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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문화] 성서의 세계: 빵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4-11-07 조회수4,148 추천수1

성서의 세계 : 빵

 

 

예수님과 빵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금식과 기도로 마흔 날을 지내신 끝에, 악마에게서 받은 첫째 유혹이 빵과 관련된다(마태 4,1-11; 루가 4,1-13). ’당신이 진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당신의 정체와 능력을 한 번 드러내어 당신의 그 고픈 배를 채워보시오.’라는 유혹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는 성서의 말씀으로 유혹을 물리치신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빵의 중요성을(집회 29,21) 무시하시는 것은 결코 아니다. 빵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 대한 당신의 관심과 애정을 말씀과 행동으로 직접 드러내신다. ’주님의 기도’(마태 6,9-13)에서 사람들과 관련된 첫째 간청이,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직역: 빵)을 주시고"이다.

 

예수님께서는 배고픈 이들에게 직접 빵도 나누어주신다(마태 14,13-21; 마르 6,30-44; 루가 9,10-17; 요한 6,1-14). 당신을 따르느라고 굶주린 군중을 해산시켜 각자 알아서 식사를 해결하게 하자는 제자들의 건의에, 예수님께서는 ’말이 안되는 말씀’을 하신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이어서 군중을 풀밭에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무리를 지어 앉게 하라고 명령하신다(마르 6,40). 그리고 어리둥절해 하는 제자들이 가져온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드시고 하느님께 찬미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물고기와 함께 나누어주라고 하신다. 사람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 남은 빵 조각과 물고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찬다.

 

예수님께서 자기들의 민생고를 손쉽게 해결하시는 것을 본 군중은 그분을 억지로라도 임금으로 모시려고 한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신다(요한 6,15). 예수님의 첫째 유혹을 연상시키는 상황이다.

 

이튿날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신다.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하고 역설하신다(요한 6,51.54).

 

최후의 만찬 때에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시어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받아 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 하고 말씀하신다. 또 포도주 잔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돌려 마시게 하고 나서, "이것은 나의 피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 하고 말씀하신다(마태 26,26-29; 마르 14,22-25; 루가 22,17-20; 1고린 11,23-26).

 

이렇게 하신 뒷날, 성금요일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다. 최후의 만찬 때에 하신 말씀을 실행에 옮기신 것이다. 그리고 주일에 부활하신다. 당신의 말씀과 행동이 참될 뿐만 아니라 실제로 효력을 낸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신 것이다.

 

 

빵과 밥

 

예수님의 생애와 그리스도교에서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빵은 우리의 밥과 흡사하다. 이스라엘에서도 주변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벼가 자라지 않았다. 그래서 그곳 사람들은 일찍부터 여러 가지 곡식으로 빵을 만들어 먹고 살았다.

 

빵을 만드는 곡식은 일차적으로 밀이다. 그러나 일반 서민은 주로 보리빵을 먹었다. 요한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기적적으로 많게 하신 빵도 보리빵이다(요한 6,9). 빵을 만들려면 우선 곡식을 곱게 빻아야 한다. 가정에서는 흔히 절구나 맷돌이 이용되었고 짐승을 끌어서 돌리는 연자매도 쓰였다.

 

빵 모양은 재료와 굽는 도구, 또 사람들의 기호에 따라 여러 가지로 만들어진다. 우선 곡식 가루에 물을 붓고 소금과 효모균을 넣어 반죽한다. 발효가 되면 빵의 모양을 만드는데, 전(煎)이나 피자처럼 둥글납작한 것이 가장 흔한 형태였다. 두께가 2밀리미터에서 1센티미터, 지름이 20에서 50센티미터 정도였다. 긴 막대에 걸 수 있도록 가운데에 구멍을 뚫어놓기도 하였다. 보관과 운반을 쉽게 하고 쥐의 접근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보릿가루는 끈기가 없어 얇고 넓은 빵을 만들 수 없었다. 자연히 보리빵은 위가 둥그스름하면서 두껍고 작았다. 이 밖에도 빵은 우리의 밥과 달리 모양을 다양하게 할 수 있었다. 이집트의 어떤 문헌에는 빵 종류가 서른 가지나 나열된다. 구약성서에도 빵 이름이 몇 가지 나오는데, 지금으로서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형태였는지 모두 분명하지는 않다.

 

빵을 굽는 데에 가장 발달한 형태는 오늘날의 오븐과 비슷하다. 흙을 빚어서 위가 조금 좁은 2층 원통을 만든다. 밑에는 아궁이를 내고 위에는 빵을 넣어 구을 수 있도록 적당한 구멍을 낸다.

 

이스라엘에는 이미 왕정 시대부터 빵 만드는 직업이 있었다(호세 7,4). 예루살렘에는 ’제빵업자들의 거리’까지 있었다(예레 37,21). 그러나 일반 백성은 집에서 직접 빵을 만들어 먹었다. 가루를 빻고 빵을 굽는 일은 주부의 일상 작업 가운데 하나였다(창세 18,6; 잠언 31,15).

