대 초 로마에서 일종의 가택 연금 생활을 한 뒤에 풀려났다가(사도 28,30-31 참조) 다시 두 번째로 감옥살이를 하였음을 전제한다. 곧 네로 박해 때(64년에서 68년 6월까지) 체포되어, 이 기간 어느 때에, 아마도 67년에 순교하였다는 것이다(에우세비우스, 「교회사」 II, xxv,5 참조). 이럴 경우, 데살로니카 2서의 집필 시기는 67년 직전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둘째 해결안은, 바오로가 사목 서간 전체를 썼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 집필 시기를 상당히 늦게, 1세기 말엽이나 2세기 전반부로 잡는다.

 

서간 본문을 잘 살펴보아도, 확신을 가지고 어느 한 쪽을 선택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어느 견해를 따르든지 간에, 그것이 역사적으로 확실한 사실은 되지 못하고 언제나 다소간 개연성의 요인이 내포되어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문제가 되는 요소들은 다음과 같다. 디모테오 2서는 바오로가 로마에서 매우 가혹한 감옥살이를 할 때에 집필된 것으로 제시된다(1,16). 그는 “죄인처럼 감옥에 갇히는 고통”을 겪는다(2,9). 이러한 감옥살이가 바오로의 눈에는 한편으로 수치스러운 것으로 비쳐진다. 그래서 사도는 두 차례에 걸쳐 디모테오에게 자기 때문에 부끄러워하지 말고(1,8.12) 자기가 투옥된 것을 전혀 수치로 여기지 않는 오네시포로를 본받으라고 권고한다(1,16). 그러면서 제국의 수도 로마로 자기를 찾아와 달라고 부탁한다. 바오로는 또한 자기의 재판이 유리하게 끝나리라는 환상을 품지 않는다. 자기가 이미 제물로 바쳐지고 있음을, 곧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왔음을 잘 안다(4,6). 그리고 혼자 내버려졌다는 고독감에 젖어든다. 그의 곁을 지키던 데마는 “현세를 사랑한 나머지” 그를 버렸고, 그레스겐스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떠나 버렸다(4,10). 그가 첫 변론을 할 때에는 아무도 도와 주지 않고 모두 그를 저버렸다(4,16). 루가만 그의 곁에 남는다(4, 11). 그래서 디모테오에게 되도록 빨리(4,9), 겨울이 오기 전에 와 달라고 간청한 것이다(4,21).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사도행전 28,30이 전하는 수인 생활이다.

 

곧 61-63년경의 일로, 흔히 첫 번째 감옥살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사도가 로마에서 지낸 이 첫 수인 생활의 제반 환경은 디모테오 2서에 나타나는 생활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오로는 셋집에 살면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맞아들일 수 있었다. 여기에서 두 가지 가능성이 제기된다. 하나는, 사도가 수인 생활을 두 번 하였다고 전제하고서, 사도행전에는 나오지 않는 이 두 번째 감옥살이 중에 디모테오 2서를 썼다고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 서간의 역사적 자료를 인정하지 않고, 아울러서 사도가 이 서간 전체를 썼음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고려해야 할 사항이 또 하나 있다. 사도는 디모테오에게, 자기가 트로아스에 있는 가르포의 집에 남겨 둔 외투와 책들, 특히 양피지 공책들을 가져오라고 부탁한다(4,13). 그런데 바오로가 트로아스에 머물렀다는 이 말과 사도 20,5에 나오는 트로아스 체류를 같은 것이라고 할 수가 없다. 사도 28,30에 따르면, 이 체류는 사도의 (첫 번째) 수인 생활이 끝나기 오 년 전의 일이다. 바오로가 오 년 동안이나 겨울 외투를 입지 않고 가르포의 집에 내버려 두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끝으로, 바오로는 병이 난 드로피모를 밀레도스에 남겨두고 왔다고 말한다(4,20). 이 말은 사도 21,29의 내용과 맞지 않는다. 사도행전의 이 구절은, 드로피모가 첫 번째 수인 생활 이전에 건강한 몸으로 예루살렘을 걸어다니고 있었다고 전한다.

