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서의 인물 : 아름다운 여성적 특성을 드러내는 마르타와 마리아 신앙활동에 있어 여성의 역할은 교회를 유지 지탱하는데 있어 큰 주축을 이루고 있다. 특히 주일학교에서 여성의 위치는 두 말 할 것 없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성서에서 여성성(女性性)에 대한 논쟁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통해 여성의 소명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마르타와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하기 전에 밝히고 싶은 것은 우연한 기회에 인터넷에서 한백교회라는 곳에 들어가 보니 성서 인물 공부를 한 내용들이 있었는데 거기에 내가 말하고 싶은 내용이 실려 있어 그 내용을 기초로 이야기를 전개하고자 한다.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가 명시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루가(10, 38-42)와 요한(11장)에서 찿아 볼 수 있다. 루가 복음에서는 지리적 배경에 대한 암시 없이 마르타-마리아 자매 집에서 집회시에 있었던 한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여기에는 자매에 얽힌 하나의 논쟁이 시사되고 있는데, 마르타는 예수님과 그의 일행을 맞이하여 접대를 위해 분주하게 일하는 반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다소곳이 앉아 말씀을 경청하고 있는 장면이 그 논점을 시사한다. 흔히 이것은 여성적 소임을 다하지 않고 (남자들처럼) 방안에 앉아 집회에 참여하고 있는 여자를 예수님이 두둔한 이야기로 해석된다. 당시 랍비들의 집회가 랍비와 그의 제자들인 남자들만의 잔치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러한 해석은 예수님 당시 성해방적주의인 진취성을 한 눈에 보여준다. 실제로 예수님의 집회는 신분에 관계없이, 성에 관계없이, 심지어 어른뿐 아니라 어린아이에게도 개방된 '열린 대화의 공간'이었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경청하는 장면은 예수님 운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 장면에 속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자리라 하더라도, 누군가는 뒤치다꺼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당연히 집주인의 몫이며, 특히 집안 여인들의 과제다. 마르타는 그런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하지만 일손이 달렸고, 그래서 집회에 참여하고 있던 마리아를 꾸짖은 모양이다. 아마도 예수님이 그 말을 듣고는 역성을 냈던 것 같다. 마리아를 내버려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여성다움에 대한 통념적 해석을 비판하는 메시지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여성주의적 해석 이면에는 그리 간단하지 않은 복잡한 문제가 얽혀있다. 예수님이 시중드는 여인이라는 여성다움에 대한 통념을 비판했다면, 왜 마르타에게는 밖에서 부산떨지 말고 들어와 집회에 참석하라고 하지는 않았을까? 그 일이 어느 정도는 꼭 필요한 것이라면, 뒤치다꺼리를 최대한 줄이는 방법, 접대의 부산스러움을 최소화하는 것에 대한 충고가 필요한 것 아닌가? 혹은 주변에 있는 남자들 몇에게 마르타를 도와주라고 하면 더욱 안성마춤이 아닌가? 단지 마리아를 편드는 것이 전부라면, 예수님은 한편으로는 인습적 가치에 공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마리아와 마르타를 이와는 다르게 대조하는 해석도 있다. 예수님 발치에 다소곳이 않아 있는 소극성이 과연 칭찬할 만한 자세인가의 문제다. 오히려 마르타는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있다. 성서 본문이 그의 행위를 '디아코네인'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은 식사를 준비하는 활동을 말하는 용어가 아니라 더 큰 의미 즉, 사도들의 활동을 말하는 봉사의 직무를 의미한다. 특히 마르코 복음서에서 디아코네인이라는 제자들의 직무에만 한정된 용어로만 사용되었던 것이다. 마르타의 움직임은 분명히 교회 봉사 활동의 중요한 위치를 갖고 예수님을 맞이하는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행동에서 마르타를 칭찬하기 보다 마리아를 두둔한 모습은 도대체 어떻게 보아야 한다는 말인가? 그 답은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된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마르타 자신이 가진 몫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참 좋은 것이기에 서로 비교하여 적극적 활동과 소극적 활동에 대해 인간의 눈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우리는 자신이 가진 몫이라는 것이 있다. 그 몫은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게 보이지만 하느님 눈에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이기에 교회 활동이나 사회 생활에 있어 자신의 몫에 만족할 때 다른 어떤 몫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 까 생각된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대조되는 성격차를 더 잘 보여주는 본문은 두 자매의 오빠이면서 예수님의 친구 라자로의 소생에 관한 이야기(요한 11장)를 읽어볼 필요가 있다. 