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세계 : 맏물, 맏배, 맏아들 이스라엘 민족의 선조 이사악은 쌍둥이 아들을 낳는다. 큰아들 에사오는 온몸에 털이 많은 사람으로 성격이 단순하고 우직하다. 반면에 털없이 매끈하게 생긴 작은아들 야곱은 들판으로 나다니는 것보다 집안에서 조용히 지내기를 좋아한다. 아버지 이사악은 솜씨 좋은 사냥꾼으로 살아가는 큰아들을 더 아낀다. 그러나 어머니 리브가는 고상하고 품위있는 작은아들을 더 사랑한다(창세 25,24-28). 생각이 깊고 영악한 야곱은 자기가 동생이라는 사실을 아쉬워한다. 그는 어머니 배에서 나올 때, 마치 앞으로 일어날 갈등을 예고라도 하듯, 선둥이 에사오의 발뒤꿈치를 붙잡고 있었다. 마침내 야곱에게 기회가 온다. 그가 죽을 끓이는데 형이 지친 몸을 이끌고 사냥에서 돌아오는 것이다. 야곱은 불콩죽 한 그릇과 장자권(長子權)을 맞바꾸자고 제안한다. 허기가 져서 "죽을 지경"인 에사오는, 별다른 생각도 미련도 없이 기꺼이 동의한다(창세 25,29-34). 이런 일이 있고 난 뒤, 큰아들과 작은아들의 자리가 바뀌는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죽을 때가 가까웠음을 안 이사악은, 관습대로 에사오에게 ’맏아들 축복’을 베풀려고 한다. 그런데 아버지가 큰아들에게 이르는 말을 엿들은 어머니는 꾀를 내어, 작은아들이 그 축복을 가로채게 해버린다(창세 27장). 옛 사람들은 말이 그 자체로서 위력을 지닌다고 생각하였다. 예컨대 상대방에게 축복이나 저주를 하면, 그 내용이 그 사람에게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여겼다. 그리고 한번 나간 말을 도로 담을 수 없듯이, 축복이나 저주도 한번 하게 되면, 변경하거나 취소시킬 수가 없었다. 결국 야곱이 받은 ’맏아들 축복’으로 큰아들과 작은아들의 순위가 뒤바뀐다. 야곱이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사악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민족의 선조가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인들은 셈족에 속한다. 그런데 셈족 사람들은 맏아들이 신의 소유라고 생각한다. 신에 속한 것은 다른 것들과는 달리 거룩하기 때문에, 인간이 그것을 다른 용도로 쓸 수가 없다. 맏아들 역시 일종의 ’거룩함’을 지녔다. 첫아들은 이렇게 천부적으로 다른 아들들과는 구분되며, 태생적으로 ’맏아들 권리’를 지닌다. 이스라엘의 법은 아버지조차 이 장자권을 함부로 부정할 수 없다고 못을 박는다(신명 21,15-17).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관습이지만, 큰아들은 이미 아버지 생전부터 일정한 권위와 함께 윗자리를 차지하고 특별 대우를 받는다(창세 43,33). 물론 이러한 지위는 아우들에 대한 책임감도 내포한다(창세 37,21-22). 맏아들은 또한 위의 이야기에서 보았듯이 아버지가 죽기 전에 특별한 축복을 받을뿐더러, 상속 재산도 다른 아들들보다 갑절을 받는다(신명 21,17). 그리고 아버지가 죽으면 자동적으로 집안의 우두머리가 되어 가문을 잇는다. 그렇다고 해서 맏아들의 지위가 절대적이지는 않다. 애초에는 가장이 경우에 따라서 맏아들 권리를 다른 아들에게 넘길 수도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야곱은 자기 아들로 삼은 두 손자, 곧 요셉의 두 아들에게 축복하면서, 맏아들 므나쎄와 작은아들 에브라임의 자리를 바꾼다(창세 48,13-22). 다윗 시대의 시므리는 본디 첫아들이 아니었지만, 그의 아버지가 맏아들로 삼았다(1역대 26,10). 위에서 본 신명기의 규정(21,15-17)은 후대에 와서, 때로 가정의 질서를 파괴할 수도 있는 아버지의 임의에 제동을 거는 장치로 여겨진다. 큰아들의 권리는 에사오처럼 본인이 팔아넘기거나 포기할 수도 있다. 그리고 야곱의 맏아들 르우벤과 같이 큰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에는(창세 35,22) 장자권이 박탈되기도 한다(창세 49,3-4; 1역대 5,1 참조). 큰아들과 작은아들의 서열은 이렇게 여러 가지 사정으로 바뀔 수가 있다. 그런데 성서는 구원 역사의 중요한 시점에서 이루어진 서열 변화를 하느님의 선택으로 이해한다. 하느님께서는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완전한 자유로 행동하시는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아담의 맏아들 카인보다 작은아들 아벨을 선호하신다(창세 4,4-5). 또 에사오가 아니라 작은아들 야곱을 장차 당신 백성이 될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선택하신다(창세 25,23; 말라 1,2-3; 로마 9,13). 막내로 태어난 다윗은 일곱 형을 제치고 이스라엘의 첫 임금으로 뽑힌다(1사무 16,1-13). 그리고 솔로몬은 형들이 많음에도(2사무 3,2-5; 5,14), 주님에게서 아버지 다윗의 왕국을 받는다(1열왕 2,15). 