 

이러한 여러 이유 때문에, 디모테오 2서에 따른 바오로의 로마 체류와 루가가 사도 28,30에서 말하는 체류를 같은 것으로 볼 수가 없다. 그래서 바오로가 로마에서 두 번째 수인 생활을 하였다는 가설을 일부 학자들이 옹호하게 되는 것이다. 

 

나. 디모테오 1서와 디도서

 

이 두 서간은 디모테오 2서와 달리 같은 어휘를 사용하고 같은 주제를 다룬다. 그래서 이 둘은 거의 같은 시기에 집필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집필 시기를 정확히 추정하게 해 줄 수 있는 자료는 빈약하다. 다만 이 두 서간이 제3차 선교 여행 전이나 여행 중, 또 디모테오 2서 이후에 쓰인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1디모 1,3에 따르면, 바오로는 에페소에서 마케도니아로 떠나면서 에페소의 공동체를 지도하라고 디모테오를 그 곳에 남겨 둔다. 디모테오의 이 에페소 체류는 바오로가 세 번째로 선교 여행을 하던 중의 일일 수는 없다. 이 여행 중에 디모테오는 줄곧 바오로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바오로가 에페소 교회의 원로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면서 예견한 대로(사도 20,29) 이 공동체에 실제로 스며든 오류들은 이 교회가 설립되고 나서 어느 정도 시간이 되었음을 전제한다. 이로써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하나는, 이러한 자료들의 역사성을 무시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바오로가 63년경에 끝나는 로마에서의 첫 번째 수인 생활을 하고 난 다음에 다시 사도직을 수행하였고, 63년 이후에, 그리고 디모테오 2서 이전에 디모테오 1서를 썼다는 것이다.

 

디도서와 관련해서도 같은 가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디도 1,5에 따르면, 바오로는 교회의 조직을 마무리하라고 디도를 그레데 섬에 남겨 둔다. 사도는 여행 중에 디도에게 서신을 보내면서(디도 3,12), 니코폴리스에서 자기와 합류하여 거기에서 겨울을 지내자고 권한다. 이 말이 역사적으로 맞을 경우, 이 때에 사도가 벌인 선교 활동은 그가 수인 생활에서 벗어난 뒤, 곧 63-67년경에 이루어진 것이 된다.

 

 

3. 내용

 

가. 사목 서간과 바오로 사상

 

사목 서간들이 동일한 성격을 지닌다는 점은 전반적으로 문제시되지 않는다. 그러나 사목 서간들의 신학과 바오로 사상의 관계는 사정이 다르다. 이 둘을 비교해 보면, 괄목할 만한 유사성과 함께 현저한 상이성도 드러난다. 이러한 사실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정면으로 대치되는 의견들이 나오게 된다.

 

ㄱ. 사목 서간과 바오로 사상의 비슷한 점

 

바오로가 썼다고 확실시되는 서간 이외의 신약성서 문헌 가운데에서 사목 서간만큼 그의 교리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곳도 없다. 사실 이 세 서신에서도 바오로의 주요 명제들이 언급된다. 곧 하느님의 자비가 죄인들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난다는 것(1디모 1,12-17), 사람은 은총을 통해서(디도 3,7) 또 믿음으로 구원된다는 것(1디모 1,16; 2디모 3,15), 율법 준수 같은 덕행으로는 의화(義化)되지 못한다는 것(2디모 1,9; 디도 3,5), 세례성사가 구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디도 3,5), 그리고 인간의 구원은 하느님의 영원한 구원 계획 곧 지금 계시된 “신비”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것 등이다(1디모 3,16). 여기에다 다음과 같은 사항들도 덧붙일 수 있다. 종들에게 하는 권고와(1디모 6,1-2) 국가 권력 앞에서 취해야 하는 자세와 관련된 권고(1디모 2,1; 디도 3,1), 신자들의 이익을 위하여 사도가 겪는 고통의 유익성을 강조하는 것(2디모 2,10), 사도가 느끼는 감정을 상기시키는 것(1디모 1,12-14에서 드러나는 겸손의 감정, 1디모 1,2.18; 5,23; 2디모 1,2; 1,4; 4,9.21 등에서 볼 수 있는 디모테오에 대한 애정), 잘못을 저지르는 이들을 상대로 발휘해야 하는 신중함과 온유함 등이다(2디모 2,25). 사목 서간들과 바오로의 사상 사이에 이렇게 유사점이 많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적어도 사목 서간들이 바오로 계열의 집단에서 쓰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ㄴ. 사목 서간과 바오로 사상의 다른 점

