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세계 : 손님 접대 창세기 18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손님들을 영접하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온다. 한여름 대낮의 뜨거운 태양을 피해 천막 어귀에 앉아서 쉬고 있던 이스라엘의 선조 아브라함은, 웬 나그네 셋이 다가오는 것을 본다. 성서 저자는 이미 1절에서, "주님께서는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함으로써, 그 길손들이 주님과 그분의 천사들임을 밝힌다. 그러나 아브라함으로서는 그들이 그렇게 고귀한 손님들일 줄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없었다. 그에게는 그저 뜨거운 날씨에 길을 걷느라고 고생하는 여행자들일 뿐이었다.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달려나가 "그들을 맞으면서 땅에 엎드려 말하였다. ’나리, 제가 나리 눈에 든다면, 부디 이 종을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시어 발을 씻으시고, 이 나무 아래에서 쉬십시오. 제가 빵도 조금 가져오겠습니다. 이렇게 이 종의 곁을 지나게 되셨으니, 원기를 돋우신 다음 길을 떠나십시오’"(창세 18,2-5). 물론 아브라함이 땅에 엎드렸다거나, 손님을 "나리(직역: 저의 주인님)"라 부르고 자신을 그 손님의 "종"이라 일컬었다는 사실은, 그 손님들이 평범한 길손이 아님을 아는 성서 저자의 의도적인 표현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배경에는 낯선 여행자를 매우 정중히 대하는 고대 근동의 관습이 자리잡고 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무더위 속에 사람들은 물론 자연까지 고즈넉한 시간에, 나이가 많을뿐더러 점잖게 처신해야 하는 족장 아브라함이 일으키는 부산함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는 "급히 천막으로 들어가" 아내에게 빵을 만들라 하고, 또 "소 떼에게 달려가" 육질이 좋은 송아지 한 마리를 끌어다가 요리하라고 하인에게 준다. 아브라함은 이어서 자기가 직접 엉긴 젖과 우유와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손님들 앞에 차려놓고, 그들이 먹는 동안 나무 아래에 서서 그들을 시중든다(창세 18,6-8). 이스라엘의 조상이며 또한 모든 신앙인의 선조인 아브라함의 이러한 행동이 이후 구약성서는 물론, 유다인과 그리스도인에게도 손님 접대의 본보기가 된다. 물론 민족마다 나름대로 손님들을 후대한다. ’손’에다 ’님’자를 붙이는 우리 민족에게도 손님을 정성껏 모시는 아름다운 풍습이 있다. 이스라엘에서는 손님 접대가 특수한 배경과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 배경은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기 전, 척박한 광야에서 살아야 했던 유목 생활이다. 인적이 드물고 숙박이나 공공시설이 없는 거친 환경 속에서 길을 떠나는 것은 늘 힘들고 위험한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광야나 사막에서 사는 유목민들 사이에서는 서로 도와야 한다는 필요성과 당위성이 일찍부터 대두되었을 것이다. 또한 낯선 사람을 통해서 다른 세계를 접할 수 있다는 것도, 그를 손님으로 맞아들이게 하는 한 요인이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이스라엘에서는, 다른 유목민에게도 마찬가지이지만, 손님을 환대하는 것이 단순한 예의 차원을 넘어서서, 어겨서는 안되는 의무로 자리잡는다. 우리에게 ’손님’은 보통 아는 사람이거나 적어도 무슨 관계가 있는 이를 말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이스라엘에서는 일차적으로 전혀 모르는 여행객이 영접을 받는다. 알든 모르든 곁을 지나는 사람,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를 집에 모셔 정중하고 융숭한 대접을 베푸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자리잡은 뒤, 어떤 마을에서 하룻밤을 묵으려는 길손은, 우리 나라에서는 동네 어귀의 정자나무에 해당하는, 성문 광장에 가서 앉는다. 그러면 이러한 길손을 맞아들이는 것이 집을 가진 모든 이의 의무였기 때문에, 누구랄 것 없이 아무나 그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접대한다(창세 19,1). 나그네가 발을 씻게 해주고, 나귀를 타고 왔으면 먹이를 주고 나서 그에게 음식을 내놓는다(판관 19,21). 아브라함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빵도 조금 가져오겠습니다."라고 말은 할 수 있지만(창세 18,5), 실은 성심껏 성찬을 베풀고 손님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판관 19,22 참조). 