 

부자의 식탁이나 큰 잔치에는 고기, 생선, 채소, 과일(민수 11,5; 1역대 12,41) 그리고 과자와 꿀도 오르지만(1열왕 14,3), 주된 음식은 늘 빵이었다. 손님을 접대할 때에 우선 마련하는 것도 빵이었다(창세 18,5.6). 가난한 서민의 끼니는 ’빵과 물’이 전부였다(출애 23,25; 1열왕 18,4.13; 2열왕 6,22; 에제 12,18-19). 빵에다 포도주를 곁들이면 일반 식사의 범주를 넘어선다. 곧 ’빵과 포도주’는 풍성한 기쁨의 잔치를 뜻한다(창세 14,18; 잠언 9,5; 이사 55,1).

 

이처럼 빵이 식사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우리말의 ’밥을 먹다.’처럼 히브리 말에서도 ’빵을 먹다.’는 ’식사하다.’를(창세 37,25; 출애 2,20; 1사무 20,24), ’빵을 먹지 않다.’는 ’식사를 하지 않다.’를 뜻한다(1열왕 13,8-9).

 

빵은 칼로 자르지 않고 손으로 떼어서 먹었다. 그래서 다른 이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도 매우 간단하였다. 물은 돌려 마시고 빵은 그냥 떼어서 나누어 먹으면 되었다. 이렇게 자기의 빵을 굶주린 이와 나누어 먹는 것이 큰 의무로, 형제적 사랑의 구체적 표현으로 여겨졌다(잠언 22,9; 이사 58,7; 에제 18,7). 그리고 배고픈 이에게 빵을 나누어주지 않음은 죄가 되었다(욥 22,7).

 

이스라엘인들에게 빵을 나눔은 단순히 밥을 함께 먹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규칙적으로 누구와 빵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그 사람과 절친한 사이임을 곧 친구임을 뜻한다(시편 41,10; 집회 9,16; 오바 7절). 빵을 함께 나눔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룸을 뜻하는 것이다.

 

 

빵과 나눔, 말씀과 성체성사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사람들의 배를 채워주지는 않으셨다. 기적이 일어난 곳은 호숫가여서 물은 풍족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떼어 나누어주도록 하시고 거기에다 물고기까지 곁들여주신다. 그래서 사람들은 빵과 물과 물고기를 먹는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정식으로 식사 대접을 받는 것이다.

 

마르코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시편 23을 연상시키는 "풀밭"에 사람들을 무리지어 앉게 하신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나의 식사 공동체가 이루어진 것이다(이러한 식사 공동체는 최후의 만찬 때에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남은 빵과 물고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찬다. ’열둘’은 예수님에게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라는 명령을 받았고, 사람들이 일정한 수로 무리를 지어 자리잡게 하였으며, 또 예수님에게서 빵을 받아 그들에게 직접 나누어준 제자들의 수와 같다. 이렇게 빵이 남은 것은, 이들의 협력으로 앞으로도 더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식사 공동체에 합류하여 빵을 나누어 먹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식사 공동체는 늘 열려있는 공동체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에서도 빵을 중요한 자리에 배치하신다. 그러면서도 빵 너머에 있는 무엇을 가리키신다. 유혹 이야기에서, 빵을 배불리 먹은 사람들이 당신을 임금으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시고 혼자서 산으로 물러가신 일에서도 그러한 사실을 보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빵에서의 해방’을 말씀하시고 또 손수 실천하신다. 빵의 노예가 될 때에 사람은 사람다울 수 없다. 굶주린 이들은 빵에서 해방되지 못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배고픈 이들을 먹여주신다. 그리고 그 일에 제자들도 적극적으로 협력하도록 배려하신다. 가진 것 없는 제자들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는 명령을 따라야 하였다. 그들은 ’나눔의 신비’를 실행하였다. 그래서 빵 또는 밥을 먹고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그리스도인들도, 사람들이 빵 또는 밥에서 해방되도록 하기 위하여 나눔의 신비를 실천해야 한다.

 

배만 부르다고 빵이나 밥에서 해방되지는 않는다. 빵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음을 깨닫고, 빵을 얻으려고 노력하듯 더 중요한 그것을 얻으려고 애쓸 때에 비로소 해방의 길을 걷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더 중요한 그것이 "말씀"이라고 하신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공생활 초기에, 굶주린 배로 이 사실을 외치신다. 그리고 공생활을 마치시면서, 빵보다 더 중요한 것 곧 "생명의 빵"이 바로 당신의 ’몸’임을 처참한 죽음, 그리고 영광스런 부활로 보여주신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이들을 빵에서 해방시키면서, 자기도 하느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몸과 함께 참 해방의 길을 걷는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경향잡지, 2000년 1월호, 임승필 요셉 신부(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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