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세계 : 술 성서의 땅 가나안은 인접한 시리아와 함께 ’물보다 술이 더 많다.’는 속담이 있었을 정도로 술이 풍부한 고장이었다. 지중해변의 다른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여기에서 술은 일차적으로 그리고 주로 포도주를 가리킨다. 술의 용도 성서의 땅에서 임금을 비롯한 귀족들과 부유한 이들은 식사 때마다 포도주를 마셨다. 특히 포도주를 빵과 함께 마셨는데, 우리식으로 말하면 반주(飯酒)가 아니라 ’국’의 구실도 한 것이다. 곧 우리 나라의 ’밥과 국’처럼 성서의 땅에서는 ’빵과 물’ 또는 ’빵과 포도주’가 기본 음식이 된다. 우리가 어려웠던 시절을 기준으로 말하자면, ’(보리)빵과 물’은 ’(보리)밥과 된장국’이고 ’(밀)빵과 포도주’는 ’(쌀)밥과 고깃국’ 정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술을 특별한 계기에 마신다. 이 특별한 계기는 ’기쁨’이 그 특징을 이루는 때이다. 사실 술은 즐거움의 상징이다(시편 104,15). 포도를 수확하고 그 즙을 짜서 포도주를 만드는 일부터 기쁨의 환호 속에, 흥겨운 노래 속에 이루어진다(이사 16,10). 그리고 우리말의 ’잔치’나 ’연희’에 해당하는 히브리 말 자체가 본디 ’(술을) 마심’이라는 뜻을 지닌다(창세 21,8). 곧 모든 잔치나 연회에 술이 가장 중요한 음식이었다. 술은 선물로도 쓰인다. 멜기세덱은 아브람에게 빵과 포도주를 선물하고(창세 14,18), 아비가일은 자기 남편 나발을 죽이려고 오는 다윗에게 여러 가지 양식과 함께 술을 바치며 그의 분노를 누그러뜨린다(1사무 25,18). 솔로몬은 성전과 왕궁 건립에 필요한 나무를 베는 띠로 기술자들의 급료를 곡식과 기름과 함께 포도주로 지불한다(2역대 2,9). 술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그것이 국제 무역의 주요 품목 가운데 하나였다는 사실도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에제 27,18). 물론 종류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포도주는 사람의 입이 느끼는 네 가지 맛의 요소를 모두 포함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즐기는 기호품이 되는 것이다. 포도주는 그러한 차원을 넘어 영양 섭취에 필요한 음식의 하나이기도 하다. 포도주는 에너지의 빠른 공급원일뿐더러, 피를 만드는 데에 필요한 철분과 생명 유지에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여러 주요 광물질을 함유한다. 그리고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옛날에는 이러한 포도주가 강장제와 치료약으로도 쓰였다(2사무 16,2; 잠언 31,6; 루가 10,34; 1디모 5,23).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중요한 것, 하느님 덕분으로 자기들이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그분께 (도로) 바친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는 매일 바치는 제사를 비롯하여(출애 29,38-42) 온갖 형태의 전례 때에 다른 것들과 함께 술을 신주(神酒) 또는 제주(祭酒)로 바쳤다. 이렇게 술은 인간의 가정, 사회, 그리고 종교 생활에서 큰 구실을 하는 주요 음식이었다. 술에 대한 평가 술은 물과 우유와 함께 인간의 삼대 음료로서(이사 55,1), 어떤 윤리적·종교적 반성이 있기 전, 이미 원시 시대부터 있어 왔다. 그래서 나중에 술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질 때, 그것을 우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평가하였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이사악은 죽기 전에, 하느님께서 땅을 기름지게 하시어 곡식과 술을 풍성히 해주시기를 야곱에게 기원한다(창세 27,18). 이렇게 술은 다른 농축산물과 함께 하느님의 선물로 여겨진다(신명 7,13; 시편 104,5; 호세 2,10). 자기 포도나무 밑에서 그 열매와 거기에서 나오는 술을 즐기는 것은 평화와 행복의 상징이다(2열왕 18,31-32). 그것은 또한 장차 하느님께서 이루실 메시아 왕국의 표징이기도 하다.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고 / 사람마다 제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아 지내리라"(미가 4,3-4). 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술을) 마시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다. 음주 그 자체에 윤리적·종교적으로 처음부터 어떤 부정적 가치 판단이 내포되지 않는다. 그래서 하느님 앞에서도 거리낌없이 술을 마실 수 있었다(출애 24,9-11). 그렇지만 특정한 때에, 또 특정한 사람은 술을 마시지 못한다. 사제는 직무를 수행하러 성전에 가기 전에 술을 마셔서는 안된다(레위 10,9-11). 특히 당시의 주변 종교들에서는 술에 취한 채 매우 관능적인 종교 의식을 거행하였다(이사 28,7-13 참조). 그러나 이스라엘의 성전에서는 취기가 용납될 수 없었다. ’법적’으로 술을 멀리해야 하는 또 다른 사람들은 자신을 하느님께 바친, 또는 선택을 받아 하느님께 봉헌된 나지르인이다. 물론 서원 기간이 끝나면 술을 다시 마실 수 있다(민수 6장). 이스라엘의 한 씨족인 레갑인들도 술을 멀리하였다(예레 35장). 이들은 선택된 백성의 이상적 삶이 옛 조상들의 생활, 곧 포도나무도 포도주도 없는 ’순수한’ 광야 생활로 구현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규정과 관습은 올바른 직무 수행과 이상적 삶에 술이 방해가 됨을 뜻한다. 