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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문화] 이스라엘과 모압 왕국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4-11-07 조회수5,172 추천수0

[성서의 풍속] 이스라엘과 모압 왕국

 

 

이스라엘의 위대한 영도자 모세는 이집트를 탈출한 후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바라만 본 채 정작 자신은 들어가지 못하고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쳤다(신명 34장 참조). 모세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하느님 백성으로 지켜야 할 율법에 대해 마지막 고별설교를 하고 죽은 후 묻힌 장소는 예리고 맞은편 요르단강 동편 지역인 모압 땅이었다.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 진입하기 전 마지막으로 진을 쳤던 곳이다. 이집트에서 빠져 나온 이스라엘이 에돔의 국경을 돌아 나오다가 진을 쳤던 곳은 바로 모압의 두 강가였다.

 

모압 산지에는 사해로 유입되는 비교적 큰 규모의 두 강, 곧 아르논강과 제렛강이 있다. 이스라엘 인접국 중 하나인 모압 왕국은 사해 동편 지역 룻기의 배경이 되는 모압 산지에 자리잡고 있었다.

 

모압 산지는 북쪽의 아르논 골짜기에서 남쪽의 세렛 골짜기 사이에 펼쳐진 탁자형의 평평한 고원지대를 이루고 있다. 특히 모압 영토는 동쪽으로는 아라비아 사막, 서쪽으로는 사해와 연결되어 있다. 이 지역은 높은 고원지역이지만 비옥한 토양과 풍성한 물 공급으로 비교적 풍요로운 곳이었다.

 

이곳에서는 요르단강 계곡을 비롯하여 사해와 유다 산지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깊은 계곡 안에 있는 이 하천들은 양편으로 급경사를 이룬 산지를 두고 있어서 사람들의 통행에 많은 불편을 초래했다. 모압 산지의 계곡들은 외적 침입에 효과적 자연 방어선이 되었다. 그래서 로마시대와 십자군시대에는 군사적 요충지로 이곳에 여러 개의 요새들이 세워지기도 하였다.

 

모압은 광야에서 유랑하던 이스라엘과 직접적으로 싸움을 벌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아모리인을 쳐부수는 모습을 보고 모압 왕 발락은 크게 놀랐다. 그래서 아마윗 사람들의 땅 ’브돌’로 사절을 보내어 브올의 아들 발람을 불러다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고 청했다(민수 22,2-6 참조). 하지만 당시 이스라엘은 가나안으로 진입하는 데 총력전을 기울여야 했다. 따라서 아르논강을 넘어서 모압 땅을 넘볼 여유가 없었다. 다만 아모리 왕 시혼이 다스리던 아르논강 북부인 옛 모압 영토를 르우벤 지파가 할당받아 굳게 지켰다(여호 13,15-21).

 

모압과 길르앗 사이에는 정확하게 두 지역을 구분시켜주는 자연 경계선이 없다. 그래서 모압은 길르앗을 차지하고 있었던 이스라엘과 자주 전쟁을 치렀다. 특히 판관시대에는 모압과 이스라엘 사이에 계속되는 국경전쟁이 있었다. 이러한 상태는 사울왕 때까지 계속되었고 다윗이 이곳을 점령함으로써 계속되었던 국경분쟁은 종식되었다.

 

솔로몬의 통치기간 동안 이스라엘과 모압 사이에는 매우 우호적 관계가 유지되었다. 솔로몬 왕은 모압 여인을 후궁으로 맞아들기도 했다(Ⅰ열왕 11장 참조). 그후 이스라엘이 두 왕국으로 분열되면서 모압은 일시적 독립을 쟁취하게 되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 왕조의 오므리왕은 모압을 점령하여 속국으로 삼아버렸다. 하지만 오므리의 아들이었던 아합왕이 죽게 되면서 모압 왕 메사는 이스라엘에 반기를 들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유다, 에돔의 연합군이 모압 군과 전투를 벌였다(Ⅱ열왕 3장 참조).

 

모압 산지는 아르논강을 중심으로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이 아르논강은 사해 가운데 부분에서 흘러나오는 강이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적어도 이 강을 지난 후에는 사해 방면으로 가로지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모압인들의 종교는 요르단강 서편에 살았던 팔레스티나의 가나안인들과 별로 다를 바 없었다. 가나안 원주민들의 바알 신앙이 그대로 행해졌을 것이다. 이에 못지않게 밀려들어오는 남방과 북방의 종교 영향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모압과 이스라엘은 지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서로 많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모압족의 시작을 성서에서는 다소 낯뜨거운 장면으로 소개하고 있다. 롯이 소알 사람들을 피해 두 딸과 산의 동굴에서 살게 되었다. 후손을 걱정한 두 딸이 어느 날 아버지에게 술을 진탕 먹여놓고 잠자리를 가져 큰딸이 아들을 낳았고 그 이름을 모압이라 지었다.

 

그가 오늘날 모압인의 시조가 되었다는 것이다(창세 19,30-26 참조). 술이 과하면 항상 사고(?)를 치게 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가 보다.

 

[평화신문, 2003년 9월 21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성서못자리 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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