그리고 떠날 시간이 되면, 길을 나서려는 손님과 더 있다 가라고 붙잡는 주인 사이에 인사말이 길게 오가기도 한다(판관 19,1-10 참조). 손님에게는 대접을 해야 할 뿐 아니라 보호도 해주어야 한다. 제 집에 들어온 손님의 안전에 대해서 주인이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창세 19,8; 판관 19,23 참조). 지금처럼 경찰과 같은 공권력이 확립되지 않았던 그 옛날, 흔히 적대적일 수 있는 집단들이 흩어져 살던 상황에서, 종교나 혈연이나 지연을 뛰어넘는 그러한 의무는 인간 세상을 받쳐주는 기본적인 덕 가운데 하나였다. 이러한 의무를 수행하지 않거나, 또는 남의 집에 든 손님을 해치는 것은 중대한 죄악으로서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예컨대 손님 접대 문제로 이쪽 저쪽에 많은 희생이 뒤따르는 내전까지 일어난다(판관 19,11-20,48. 손님 접대를 거부한 수꼿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징벌을 받는 판관 8,4-9.13-17도 참조). 이러한 손님 보호에도 예외는 있다. 야엘이라는 여인은 이스라엘인이 아니면서도, 이스라엘을 억압하는 외군의 장수 시스라가 도망칠 때에 자기 천막으로 맞아들여 대접한 다음 그를 죽임으로써, 이스라엘의 해방에 일조를 한다. 그리하여 그는 "천막에 사는 여자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어라."라는 칭송을 받게 된다(판관 4,18-24; 5,24-27). 접대가 잘 이루어졌을 때에는, 손님도 주인에게 어떤 식으로든 은혜를 갚아 둘 사이에는 서로 이익이 되는 상호 관계가 성립된다. 아브라함에게서 후한 대접을 받은 나그네들은, 이미 늙어서 자식을 가질 수 없는 주인 부부에게 일 년 뒤에 아들이 생기리라는 약속으로 호의에 보답한다(창세 18,9-15). 또 리브가는 길손을 정성껏 모심으로써 그에게서 큰 선물을 받을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며느리가 되기도 한다(창세 24장). 이 두 이야기에서는 손님 접대라는 사람들 사이의 선행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고 실행됨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호 호혜적 관계를 무시할 경우에는 벌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인구가 많아지고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손님 접대라는 성스러운 관습에도 부작용이 일어남을 볼 수 있다. 이는 ’손(님)을 치르다.’라는 우리말의 표현이나 ’손은 갈수록 좋고 비는 올수록 좋다.’라는 우리의 속담, 또는 ’생선과 손님은 사흘만 지나면 냄새가 난다.’라든가 ’손님과 비는 사흘이 되면 짜증스럽다.’라는 서양의 속담처럼, 어떤 민족에서나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특히 집회서의 저자는 식객으로 이 집 저 집 옮겨다니는 것을 엄하게 경고한다(집회 29,21-28; 40,28-30). 손님 접대가 이스라엘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하느님께서 직접 또는 당신의 대리자를 통하여 손님이 되기도 하실뿐더러, 더욱 근본적으로는 주인 그 자체가 되기도 하신다는 사실 때문이다. 구약성서는 위에서 본 아브라함의 이야기(창세 18장)나 기드온 이야기(판관 6,11-24)에서처럼, 사람이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 또는 그분의 사자(使者)를 손님으로 대접할 수 있음을 명백히 한다. 다른 한편, 이스라엘인은 자기들이 "떠돌아다니는 아람인"의 자손들로서, 평생토록 하느님의 손님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치게 된다. 그들은 이집트를 탈출하여 40년 동안 광야를 돌아다닐 때, 손님이 주인에게서 음식을 받아먹듯, 하느님께서 내려주시는 만나를 먹고 살았다(출애 16장).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저마다 제 집과 토지를 가진 다음에도, 땅은 주님의 소유임을, 자기들은 그분 곁에 머무르는 나그네일 따름임을 깨닫는다(레위 25,23; 시편 39,3). 그들은 마침내, 창조주이신 주님께서 인간만이 아니라 온 자연까지도 날마다 먹여 살리시는 주인이시라고 찬미하기에 이른다(시편 104). 예루살렘 성전의 원이름은 "주님(또는 하느님)의 집"이다.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주님의 소유이다(신명 10,4; 시편 24,1; 89,12; 이사 66,1-2). 그리고 성전은 이러한 ’주인’께서 이 세상에 현존하심을 드러내는 그분의 집인 것이다. 종교 생활의 중심인 성전에서 거행되는 전례에 참여함으로써,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과 하느님의 관계가 주인과 길손 사이의 관계임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느님께서 성전에서 당신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을 극진한 손님 접대에 비유하기도 한다(시편 23,5). 