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풍속] 유다인의 성지, 통곡의 벽 - '통곡의 벽'에서 기도하는 유다인들, 예루살렘. 자료제공=정웅모 신부(서울대교구 성미술 감독). 성지 순례자들이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게 될 경우 맨 먼저 통곡의 벽에 도착하여 유다인들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많은 유다인들이 성벽에 이마를 대고 서서 기도하는 모습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지난 2000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64년 바오로 6세 이후 36년만에 처음으로 이스라엘 땅을 방문했다. 그러나 당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문은 바오로 6세의 방문과는 판이한 의미를 지녔다. 바오로 6세의 방문은 비공식 방문인 데다 이스라엘 및 유다교와 화해도 없었다. 그러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중동 성지 방문은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세월의 무게에 짓눌리듯 구부정해진 어깨에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로 힘들어보이는 걸음으로 분열과 증오의 땅을 찾아 상처를 어루만지며 애타게 평화를 기원하던 모습은 지구촌을 감동시켰다. 특히 교황은 예루살렘 통곡의 벽에서 세계 평화를 기원하는 쪽지를 성벽 틈에 집어넣고 오랫동안 성벽에 이마를 대고 서서 기도했다. 이 모습은 전세계인들에게 잊지 못할 감동적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교황은 유다인들이 하는 기도방법으로 똑같이 기도했기 때문이었다. 유다인들은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성전 서쪽 벽을 ’통곡의 벽’이라 부른다. 높이 16m의 이 성벽은 헤로데 대왕 때의 것으로, 그가 왕에 오른 이후 건축이 시작되어 약 60여년이나 걸려 건축했다. 기원후 70년 이스라엘이 로마에 의해 멸망당할 때 헤로데의 성은 모두 무너졌지만 통곡의 벽 아래 부분은 남았다. 로마의 티투스 장군이 제2성전의 다른 부분은 모두 파괴하고 유독 이 벽만을 남겨 놓은 이유는 후세 사람들에게 성전을 파괴시킬 수 있었던 로마 군인들의 위대한 힘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예루살렘 성전의 서쪽은 골짜기가 지나가고 있어서 헤로데는 성전과 윗 도시를 연결하기 위해 골짜기 위를 지나는 다리를 설계하여 설치해 놓았다. 그러나 제1차 유다 반란 기간 중에 로마에 의해 파괴되어 성전 안뜰은 완전히 외부로부터 고립되어 버렸다. 로마 시대에는 유다인들이 일체 들어오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7세기경 이슬람교의 오마르왕은 일년에 단 한번 성전 파괴 기념일에 이곳에서 기도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그때부터 이 성전 서쪽 벽은 유다인들에게 가장 거룩한 기도의 장소가 되었다. 유다인들은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기에 통곡의 벽에 가서 야훼께 그들의 소원을 빌고 또 기도 제목을 종이 쪽지에 써서 벽 틈에 끼워 두었다. 유다인들이 이곳에 와서 그들 민족이 분산됨을 슬퍼하고 성전이 폐허가 되었음을 통곡했기에 이 벽을 통곡의 벽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통곡의 벽을 이스라엘이 완전히 다시 차지한 것은 1967년 6일 전쟁 때였다. 이스라엘 정예 공수부대는 완강한 저항을 받으며 옛 예루살렘성의 사자문을 통과하여 입성에 성공하였다. 2000여년 동안 잃었던 예루살렘 성을 완전 점령한 후 이스라엘 병사들은 통곡의 벽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안식일이나 절기 때가 되면 통곡의 벽 앞 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기도하는 모습이 장관을 이룬다. 이곳은 다른 회당이나 마찬가지로 남녀가 각각 칸막이로 나누어진 구역에서 기도한다. 통곡의 벽 밑은 공간을 반으로 나누어 남쪽은 여자들이 기도하고 북쪽은 남자들이 기도하도록 구분되어 있다. 평소에도 성년식을 행하는, 춤추며 기도하는 소년과 그 가족의 모습도 지켜볼 수 있다. 유다인들의 성년식은 결혼식과 함께 일생 중 가장 성대하고 중요한 행사로 여긴다. 성년이 되면 비로소 구약성서의 율법을 잘 지키면서 살아가는 책임있는 존재가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통곡의 벽에서 유다인들의 민족 집회가 열리고 군인들의 선서식도 갖는다. 통곡의 벽은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던 유다인들에게 잃었던 이스라엘 땅을 되찾겠다는 꿈을 상징하는 성소가 되어 왔다. 그래서 통곡의 벽은 지금까지 유다인 최고의 기도장소가 되고 있다. 또한 통곡의 벽은 이스라엘 멸망의 역사를 대변해주고 있다. 즉 2000년 동안의 방랑생활 가운데서도 예루살렘 귀향이라는 꿈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신앙 상징으로 남아 있다. [평화신문, 2003년 12월 7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성서못자리 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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