성서는 술의 부정적인 면을 간과하지 않는다. 포도를 처음으로 가꾸었다는 노아는 술에 취하여 대낮부터 벌거벗은 채 잠든다. 이 사건을 계기로 결국 가나안 땅이 저주를 받게 된다(창세 9,20-25). 처음부터 술에는 위험과 불행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술이나 음주 자체가 아니라 절제 없는 과음이 단죄를 받는다. 특히 잠언은 과음을 집중적으로 경고한다. "술은 빈정꾼, 독주는 소란꾼 / 그것에 취하는 자 모두 지혜롭지 못하다"(20,1. 그리고 21,17; 23,20-21. 29-35 참조). 지도자들에게는 금주도 권고한다. "술을 마시면 법을 잊어버리고 고통받는 모든 이의 권리를 해치게" 되기 때문이다(잠언 31,4-5. 그리고 집회 19,1-3 참조). 사실 예언자들은 백성의 지도층이 술을 과하게 마심으로써 직무를 유기하였다고 통렬히 비난한다(이사 5,11-12; 56,11-12; 아모 6,6 등). 술과 예수님 술에 대한 구약성서의 생각은 신약성서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그런데 신약성서에서 우리의 눈길을 먼저 끄는 것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께서 보이시는 대조적인 입장이다(마태 11,18-19). 요한은 나지르인의 전통에 따라 술을 마시지 않는다(루가 1,15). 예수님께서는 반대로 이런 사람 저런 사람, 특히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과 술자리를 같이하신다. 그분께서는 반대자들이 당신을 "술꾼"이라고 불러도 별로 개의치 않으신 것 같다. 예수님께서는 또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술로 바꾸신다. 혼인에 복을 내리실 뿐만 아니라, 잔치에 사용되는 술의 긍정적인 면을 최대한으로 평가하신 것이다. 예수님과 술의 관계가 절정을 이루는 것이, 미사 때마다 재현되는 최후 만찬 중의 성찬 제정이다(1고린 11,23-26; 마르 14,22-24). 이로써 술은 그리스도교의 중심 전례인 성찬에서 세 가지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우선, 과거에 일어난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전례인 성찬에서 (붉은) 포도주는 그분께서 흘리신 ’새롭고 영원한 계약’의 피를 상징한다. 성찬례는 또 부활하여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인 형제 자매들이, 빵과 포도주의 형태로 자신을 내어주시는 주님과 함께 영적 음식을 나누는 친교의 식탁이다. 그리고 이 전례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이루어질 하느님 나라의 축제에(마태 8,11; 마르 14,25 참조) 대한 희망의 표지로서, 포도주는 그 잔치에서 마실 영원한 기쁨의 술을 가리킨다. 술과 그리스도인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술의 역기능을 무시하신 것은 아니다. 그분께서도 과음을 단죄하신다.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일과 쓸데없는 세상 걱정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루가 21,34). 특히 바오로 사도는 술에 대해 여러 차례 경고한다. 주교를 비롯하여 교회에서 일하는 이들은 술을 즐기지 않아야 하고 과음을 하지 말아야 한다(1디모 3,3.8). 주님을 본받아야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술에 취해서는 안될뿐더러(에페 5,18), 형제를 죄짓게 하는 위험이 있으면 아예 술을 마시지 말아야 한다(로마 14,21). 과음하는 이는 결국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합당한 구성원이 될 수 없다(1고린 5,11-13). "제때에 술을 절제 있게 마시는 사람은 / 마음이 즐거워지고 기분이 유쾌해진다. / 술을 지나치게 마신 자는 기분이 상하고 / 흥분하여 남들과 싸우게 된다"(집회 31,28-29). 술 자체는 인간에게 선물이고 음주 그 자체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성서에서 어떠한 경우에도 용납되지 않는 것은 과음이다. 이에 대한 전형적인 사례가 신명기 21,20에 나온다. 패륜아를 다스리는 최후의 수단으로 부모가 아들을 법정으로 끌고 가, "이 우리 아들은 … 방탕아이고 술꾼입니다." 하고 단죄하는 것이다. 성서에서는 아무도 처음부터 술을 금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음주도 하느님 나라와 형제 자매에 대한 사랑의 대원칙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 "술에 취하고 진탕 먹고 마시며 떠들어대는" 것은 이교인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베드로 전서는 엄하게 경고한다(4,3).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나라(1고린 6,10) 곧 하느님과 이웃을 위하여(로마 14,21) 필요하다면, 일시적이든 항구적이든, 술을 멀리해야 하는 의무를 지닌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누리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 [경향잡지, 2000년 7월호, 임승필 요셉 신부(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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