 

사목 서간의 신학과 바오로의 큰 사상적 흐름 사이에는 유사점 못지 않게 상이점들도 두드러진다. 사목 서간에서도 구원에 관한 바오로의 대명제(大命題)들을 다시 보게 되는데, 그것들은 가끔 다른 어휘로 표현된다. 바오로는 믿음을 무엇보다도 먼저 신자들을 그리스도와 연결해 주는 유대(紐帶)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목 서간에서는 이제 고정된 교리(1디모 4,1; 6,21), “건전한 가르침”(1디모 1,10; 2디모 4,3) 또는 디모테오 같은 사람들에게 전승되어 맡겨진 것을(1디모 6,20. 그리고 2디모 2,2) 충실히 따르는 것으로 간주된다. 여기에서는 또 “선행”의 실천이 강조되고(1디모 2,10; 5,10.25 등), 도덕도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른바 ‘중산 계층’의 도덕 쪽으로 이해된다는 사실도 지적된다. 이러한 도덕은 바오로의 대서간들에 나오는,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라는 부르심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애초에 믿음이 들어 있던 자리를 이제는 “신심”이 차지한 것 같다. 이 용어가 바오로의 어휘에는 전혀 낯선 것이었는데도, 사목 서간에서는 줄곧 되풀이된다. 다른 모든 덕보다 뛰어난 것으로 여겨지던 사랑도(1고린 13), 사목 서간에서는 여러 덕 가운데 하나로 바뀌는 경향이 있다(1디모 4, 12). 성령은 부차적인 존재로 언급되고, 은총도 바오로에게서와는 달리 매우 한정된 시각에서 고찰된다(디도 2,11-12). 마지막으로, 종말에 대한 기대가 약화되고, 그와 더불어 현세에서 신심 깊은 생활을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 강조되기도 한다(디도 2,11-14). 사목 서간이 드러내는 이러한 모습은 그 배경이 바오로 이후의 시대임을 드러낸다. 더 이상 믿음의 기초를 놓는 시대가 아니라, 교회를 굳건히 세우고 위협을 가하는 이단에 맞서 교회를 조직하는 때인 것이다.

 

나. 교회 조직

 

대부분의 사도들이 세상을 떠나자, 감독과 원로와 같은 교회 지도자들의 책임이 강조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목 서간은 1세기 말의 상황을 반영한다. 그러나 아직은 후대의 이른바 군주적(君主的) 주교 제도가 제정되기 전이다. 감독들과 원로들이 실질적으로는 똑같은 직분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1디모 3,1 둘째 각주 참조). 이 두 부류의 사람들 모두, 자기들이 이어받은 가르침을 신자들에게 충실히 전하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들은 설교를 할 뿐만 아니라 거기에다 거룩한 생활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1디모 3,1-7; 디도 1,5-9). 또한 이단자들의 유혹에 맞서 신자들의 믿음을 굳건하게 해 주어야 한다.

 

감독과 원로처럼 모범적 생활을 해야 하는 봉사자들은(1디모 3, 8-13) 병든 이들과 가난한 이들을 위한 특수한 사명을 수행한다. 사목 서간에서는 이제 예언이라든가 다른 은사의 직분을 수행하는 이들이 부차적인 위치만을 차지한다. 이는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사항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아마도 고린토 공동체에서 일어난 혼란이 결정적 이유였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여러 부류의 직무와 직무 수행자 사이에 명확한 구분이 이루어져 있지 않은 상태이다. 아직은 교회 조직 발전의 초기 단계일 뿐이다. 나중에 가서야 교회 전통은 그 조직을 세분화하기에 이른다.

