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풍속] 유다인들의 스승 랍비 - 회당에서 성서를 읽는 랍비, 이스라엘. 자료제공=정웅모 신부(서울대교구 성미술 감독).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무덤을 찾았다. 그러나 무덤 안에는 예수님의 시신이 없었다. 마리아가 슬피 울고 있는데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고 있느냐?"하고 물으셨다. 그때 마리아는 그분이 동산지기인 줄 알고 "당신이 그분을 옮겨갔거든 어디에다 모셨는지 알려 주세요. 내가 모셔 가겠습니다"하고 말했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시자 마리아는 예수께 돌아서서 히브리말로 "라뽀니"(이 말은 "선생님이여"라는 뜻이다)하고 불렀다(요한 20,15-16 참조). 구약성서에서 ’랍’이란 호칭은 일반적으로 관직을 가진 훌륭한 사람들을 의미했다. 히브리어로 ’랍비’란 ’나의 선생님’ ’나의 주인’이라는 뜻으로 라보니(rabboni)라고도 한다(요한 20,16 참조). 이 용어는 1세기에 이르러 보편화됐고, 사도시대 이후엔 유다교 성직자를 가리키는 말로 정착됐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랍비라는 경칭으로 부르는 것을 경고하셨다(마태 23,1-12 참조). 랍비는 유다인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다. 그들은 이스라엘 전통을 일반 유다인들을 대신하여 연구하고, 태어나 죽을 때까지의 유다인 사회의 크고 작은 문제들을 해결해 주는 역할을 한다. 유다인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랍비가 참여하여 개입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1세기경부터 쓰이기 시작한 ’랍비’라는 용어는 히브리어로 ’교사’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랍비는 교육활동 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유다교 종교행사와 각종 의식을 주재한다. 또한 지역사회를 위한 구제와 봉사활동에도 관여하며, 여러 형태의 공동체 사업을 지원하기도 한다. 공식적으로 임명받은 랍비가 없는 경우 공동체 내에 의식을 행할만한 경건함과 인격을 갖춘 사람이 랍비 역할을 수행할 때도 있다. 일반적으로 유다인이 20여가구만 되면 그들의 삶에서 필수적인 회당을 만들어 랍비를 모시게 된다. 랍비는 유다인 학교 선생으로서 책임과 회당의 관리와 설교를 맡는다. 14세기 이후 랍비들에게 봉급이 지급되었다. 랍비들이 생활에 어려움이 있을 때 그들의 직책수행에 차질을 빚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부 랍비들은 직업을 가지면서 시간제 봉사직으로 랍비 업무를 수행하기도 한다. 과거 로마인들이 유다 민족을 억압하던 시절에는 유다인을 말살하기 위한 갖가지 방법을 생각했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유다인 학교를 폐쇄시키고, 예배와 민족적인 축제를 금하고, 유다인의 지혜를 깨우쳐주는 책을 불태우고, 랍비의 교육까지 금하기도 했다. 랍비가 없다는 건 바로 유다인 삶의 기초가 없어지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래서 교육을 마친 랍비의 임명식에 참석한 사람이나 랍비를 임명한 사람이나 모두 가리지 않고 사형에 처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랍비 가운데는 지위에 있어서 상하나 정해진 서열은 없다. 또한 랍비들끼리 어떤 종류의 단체를 만들지도 않는다. 그러나 어떤 랍비가 더 지혜롭다고 인정되면 그 랍비가 많은 유다인들의 어려운 질문에 답하고 복잡한 의식을 주재하는 지도자로 자연스레 부상된다. 오늘날 랍비가 되는 과정은 까다롭고 엄격하다. 예를 들어 랍비가 되는 미국의 학교는 대학원에 해당하기 때문에 먼저 일반대학에서 학사과정을 거쳐야 한다. 랍비가 되기 위한 시험은 성서, 히브리어, 아랍어, 이스라엘 역사, 유다 문학, 법률, 심리학, 설교학, 교육학, 철학 등의 시험과 몇편의 논문도 써야 한다. 그리고 4년에서 6년 동안 탈무드를 중급과정부터 공부한다. 랍비가 되기 위한 공부 중에서 가장 기본과 핵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물론 탈무드이다. 탈무드의 공부만은 일반 교수가 아닌 탁월한 지혜를 지닌 인격자가 맡게 된다. 유다교는 특별히 시간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것에 반해 어떠한 장소나 지역은 별로 중요시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역이란 말은 쓰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랍비를 ’성인’이라고 존경하고 있다. 오늘날 이스라엘을 지탱하게 하는 가장 큰 원동력은 바로 랍비들의 존재이며, 그들에 대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전폭적인 신뢰와 존경이다.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스승과 지도자가 국가와 사회에 많다는 건 우리에게는 분명히 부러운 일이다. [평화신문, 2003년 11월 23일, 허영엽신부(서울대교구성서못자리 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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