라자로가 위독하다는 전갈이 예수님에게 왔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로 떠나지 않고 이틀을 더 지체한다. 그후 마르타의 집이 있는 베다니야에 이르니, 이미 라자로는 죽은 지 나흘이 지났다. 예수님이 전갈을 받을 때 이미 죽었거나 그 직전 또는 직후에 죽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마을에 당도했다는 소문을 듣고 마르타는 얼른 당신을 마중나왔고, 마리아는 집에 앉아 있다. 오라비가 죽은 경황없는 상황이다. 마음도 몸도 기력이 없는 상태인데다, 아직 상중인지라 손님이 북적거리던 때였다. 그렇다면 마리아가 집안에 앉아있는 장면을 보다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마르타는 마중나간다. 그 상황에도 예의를 차리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대단히 강하며, 공적 활동에 익숙한 여인임을 짐작할 수 있다. 마중나온 마르타와 예수님과의 대화를 보자. 마르타가 먼저 말을 건넨다. "주님이 계셨더라면 오라비는 죽지 않았을 거예요." 손님에 대한 매우 예의바른 말이다. 이에 예수님은 답한다. "라자로는 다시 살아날 거야"라고. 위로의 말치고 뜸금 없는 소리처럼 들린다. 상식 밖의 말인 것이다. 죽은 이가 살아난다니. '죽은 이에 너무 연연하지 말거라'라든가, '고인의 뜻을 잊지 말게'라거나 하면 좋았을 것을 …. 하지만 마르타는 힘있게 답한다. "물론이죠. 마지막 부활 때에는 그리될 것을 믿습니다." 자신의 신실함을 이보다 더 확실하게 보여주는 말이 있을까? 그는 예수님의 이상한 말을 나름대로 최선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상식과 예수님의 상식밖의 말을 조화시켜 이해할 만큼 능숙한 대화의 기술을 터득한 사람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응대한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 것이다." 얼핏 들으면 죽었지만, 본질은 죽지 않은 것과 같다는 말처럼 들린다. 그렇다면 마르타는 다소 뉘앙스가 다른 표현이다. 마르타는 마지막 때엔 살아날 거라고 하는데, 예수님은 지금 현상은 죽은 듯이 보이지만, 그는 이미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이니 그리 슬퍼하지 말라는 뜻일 테니 말이다. 예수님은 이 말을 믿느냐고 묻는다. 이에 마르타는 거창하게 대답한다. "당신은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임을 믿습니다." 복음서에서 제자중의 제자인 베드로만이 이 위대한 답을 해냈다. 그런데 마르타가 그와 동일한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물음에 더 없는 정답을 얘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마리아의 대화는 어떤지 살펴보자. 예수님께서 찾는다는 마르타의 귀뜸을 듣고 마리아는 달려나간다. 그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이렇게 말한다. "주님이 계셨더라면 오라비는 죽지 않았을 거예요." 문장만으로는 마르타와 같은 표현이다. 하지만 그 뉘앙스는 전혀 다르다. 그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통곡하며 이렇게 말을 하고 있다. 그의 슬픔이 얼마나 절절하게 표현됐는지, 예수님은 마음이 격앙되었고 산란해졌다. 예수님은 묻는다. "그가 어디에 묻혔는가?" 그리고 눈물을 흘렸다. 자매를 각기 만난 예수님은 전혀 다른 사람 같다. 마르타와의 만남은 마치 지혜문답과 같다. 마치 세례문답처럼, 정답을 요구하는 질문과 더 없는 올곧은 대답으로 일관된다. 무슨 만남이 이리도 의례적인가 하는 느낌이 들 정도다. 마르타는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죽이고, 방문한 손님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데 치중하고 있다. 반면 마리아는 어떤가? 만나자마자 그는 울음을 터뜨린다. 그리고 예수님님도 슬퍼 울음을 터뜨린다. 마리아는 상대방에 대한 예의 차리기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표출시키는 그런 사람인 것이다. 우리는 요한복음이 묘사하는 두 사람의 캐릭터를 짐작할 수 있다. 마르타가 활동적이라면, 마리아는 소극적인 다소곳한 여자다. 마르타가 다른 사람을 우선시하는 이성적 여자라면, 마리아는 자기 중심적인 감성적이며 직선적인 여자다. 마르타가 공적 활동에 익숙한 여자라면, 마리아는 매우 사사로운 친밀감에 익숙한 여자다. 그리하여 마르타가 어머니와 같은 여성성을 상징한다면, 마리아는 딸 같은 여성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상에서 우리는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 속에서 드러나는 여성성에 대한 논쟁이 단지 사회적 성적 갈등의 문제를 나타낸다기 보다 여성적 특성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회에서 여성과 남성의 역할에 있어 아직도 많은 편견들이 있지만 서로 조화를 이루는 고유한 역할을 강조하고 있고 있음을 피부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 글에서 보았듯이 여성 안에 차지하고 있는 아름다움이 마르타나 마리아의 성격을 통해 드러나듯이 우리들도 각자 내면에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는 하느님이 준 아름다움이 있음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그 아름다움은 타인과의 비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하느님의 작품이라고 할 때 오는 받아들임에서 오는 내어 줌일 것이다. [인천가톨릭대학교 김일회 신부님께서 신학교 홈페이지 성서신학 자료실에 올려주신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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