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풍속] 충성과 불경의 상징, 개 우스개 소리를 잘 하는 후배가 보좌신부 시절 "저는 양을 지키는 목자가 아니라 개입니다"라고 해서 좌중을 웃겼다. 그런데 오늘날 실제로 터키 지방을 여행하다 보면 충성스런 큰 개들이 목자를 도와 양들을 몰고 지키는 장면을 흔히 볼 수 있다. 개는 포유류 중 가장 오래된 가축으로 거의 전 세계에서 사육되며 200여 품종이 있다. 그리고 개는 성질이 온순하고 영리한 동물이다. 개의 역사는 1만8000년 전 중간 석기시대, 즉 빙하시대 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개는 발달된 대뇌를 갖고 있고 청각과 후각이 뛰어나다. 가장 예민한 감각은 후각으로 사람의 10만배에서 10억배까지 달한다고 한다. 청각은 사람보다 4배나 먼 거리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흰 개는 예로부터 병마, 재앙을 막는 능력이 있고 가운을 길하게 한다고 여겼다. 또한 누런 개는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며 보신의 약효가 있다고 믿었다. 개는 용맹스럽고 주인에게 충직하여 충견의 설화가 많이 전해 오고 있다. 반면에 격이 낮고 비천함을 개에 비유한 속담이나 욕설도 많이 있다. 불결하고, 더럽고, 비천하고, 비양심적이고, 탐욕스러운 사람을 말할 때 '개'에 비유해서 말한다. 성서에서 개는 부정적 상징으로 많이 쓰였다. 즉 개는 불결, 저속, 멸시, 하찮음, 사탄, 위선, 이방인, 거짓 교사, 구원받지 못한 이의 비유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어리석은 행위를 거듭하는 자를 개에 비유하기도 했다. 또한 유다인들이 불경한 동물로 생각한 돼지를 개와 같은 동급으로 취급했다(마태 7,6 참조). 사람에게 개와 돼지를 비유하면 이는 엄청난 모욕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많은 문화권에서 그러하다. 특히 유다인들은 이방인들을 비하해서 자주 '개'라고 천하게 불렀다. 여기서 '개'는 집에서 기르는 개가 아니라 거리를 떠도는 사나운 개를 의미한다. 유다인들은 선민의 긍지와 자부심으로 이방인에게는 친근히 대하지 않았고 이방인은 하느님이 아주 버리신 백성으로 생각했다. 예수님과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대화는 이방인들을 개처럼 여겼던 일반 유다인들의 생각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마르코 7,24-30 참조). 어느날 악령이 들린 어린 딸을 둔 시로페니키아 출생의 이방인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가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태도는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는 빵을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좋지 않다"면서 아주 냉정했다. 그래도 그 여자는 "선생님, 그렇긴 합니다만 상 밑에 있는 강아지도 아이들이 먹다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얻어먹지 않습니까?" 하며 사정하였다. 그제야 예수님께서는 "옳은 말이다. 어서 돌아가 보아라. 마귀는 이미 네 딸에게서 떠나갔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녀의 믿음을 크게 칭찬하셨다. 이처럼 유다인의 세계관에는 하느님이 세계 여러 민족 중에서 자신들을 특별히 선택하여 선민으로 세웠다는 자부심이 짙게 배어있다. 유다인들의 민족적 긍지와 자부심은 대단했다. 특히 이러한 선민의식은 이스라엘이 바빌론으로 유배를 당한 후 더욱더 배타적 성향이 농후해지고 공동체의 특권의식을 강조하게 되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개처럼 여겼던 이방인들과의 교제나 식사를 율법으로 엄격히 금했다. 그런데 반대로 신약시대에 오면 사도 바오로는 유다인들을 오히려 '개'(필립 3,2 참조)라고 지칭했다. 여기서 개는 형식적 할례를 주장하는 유다인을 가리키고 악과 저속함과 더러움을 신랄하게 표현한 단어로 쓰였다. 그런데 루가복음의 부자와 가난한 자의 비유에서는 가난한 라자로의 종기를 핥는 개를 죽음의 예고자, 하늘나라로 여행길을 안내하는 존재로 상징하고 있다. 이처럼 서양에서 개는 윤리적 면에서는 선과 악, 종교적 차원에서는 이 세상과 저 세상 중간에 존재하는 동물로 상징되기도 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종교에서도 개는 삶과 죽음에 관계하고 있는 동물로 여겼다.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상처를 핥는 개는 죄인의 영혼을 말씀으로 치유하는 설교자를 상징한다는 해석까지 했다. 성화에서도 흰 개는 깊은 신앙심을 상징하는 동물로 그려지기도 했다. 어떤 이는 우리 모두가 개처럼만 살아도 세상이 많이 달라질 것이라 한다. 그만큼 개만도 못한 인간이 많다는 생각에 조금은 마음이 아프다. [평화신문, 2003년 4월 13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성서못자리 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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