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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문화] 성서의 세계: 이혼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4-11-07 조회수4,409 추천수1

성서의 세계 : 이혼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된다"(마르 10,9).

 

 

복음서에 보면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한다.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습니까?" 예수님께서 "모세는 어떻게 하라고 일렀느냐?" 하고 반문하시자, 그들은 "이혼장을 써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은 허락했습니다."하고 대답한다(마르 10,2-4).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대답에서 볼 수 있듯이, 다른 민족처럼 이스라엘에서도 부부가 갈라지는 것이 허락되었다. 그러나 이혼할 수 있는 권리는 남편에게만 있었다(집회 7,26; 25,26 참조). 특별하기는 하지만, 여자가 남편을 버리고 집을 나갈 수 있는 경우도 있었다. 남자가 소실로 삼으려고 여종을 산 뒤에 다시 다른 여자를 들이더라도, 그 남자는 소실의 양식과 의복을 줄이거나 부부 관계를 소홀히 해서는 안되었다. 주인이 이 세 가지 의무를 다하지 않을 경우, 첩이 된 그 여종은 자유로운 몸으로 나갈 수 있었다(출애 21,7-11). 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가 판관기에 있다. 어떤 소실이 화나는 일을 당하고 친정으로 가버린다. 남편은 아내와 화해하고 그를 데려오려고, 당시로서는 가깝지 않은 처가까지 직접 간다(판관 19,2-10). 이는 이스라엘인들이 쉽게 이혼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 남편이 아내를 내보낼 수 있었는가? 아내에게서 수치스러운 일이 드러나 남편의 눈 밖에 났을 때이다(신명 24,1). 그런데 '수치스러운 일'이 무엇이냐가 문제였다. 예수님 시대에도 이 문제가 활발히 논의되었는데, 두 학파의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 한 쪽에서는 신명기의 이 규정을 엄격히 해석해서, 간음을 하거나 품행이 특별히 나쁜 경우에만 아내를 내쫓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다른 쪽에서는 '수치스러운 일'을 매우 넓고 일반적인 용어로 이해하였다. 결국 여기에서는 신명기 24장 1절을, 객관적으로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라 남편의 마음에 드느냐 안 드느냐에 달린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래서 요리를 잘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사소한 일로도 아내를 내보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아내를 내보낼 때 어떠한 절차를 밟았는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먼저 남편이 아내와 부부 인연을 끊음을 선언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곧 "저 여자는 이제 내 아내가 아니고, 나는 이제 저 여자의 남편이 아니다." 하고 공포하는 것이다(호세 2,4 참조). 이는 혼인할 때 "저 여자는 이제 내 아내이고, 나는 이제 저 여자의 남편이다." 하고 선언한 것을 무효화하는 것이다. 남편은 이어서 그러한 사실을 문서로 써서 아내에게 건네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이혼장이다(이사 50,1; 예레 3,8 참조).

 

그러나 남편이 아내를 내보내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첫날밤을 지내고 아내 된 여자가 처녀가 아니었다고 고발하였는데, 그 고발이 거짓으로 드러날 경우, 남편은 태형을 당하고 명예 훼손죄로 장인에게 벌금을 물어야 할 뿐 아니라, 그 여자를 평생 데리고 살아야 했다(신명 22,13-19). 그리고 다른 남자와 약혼하지 않은 처녀를 강간하면 그 여자와 혼인해야 했는데, 이 경우에도 이혼이 허락되지 않았다(신명 22,28-29).

 

소박을 맞아 내쫓긴 여자는 자유로이 다른 남자와 혼인할 수 있었다. 물론 전 남편이 써준 이혼장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이 증서가 없으면 간음하는 것이 되고 만다. 그리고 남편이 아내를 내보냈는데, 이 여자가 재혼하였다가 다시 소박을 맞든가 과부가 되어 자유로운 몸이 되었을 때, 전 남편은 이 여자를 다시 아내로 맞아들이지 못하였다(신명 24,3-4). 일시적 감정으로 정든 아내를 내보내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뜻이 담긴 규정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사제는 이혼한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이지 못하였다(레위 21,14).

 

이렇게 이스라엘 남자들은 법적으로 이혼을 쉽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남자들이 쉽게, 그리고 자주 아내를 내보냈는가? 결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구약성서에는 많은 이야기가 나오지만, 특별한 경우 외에는(에즈 10,3.44 등) 실제로 이혼하는 이야기를 거의 볼 수 없다. 또한 몇 가지 사정을 고려할 때 이혼이 사실 쉽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우선 남자가 여자를 데려오려면 적지 않은 '신부 몸값'을 지불해야 했다. 그래서 재혼할 생각으로 아내를 내보낼 경우에는 자기의 경제적 여건을 먼저 생각해야 했다.

 

이혼할 때 아내가 어떤 재정적 보조를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구약성서에 나오지 않는다. 이집트의 엘레판티네라는 곳에는 (아마도 기원전 8세기경부터) 많은 유다인 용병들이 살고 있었다. 현지의 영향으로 여자도 이혼을 요구할 수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이곳에서는, 아내를 데려오면서 지불한 '신부 몸값'을 되돌려달라고 요구하지 못할 뿐더러, 일정한 '이혼료'까지 내놓아야 했다. 그리고 아내는 시집올 때 가져온 것을 도로 가져갈 수 있었다. 물론 이스라엘에서도 이와 똑같이 하지는 않았겠지만, 이혼당하는 여자의 생존을 보장하는 어떤 장치가 있었으리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구약성서는 부부 사이의 사랑과 정절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잠언 5,15-19; 6,20-35), 이혼을 단죄하기까지 한다. "조강지처가 싫어져서 내쫓는 것은 제 옷을 찢는 것과 같다. 나는 그러한 자들을 미워한다. … 변심하여 조강지처를 버리지 않도록 하여라"(말라 2,16).

 

가정을 중시하는 이스라엘인들의 근본 자세와 이런 여러 가지 사항을 고려할 때, 이혼이 실제로는 매우 드물었음을 알 수 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질문에 대답을 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일차적으로 예언자의 전통을 계승하신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 문제의 근원으로 되돌아가신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원뜻, 그분의 창조 질서에 따라 부부 관계를 드러내보이신다. 신명기의 규정은 일종의 변절이고, 인간의 약함, 악함과 타협한 결과라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셔서 둘이 한 몸이 되게 하신다. 그래서 남녀의 혼인은 바로 창조주 하느님께서 둘을 하나로 묶어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된다"(마르 10,9).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연약한 아내를 쉽게 쫓아내 버리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재정립하시는 '이혼 불가'라는 대원칙이다. 이 대원칙에 따라,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그 여자와 간음하는 것"이 된다(마르 10,10; 루가 16,18).

 

그런데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같은 내용에 "음행한 경우를 제외하고"라는 단서가 붙는다(5,32; 9,9). 이 단서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그리고 이것이 특별한 경우에 이혼을 허락하는 말씀이 아니냐라는 오래되고 어려운 문제가 대두된다. 여기에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하느님의 창조 질서에 따라 사람을 보호하는 데에 예수님 말씀의 원뜻이 있다는 사실이다. 곧 가정, 그리고 연약한 여자를 보호하는 것이다.

 

[경향잡지, 1998년 4월호, 임승필 요셉 신부(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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