 

다. 이단

 

사목 서간은 끊임없이 이단을 논박한다. 이단에 대항하여 교리를 공고히 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선 이 이단은 너무 일반적인 말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2세기의 특징적인 영지주의(靈智主義)와 동일시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교회 안에서까지 활동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이단자들은 주로, 그리스도교를 유다교화하려는 자들의 교리에 영향을 받는다. 이 이단자들은 무엇보다도 유다인으로서(디도 1,10) 율법학자가 되기를 바란다(1디모 1,7). 그들은 율법과 관련된 논란에 적극 가담하고(디도 3,9), 유다인들의 신화라든가 전설이나 족보를 가지고 논리를 편다(1디모 1,4).

 

이 이단자들의 주장에서는 영지주의적 이원론(二元論)의 실마리를 볼 수도 있다. 혼인 금지, 그리고 유다교 세계에서 유래하였을 수도 있는 여러 음식 관련 금기 사항들도 여기에 속한다(1디 모 4,3). 부활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로 영지주의에서 나온 것일 수 있다. 이러한 이단은 교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덕의 해이를 동반한다(이와 관련하여 사목 서간에 나오는 여러 가지 악덕 목록 참조. 그러나 이러한 목록들이 그리스의 스토아 학파에서도 널리 이용되었음도 사실이다. 그것들은 스토아 철학과 관련이 있던 디아스포라 곧 해외 유다인 집단 거주지의 중개로 사목 서간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사목 서간에 대한 스토아 학파의 영향은 상당히 두드러진다).

 

라. 사목 서간에 나오는 찬가

 

감독 곧 후대의 주교나 원로들의 칭호가 지니는 의미라든가 이단을 고찰하는 것만으로는 사목 서간의 신학적 가치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이 서간들을 읽을 때에는, 초대 교회에서 거행된 찬미 전례의 반향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찬미는 특히 사목 서간에서 인용되는 초기 찬가들의 단편에서 명백히 드러난다(1디모 2,5-6 등). 그 가운데 어떤 것들은 유다인 디아스포라의 회당 전례에서 사용된 그리스 말 찬가를 반영한다(1디모 1,17; 6, 15-16). 그러나 다른 것들, 곧 그리스도와 그분 업적의 위대함을 기리는 것들은 그리스도교 자체에서 유래한다(1디모 3,16; 2디모 2,11-13).

 

 

4. 친저성(親著性)

 

사목 서간이 경전에 속한다는 사실에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사목 서간 역시 하느님의 말씀임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서간들을 바오로가 썼느냐는 친저성의 문제는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다. 사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서간들의 집필 시기를 추정하지 못하고 상당히 주저한다는 것은 이 문제가 친저성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주저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이유는 여럿이다.

 

먼저 사목 서간의 외적인 논거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일부 학자들은 그러한 논거들의 무게가 바오로의 친저성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기운다고 본다. 로마의 클레멘스와 스미르나의 폴리카르포와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같은 초대 교부들은 사목 서간을 알고 있었고 또 인용하기도 한다. 이는 적어도 로마와 소아시아의 스미르나와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일찍부터 이 서간들을 경전으로 여겼음을 뜻한다. 180년경에 확정된 이른바 ‘무라토리 경전’에서는 사목 서간들이 바오로 문헌 안에 들어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이 서간들을 마흔 번 이상 인용하고, 이레네오 교부는 사목 서간에서 따온 인용구가 바오로의 말임을 분명히 밝힌다. 이는 2세기 후반부에 이 세 서간이 다른 열 서간과 똑같이 바오로의 작품임과 동시에 경전에 속한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졌고 또 그렇게 받아들여졌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결론이 약간 성급한 것일 수도 있기는 하다. 사실 사목 서간과 이냐시오 및 폴리카르포의 서간들 사이에 많은 유사점이 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반론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문헌이 다 사목 서간 이전의 공통 전통에 종속된다는 것을 전제하면, 그러한 반론의 위력이 상당히 무디어진다. 사목 서간이 포함된 ‘무라토리 경전’에, 이 서간들이 배제된 ‘마르키온의 경전’을 맞세울 수도 있다. 그러나 구약성서를 통째로 거부하는 이단자 마르키온에게는, 사목 서간에서 이단을 단죄하고 구약성서를 기리는 것이 마음에 들 리 없었으리라는 사실도 생각해야 한다.