그리고 그러한 주님의 집을 그리워하며 그곳에서 평생토록 살기를 바란다(시편 23,6; 27,4; 63,3; 84,3.11). 그리고 이사야 예언자는 완전한 정의와 평화의 시대인 종말을, 하느님께서 당신의 집이 자리잡은 시온 산에서 모든 민족에게 베푸시는 영원한 잔치로 표현한다(이사 25,6-8 참조). 이러한 구약성서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유다인들은, 손님 접대에 주변의 어느 민족보다도 더 큰 정성을 기울인다. 어떤 유다인 학자는 창세기 18장을 해설하면서 이러한 말까지 한다. 아브라함의 집에 천사들이 도착한 다음에 하느님께서도 오셨는데, 아브라함은 먼저 오신 분들을 우선 대접해야 하니 기다려주십사고 하느님께 여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이 나올 정도로 유다인은 손님 접대를 중시하였던 것이다. 한때 예루살렘에서는 식사 중일 때에 집 밖에 깃발을 내걸기도 하였다. 그것을 보고 길손은 누구나 들어와서 함께 식사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마을마다 있었던 회당은 숙식할 곳을 찾는 길손들이 모여 쉬는 곳 또는 바로 그들의 숙소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신약성서 역시 손님 접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히브 13,2; 로마 12,13; 1디모 3,2; 디도 1,8도 참조). 루가 복음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천사가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대접하게 된 이야기를 전한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같이 길을 걷던 길손을 손님으로 접대하는데, 함께 식사하다가 그 손님이 바로 부활하신 분이심을 깨닫게 된다(루가 24,13-35). 그리고 마태오 복음서 25장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 이야기는 나그네를 맞아들이는 것이, 당신 자신을 가난하고 어려움에 처한 이들과 동일시하시는 심판자 예수 그리스도를 대접하는 것임을 분명히 한다. 신약성서의 가장 큰 특징은 예수님의 복음 선포 자체가 손님 접대와 밀접히 관련된다는 사실이다. 우선 예수님의 활동이,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는 그분의 말씀처럼(마태 8,20 = 루가 9,58), 객지 생활을 하는 가운데에 이루어진다. 예수님께서는 자연히 이 사람 저 사람의 손님이 되실 수밖에 없었다. 그분의 복음을 전파하는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선교사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손님 접대 이야기의 연속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러한 연유로 다른 이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 예수님의 중요한 일과가 된다. 먹고 마심 자체가 그분의 사명 수행 자체가 되기도 한다. 그분께서는 공공연히 죄인으로 멸시받는 이들과 함께 묵기도 하시고 식사도 같이 하심으로써(마태 11,18-19; 마르 2,15; 루가 19,1-9), 그들과 깊은 연대성을 고백하신다. 아울러 당신께서 죄인을 부르러 오셨음을(마태 9,13),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오셨음을 분명히 하신다(루가 19,10).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먹이시고(마태 14,13-21과 병행구) 또 당신의 몸과 피를 내놓으심으로써(마르 14,22-25와 병행구), 사람들에게서 대접받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 사람들을 대접하는 것이 당신의 일임을 밝히신다. 사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잔치에 비유하신다(마태 8,11; 22,1-14; 루가 14,16-24). 사람들은 이 천상 잔치에 참석하여 하느님과 기쁨을 함께 나누도록 초대받은 것이다(마태 25,21.23 참조). 인간은 모두 하느님에게 초대받은 손님이다. ’영원한 잔치’가 벌어지는 ’주님의 집’을 향하여 여행하는 길손이다. 인간은 예수님의 몸과 피로 이루어지는 성체성사로써 이미 이 땅에서부터 주님의 대접을 받으면서, 그분의 영원한 그 잔치를 미리 맛보면서, 인생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경향잡지, 1999년 3월호, 임승필 요셉 신부(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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