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풍속] 우물과 같은 유다인 어린이 "… 어린이는 학대를 받거나 버림을 당해서는 안되고, 나쁜 일과 짐이 되는 노동에 이용되지 말아야 하며, 해로운 사회환경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 몸이나 마음에 장애를 가진 어린이는 필요한 교육과 치료를 받아야 하고, 빗나간 어린이는 선도되어야 한다. 어린이는 우리의 내일이며 소망이다. 겨레의 앞날을 짊어질 한국인으로, 인류의 평화에 이바지할 수 있는 세계인으로 키워야 한다…." 1988년 제66회 어린이날을 기하여 공포한 어린이헌장에 나오는 대목이다. 어린이도 한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갖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어린이가 차별없이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지니고 겨레의 앞날을 이어나갈 새 사람으로 존중받으며, 바르고 아름답고 씩씩하게 자라야 한다는 것을 지표로 삼은 것이다. 고대 사회에서는 어린이의 인권과 권리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스파르타 같은 나라에서는 아이들은 철저히 국가 소유물이었다. 그러므로 부모들은 자식을 낳아서 마음대로 기를 수 없었다. 아이가 튼튼하고 강하면 길렀지만 불구자이거나 약한 유아들은 산기슭에 내다버렸다. 그리고 아테네에서도 장애 어린이들에 대해서는 냉정했다고 한다.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장애 아동을 양육하지 못하도록 법률을 제정하라"고 주장했을 정도였다. 로마에서도 아이가 태어나면 바로 아버지의 발 앞에 눕혀 놓았다. 만일 아버지가 아이를 들어올리면 인정하고 책임지겠다는 뜻이었다. 아버지가 얼굴을 돌리면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고 버리겠다는 의사표시였다. 경제사정이 어려운 가정에서는 여자아이인 경우 내다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아이가 불구이거나 허약할 때는 가장 가까운 친지의 동의 하에 살해할 수도 있었다. 유니세프는 얼마 전, 이라크전이 끝났지만 오히려 어린이들의 안전에는 더 큰 위기가 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이래저래 힘없고 약한 어린이들인 셈이다. 유다인 어린이의 운명은 타민족들의 아이들과는 사뭇 달랐다. 유다인들의 경우에도 아이가 신체적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면 제사장 앞에 데려갈 수 없었다(레위기 21장 참조). 그러나 다른 나라처럼 아이를 내다버리는 냉혹한 일은 없었다. 유다인들은 첫 아들인 경우에는 하느님의 소유물로 생각했다. 어린이지만 거룩한 존재로 여겼던 것이다. 성서에서 어린이는 항상 약한 존재의 모델이라 할 수 있다. 여인들과 더불어 어린이는 가장 첫번째로 보호받아야 할 소외된 존재로 꼽았다. 그러나 또한 동시에 어린이는 순수함, 가능성과 구원의 상징이기도 하다(루가 18,15-17). 그래서 유다인들은 어린이를 우물과 같다고 생각했다. 우물은 퍼내면 퍼낼수록 새로운 물이 솟아 나오지만 퍼내지 않고 그대로 버려 두면 그 물은 썩거나 말라버리거나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모든 유다인들은 자기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누구나 열심히 공부하는 것을 인생의 가장 높은 목표로 삼는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일생 동안 공부하도록 명령하셨으며 가장 높은 사회적 지위는 지속적이고 충실한 연구를 하는 사람에게 주어진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다인 어린이들에게 타고난 능력을 최대한 계발할 수 있도록 하는 각종 활동을 조화롭게 제공해주는 것을 교육의 제1원칙으로 삼고 있다. 유다인 부모가 어린이에게 바라는 것은 '남과 다르게 되는 것'이다. 유다인 부모들은 어린이가 스스로 자기 개성을 찾는 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긴다. 자기 아이가 다른 아이와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고정적이고 평범한 사람이 되지 않게 하도록 아이의 개성을 찾아주는 일에 열심이다. 유다인들이 오늘날 세계에서 남다른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어린이에 대한 특별한 인식 때문이 아닐까? [평화신문, 2003년 6월 8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성서못자리 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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