 

사목 서간의 내적인 논거와 관련해서는, 상황이 전반적으로 매우 혼란스럽다. 먼저 어휘의 이질성 때문에 문제가 제기된다. 사목 서간의 그리스 말 본문에서는 도합 902개의 낱말이 쓰이는데, 그 가운데에서 305개가 바오로의 친저에 나오지 않고, 175개가 신약성서 다른 문헌에 나오지 않는다. 이러한 수는 사실 많은 편이다. 이는 사목 서간의 1.55절마다 한 개의 ‘하팍스’가 쓰임을 의미한다(그리스 말 ‘하팍스’는 ‘단 한 번’이라는 뜻으로, 신약성서에서 한 번만 쓰이는 낱말을 가리킨다). 이와 대조적으로, 예컨대 고린토 1서에서는 5.33절마다 ‘하팍스’가 하나, 고린토 2서에서는 3.66절마다 ‘하팍스’ 하나가 쓰인다. 이러한 사실에서 어떠한 결론을 꺼내는가도 문제이다.

 

이러한 산술적 사실의 중요성을 과대 평가해서는 안 된다. 우선 신약성서에서 단 한 번만 쓰이는 낱말들 가운데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들도 있다. “위장”이라든가(1디모 5,23) “할머니”라든가(2디모 1,5) “양피지 공책”처럼(2디모 4,13) 우연히 쓰인 낱말들이 그러하다. 또는 로마에 사는 관계로 사용하게 된 라틴 말식 표현들도 이러한 경우에 속한다. 사목 서간의 필자들도 그리스 말로 된 구약성서를 이용한다. 그래서 구약성서 그리스 말 번역본에서 사용되기 때문에 이 번역본과 친숙한 이들에게는 아주 자연스럽게 떠올라 쉽게 사용되는 성서 낱말들도 이러한 부류에 포함시킬 수 있다.

 

이제는 의미가 있는 ‘하팍스’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것들은 사목 서간에서 다루어지는 주제에서 유래할 수도 있고 필자 자신에게서 유래할 수도 있다.

 

사목 서간에서는 특수한 주제가 다루어진다. 곧 하느님의 집인 교회를 어떻게 이끄느냐는 문제이다. 바오로는 이 문제를 사목 서간에서만큼 폭넓게 고려한 적이 없다. 상황이 바뀌어 어휘도 새로워지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사목 서간의 ‘하팍스’ 가운데에서 50개는 오류에 빠진 교리와, 29개는 공동체를 위한 직무 수행자의 자질과, 61개는 디모테오와 디도의 직무 및 덕과, 90개는 교회의 전반적인 조직과 관련된 것으로 파악된다.

 

사목 서간의 필자를 바오로 쪽으로 생각할 경우, 로마서나 고린토서와 같은 대서간의 시대 이후에 필자도 변하였다는 것을 하나의 논거로 내세우게 된다. 바오로의 사상처럼 활력이 넘치는 사상은 경직되지 않고 계속 발전해 가는데, 그러한 발전의 흔적이 어휘에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는 사목 서간에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바오로 문헌 전체가 형성되는 전 과정에서도 볼 수 있는 사실이다. 이러한 발전 또는 진화 때문에, 예컨대 데살로니카 1서와 고린토 1서가 동일한 필자의 손에서 나왔음을 증명하는 일부터가 쉽지 않다.

