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인물] 깊은 믿음의 소유자, 회당장 야이로 "선생님! 저는 야이로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열두 살 밖에 안된 제 어린 딸이 다 죽게 되었습니다. 부디 제 집에 오셔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 병을 고쳐 주십시오." 예수님의 일행이 배를 타고 호숫가 건너편에 도착해서 얼마 안되어 군중들 틈을 비집고 지체가 높아 보이는 점잖은 이가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렸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한참 바라보시다가 입을 떼셨다. "나를 어떻게 아십니까?" "내가 잘 아는 이가 선생님이 병자들을 다 고쳐주시는 분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럼 앞장 서시오. 당신 집으로 가봅시다." 야이로는 회당장이었다. 회당은 그리스어로 '시나고가'로 기도와 집회의 장소였다. 그래서 보통 회당이라 하면 유다인이 기도하는 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또한 넓은 의미로 기도하는 모든 장소를 가리키기도 한다. 즉 해변, 강가, 옥외 등에서도 기도하면 여기도 역시 회당이라는 의미에 포함되었다. 예수님 시대에는 예루살렘에 회당이 480여 개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바빌론, 시리아, 소아시아, 마케도니아, 그리스, 이탈리아, 아프리카 등지에도 유다인이 있는 곳이면 회당이 세워졌다. 회당을 건설할 때 예루살렘 쪽을 향하도록 하고, 회당 안에는 모세의 율법을 넣어두는 상자가 놓여있었다.회당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성전을 대신하는 가장 중요한 장소였다. 그러므로 회당장은 원로들 가운데서 뽑힌 행정관이 맡았다. 회당장은 회당의 최고 책임자로 유다인 사회에서는 존경받는 위치에 있던 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아마도 예수님은 그의 겸손한 모습을 어여삐 보셨을 것이다. 그 동안 회당장 야이로는 딸의 병을 고치기 위해 많은 의사에게 찾아가서 치료를 받게 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딸의 병세가 점점 악화되어서 마침내는 빈사상태에 이르렀다. 그러자 회당장 야이로는 자포자기할 지경이 되고 말았다. 인간의 의술과 방법으로는 이제 포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야이로에게 말해 주었다. "예수라는 분이 계신데 그분에게 한번 찾아가 보시오. 그분에게 가면 못 고칠 병이 없소." 그래서 야이로는 최후의 희망을 걸고서 예수님께 한걸음에 달려온 것이었다. 야이로에게 누군가가 예수님에 관해 이야기했어도 믿음이 없었다면 그렇게 행동하진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야이로에게 헐레벌떡 뛰어왔다. "회당장님, 따님이 지금 막 숨이 끊어졌습니다. 이제 저 선생님께서 가실 필요가 없습니다요."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이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당황하고 있는 회당장에게 담담히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시오." 그의 딸이 죽었다는 비보를 전해 받고 흔들리고 있는 야이로에게 걱정과 공포를 갖지 말고 믿음을 보존하라고 하신 것이었다. 신앙은 공포와 두려움과 함께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일행이 회당장의 집에 도착하니 안에서 곡소리가 들렸다.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의 집에서 죽음을 슬퍼하며 통곡하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왜 떠들며 울고 있느냐?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코웃음을 치며 자기들끼리 빈정거렸다. "저 양반이 무슨 소리야? 아니 죽어서 숨이 끊어진 아이를 죽은 것이 아니라 잠자고 있는 것이라니? 저 사람 정신이 어떻게 된 것 아냐?" 예수님은 먼저 예수님의 말씀을 비웃고 믿음 없는 무리들을 그 집안에서 내어보냈다. 그리고 야이로와 부인, 세 명의 제자만 데리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 가셨다. 야이로의 딸은 정말 마치 잠을 자는 듯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예수님은 먼저 그 아이 곁으로 다가가셔서 손을 잡으셨다. 이 모습을 야이로 부부와 세 제자는 숨죽여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님은 "탈리타 쿰" 하고 소리를 지르셨다. 이 말은 "소녀야 어서 일어나라"는 뜻으로 기도보다는 명령이었다. 그러자 파리하던 소녀의 얼굴에 불그스레 혈색이 돌아오면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곧 자리에서 일어나서 예수님의 일행을 쳐다보았다. 예수님은 그 아이의 부모를 바라다보시며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시오"라고 하셨다. 야이로의 집은 예수님의 한 말씀으로 울음에서 기쁨으로, 슬픔에서 행복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변했다. 그런데 이 모든 기쁨은 예수님을 믿었던 야이로의 깊은 신앙심으로 인해 이루어졌다. 우리는 이날 야이로의 가족이 느꼈던 그 일을 상상할 수가 있다. 만약 야이로가 다른 이들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모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누군가가 예수님에 관한 기쁜 소식을 전해 주기도 하지만, 그 소식을 듣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이들도 있기 마련이다. 회당장 야이로에게 누군가 "예수님께 가보라"라고 자신있게 말해 준 사람이 있었기에 믿음이 생겨서 예수님을 찾을 수 있었다. 우리는 듣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또한 들려주는 것 못지않게 그 말을 성실하게 따르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다. [평화신문, 2001년 12월 16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성서못자리 전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