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인물] 위선자의 무리, 바리사이파 사람들(마태 6,1-6) 예수님은 당시 율법으로는 돌로 사형을 당하는 큰 죄인, 간음하다가 발각된 여인에게는 단 한 마디 꾸중도 않으셨다. 오히려 "나도 너의 죄를 묻지 않겠다"고 하시면서 자비로움을 보이셨다. 심지어 당신을 못박은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를 하신 너그러운 분이었다. 그런데 유독 바리사이파 사람들만 만나면 흥분하시면서 욕설도 서슴지 않으셨다. 당시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스스로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우리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거룩하게 선별된 자들이다. 우리는 매일같이 율법을 철저히 지킨다. 신심도 깊고, 하느님의 율법을 거슬러 죄도 짓지 않는다. 하느님이 즐겨하시는 기도와 자선, 선행도 율법에 따라 꼬박꼬박 잘 지킨다. 우리 같이 종교적으로 열심히 사는 사람 있으면 어디 한번 나와 보라 그래!" 실제로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선생님이라 부르며 존경해 마지 않았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한테는 그토록 인정 있게 대하시면서도 정작 바리사이파 사람들만 보면 무슨 죽을 죄를 지은 사람 대하듯 독설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노기등등해 하셨다. "너희들은 회칠한 무덤처럼 위선자들이고, 독사의 족속들이다!" "뭐라고? 말이면 단줄 알아! 위선자, 독사의 족속이라니? 너 죽을 줄 알아!" 예수님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만나면 티격태격했다. 바리사이파란 사두가이파와 함께 세력이 컸던 유대교의 일파였다. 그들은 율법의 세세한 것까지도 철저히 지키면서 자신들을 우월적인 특수층으로 자처했던 사람들이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안식일과 십일조를 엄격히 지킬 것을 가르쳤다. 이들의 엄격한 가르침은 때때로 참된 신앙심을 깨뜨리는 형식주의에 빠지기도 하였다. 그들은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이스라엘이 망한 후에 유대인들 사이에서 영향력 있는 집단으로 남았다. 그 후 몇 세기 동안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유대인을 하나로 일치시키는 데 주역을 담당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바리사이파 사람들에 대한 태도는 전혀 달랐다. "너희들은 전통을 지킨다는 구실로 교묘하게 하느님의 계명을 거스르고 있다. 너희는 남들이 보는 앞에서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스스로 나팔을 불고 다닌다. 기도할 때도 남에게 보이려고 애를 쓴다. 단식할 때도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얼굴을 하고 있다. 하느님과의 내적인 관계보다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신경을 쓰니 너희들은 위선자가 아니고 뭐냐?"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저주도 마다하지 않고 퍼부으셨다.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겉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썩은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과 같다. 너희의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 찬 놈들이다." 예수님의 이런 태도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미움을 살 수밖에 없었다. "뭐라고 너 말 다했어! 배운 것 없는 목수에 불과한 놈이 죽으려고 환장했나!" 실제로 예수님의 죽음의 배경에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영향력도 대단했다. 그런데 당시에 율법을 모르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율법은 알아도 그 짐이 너무 벅차서 실천하기 어려운 상황에 있던 사람들은 살아가는 데 많은 어려움과 죄의식을 지니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오히려 죄의식을 계속해서 부추겨 온 셈이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자기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서 많은 율법 조항들을 만들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지만 서민보다는 권력을 향유하고 가진 자들이 법을 잘 알고 법망을 잘 빠져 나오는 것과 같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율법을 오히려 자신들의 권위와 특권을 누리는 데 사용한 셈이었다. 위선자란 다름 아닌 자신의 시선이 항상 자신에게만 고정된 사람이다. 위선자가 하는 선행이나 희생의 목적도 결국은 자신의 이익을 향한다. 끊임없이 자신의 시선을 다른 이웃과 하느님께 향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영락없는 위선자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다소간의 차이는 있지만 너나 할 것 없이 위선자라고 할 수 있다. 온전히 우리 자신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위선자라고 엄하게 하신 꾸지람은 실상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다. 아무리 열심한 신자, 성직자라도 자기 자신을 향하는 마음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예수님의 질책을 벗어날 수 없다. [평화신문, 2002년 8월 11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성서못자리 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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