 

만일 사목 서간이 바오로의 작품이라면, 바오로는 이 서간들을 쓸 당시에 상당히 연로한 노인이었을 것이다. 그의 문체는 예전에 비해 활기가 떨어지고 느릴 뿐만 아니라 곧잘 훈계로 변한다. 예컨대 네 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디모테오 2서에 명령형이 서른 번 이상 쓰인다. 사목 서간의 바오로는 고린토 2서에서 소리 높이 외치던, 그리고 갈라디아서에서 생기 넘치던 바오로와는 거리가 멀다. 또 말을 분명하고 논리정연하게 하려다 보니, 기술적인 언어를 선호하게 되고 자주 쓰이지 않는 낱말을 사용하게 된다. 이와 같은 언어의 변화는 나이를 먹어 가는 집필자들에게서 통상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나이가 많아지면서 ‘하팍스’의 사용도 증가하는 것을, 시간상으로 서로 멀리 떨어진 플라톤이나 셰익스피어 같은 이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사목 서간의 친저성과 관련하여, 이 서간들이 쓰일 당시에 바오로의 비서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강조되기도 한다. 우선 옛날의 감옥 사정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럽고 혼잡스럽고 어두운 감방인데다가, 연필 같은 것도 없던 시대이기 때문에 글을 쓰는 것 자체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예컨대 디모테오 2서처럼 짧은 서신을 쓰는 데에도 며칠 동안의 작업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사정을 감안할 때에 비서가 해야 할 몫이 클 수밖에 없었으리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예컨대 2디모 4,6-18처럼 바오로가 직접 불러 준 단락에다, 사도의 가르침이라든가 그와 나눈 대화를 바탕으로 긴 단편들을 비서가 덧붙였을 수 있다. 또한 비서가 자발적으로, 1디모 1,17; 3,16; 6,15-16과 2디모 2,11-13 등처럼 전례에서 유래하는 찬가의 단편들을 이 사목 서간에 집어넣었을 수도 있다.

 

친저성과 관련된 다른 사항들을 더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위에서 본 것처럼 사목 서간의 가르침과 바오로 사상 사이의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 바오로의 친저성을 결정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사목 서간들은 사도의 노년기에 쓰인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시기는 사도가 처음 서간들을 쓸 때와는 전혀 다른 문제들에 직면하게 되는 때이다. 그래서 사목 서간과 이전 서간들의 내용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목 서간에서는 (집필 시기를 상당히 후대로 추정하게 만드는 이단인) ‘영지주의’가 단죄된다는 것도, 이 서간들이 바오로의 작품일 수 없음을 드러내는 논거로 제시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서간들이 시사하는 이단들은 유다교의 여러 가지 모습을 특징으로 지녔을 뿐만 아니라, 2세기 영지주의의 특성도 정확히 제시하지 않는다. 사목 서간에서 문제가 되는 사조(思潮)는 바오로 사도의 생전에 이미 퍼져 있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목 서간은 교회의 조직이 바오로의 다른 서간들에서는 보지 못한 발전 단계에 이르렀음을 드러낸다. 어떤 학자들은 교회 조직과 관련된 사목 서간의 지침들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바오로가 지녔던 관심을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바로 이 분야가 바오로의 친저성을 변호하기가 가장 어렵게 여겨지는 곳이다.

 

사목 서간에 나타나는 역사적 틀과 사도행전이 제공하는 자료를 조화시키는 일이 쉽지 않다는 점도 친저성을 수용하기 어렵게 만든다. 사실 사도행전에는 전혀 언급이 없는 ‘두 번째 수인 생활’이라는 가설은 순전히, 사목 서간에 따른 바오로의 생애 부분이 들어갈 수 있는 역사적 틀을 만들려고 제시한 것이다. 그렇다고 이 ‘두 번째 수인 생활’이라는 것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사도행전이 바오로의 ‘첫 번째 수인 생활’로 끝맺는다고 해서, 그것으로 사도의 생애도 곧바로 끝났음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목 서간의 친저성을 견지하는 쪽도 그것을 부정하는 쪽도 나름대로 설득력 있는 이유를 가지고 있다. 다른 학자들은 부분적 비친저성을 주장하는 중간 입장이 문제 해결에 더 적절하다고 판단한다. 바오로를 깊이 존경하는 어떤 이가 자기 시대 교회의 필요에 따라, 사도의 영적 유언이라고 생각하는 바를 확립해 놓으려고 하였다는 설명이다. (트로아스에 놔 두고 온 외투나 양피지 공책 같은) 구체적인 세부 사항은, 이 필자가 사목 서간에 부분적으로 편입시킨 사도의 친저에 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출처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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