맏아들 문제와 관련하여 성서의 가장 큰 특징과 의미는 다른 데에 있다. 성서의 사람들은 혼인만이 아니라, 사람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면서 당시 인간 생존의 유일한 바탕이었던 농사의 첫 열매가 하느님께 속한다고 여긴다. 맏아들은 물론, 집에서 키우는 짐승의 맏배, 사람들이 가꾸는 곡식과 과일나무의 맏물이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에, 그분께 바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삶과 죽음, 인간의 생산 활동과 그 활동의 터전까지 온전히 하느님의 것이며 또 그분의 손에 달렸다는 믿음, 그리고 인간은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절대적인 주인이 아니라는 믿음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깨달음이다. 그래서 맏물과 맏배와 맏아들을 하느님께 바치는 것은, 그분께서 주인이심을 인정하는 행위이면서, 동시에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그분께 계속 풍요와 다산을 베풀어주십사고 간청하는 행동도 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러한 믿음을 주님께서 자기들에게 베푸신 구원의 역사, 곧 이집트 탈출과 가나안 입주와 관련짓는다. 이러한 이유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자기들에게 주신 땅에서 거두어들인 맏물, 곧 곡식, 포도나무와 올리브나무 첫열매로 만든 햇포도주와 햇기름, 그리고 처음 깎은 양털을 성전으로 가져다가 하느님께 바친다(탈출 22,29; 23,19; 신명 18,4). 그러면서 그들은 저마다 하느님 앞에서 자기 민족의 구원 역사 전체를 요약하는 신앙 고백을 한다(신명 26,1-11). 여기에서 특기할 사항은, ’젖과 꿀이 흐르는 이 좋은 땅’을 선조들만이 아니라, 맏물을 봉헌하는 사람 각자가 하느님에게서 직접 받았다는 생각이다. 하느님께서 친히 자기에게 주신 좋은 땅에서 난 최상품을 그분께 드린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 예물들은 일반 백성처럼 생존의 근거가 되는 토지를 따로 나누어 받지 못한 채, 성전에서 하느님과 백성을 위해서 봉직하는 사제들의 몫이 된다. 가축 가운데에서는 처음 난 수컷을 주님께 바쳐야 한다(탈출 13,12-13). 그러나 흠이 있는 짐승이나(신명 15,21), 부정(不淨)한 짐승으로 간주되는 나귀는(레위 11,3), 양이나 돈을 바침으로써 대속(代贖)해야 한다(민수 18,16). 이스라엘인들은 이러한 맏배의 봉헌도, 자기들의 구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이집트 탈출과 관련짓는다. 하느님께서는 창조와 자연의 주님이실 뿐만 아니라, 역사의 주님이시라는 사실까지 고백하는 것이다(탈출 13,14-16). 맏아들도 같은 이유로 하느님께 바쳐야 한다(탈출 13,2). 여기에서 문제되는 것은 봉헌의 방식이었다. 이스라엘 주변 민족들은 아이들을 직접 죽이거나 산 채로 불에 살라서 신에게 바쳤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특히 절망적인 상황에서는, 이교도들처럼(2열왕 3,27) 맏아들 또는 자식들을 불에 살라 하느님께 바쳐야 한다고 생각한다(2열왕 16,3; 2역대 33,6). 그러나 이는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행위이다. 그래서 율법으로 엄하게 금지하고(레위 20,2-5), 예언자들도 추상 같은 말로써 그러한 비인간적이고 우상숭배적인 짓을 단죄한다(예레 7,30-34; 19,5-9; 에제 16,20). 맏아들도 작은 가축이나 돈으로 대속함으로써 하느님께 바쳐야 하는 것이다(탈출 13,13; 34,20; 민수 18,16). "맏아들"이라는 말은 확장된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레위인들은 이스라엘의 모든 첫아들 대신 하느님께 속한다. 구체적으로 그들은 성전의 사제들에게 맡겨져, 사제들과 백성들을 위해서 봉직한다(민수 3,5-9.12). 그리고 이스라엘 자체가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하느님의 맏아들’로 불리기도 한다(탈출 4,22). 신약성서에 와서는 "맏아들"이라는 용어가 예수 그리스도의 위치와 역할을 설명하는 데에 쓰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온 인류의 맏아들로서 하느님과의 유일한 관계 속에 계실뿐더러(히브 1,6), 당신의 동생들인 모든 사람들과의 연대성 속에서 그들에게 새로운 생명의 길을 열어주시는 것이다(1고린 15,20; 골로 1,18; 묵시 1,5). [경향잡지, 1998년 7월호, 임승필 요셉 신부(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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