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세계 : 무화과나무 예수님과 무화과나무 마르코 복음서 11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상한 행동을 하신다. 명확한 이유 없이 ’죄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어 그것을 말라 죽게 만드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백성이 환호하는 가운데, 메시아 임금으로서 영광스럽게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 그리고 저녁이 되자 지방에서 올라온 순례객들이 하는 것처럼 성 밖으로 가시어 밤을 지내신다. 이튿날 아침 다시 성전으로 가시는 길에 시장기를 느끼신다. 그때 사람들은 낮 시간이 거의 다 될 때에 아침 겸 점심을 먹었기 때문에 예수님도 식전이셨던 것이다. 그래서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멀리서 보시고, 그 나무에 열매가 있나 하여 다가가 보신다. 그러나 잎사귀밖에는 아무것도 달려있지 않았다. 복음서 저자는 그 이유를 명백히 밝힌다. "무화과 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그 나무를 향하여, "이제부터 너는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하여 아무도 너에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할 것이다." 하고 저주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철이 되지 않아 열매가 달리지 않은 나무를 왜 저주하시는가? 한마디로 이해할 수 없는 처사이다. 그 동안 이 이야기가 어디에서 유래하였고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에 대해서 학자들이 여러 가지 가설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누구나 수긍할 만한 정설은 없는 형편이다. 한 가지 가능성은 성전과 관련해서 알아듣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성전에서 일어난 두 일화(마르 11,11. 15-19) 사이에 배치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메시아로서 들어가신다. 이 성전이 바로 메시아의 관점에서 볼 때,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와 같다는 해석이다. 예수님께서는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심으로써 옛 계약에 따른 성전의 폐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를 가리키면서 사람들을 가르치기도 하신다(마태 24,32; 마르 13,28; 루가 21,29).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무화과나무 가지가 연해지고 잎이 돋으면 모두 여름이 가까워진 것을 안다. 이렇듯 당신께서 예고하신 표징들이 일어나면, 바로 당신께서 가까이 와 계신 것으로 알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라는 비유로 회개를 촉구하기도 하신다(루가 13,6-9).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결국 잘려나간다. 회개하여 그 회개의 열매를 내놓지 못하는 사람도 이와 같은 운명에 처해질 것이다. 그만큼 회개는 절박하다. 지금이 회개의 마지막 기회라는 것이다. 나타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아 아마도 성서를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던 것 같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나타나엘을 눈여겨보시고 마침내 그를 제자로 삼으신다(요한 2,43-51). 또 키가 작은 자캐오는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한번 보려고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간다.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 가운데에서, 죄인으로 낙인 찍혀 살아가는 이 자캐오를 부르시고 그날 그의 집에서 묵으신다. 무화과나무와 성서의 땅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무화과나무는 이렇게 성서의 땅에서 매우 흔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생활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나무였다. 이집트를 떠난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에, 무화과는 그 땅의 매력을 크게 하는 과일 가운데 하나였다(민수 13,23. 그리고 20,5 참조). 무화과는 또 모세가 약속의 땅의 풍요를 드러내려고 열거하는 산물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신명 8,8). 사실 성서의 땅 팔레스티나에서는 무화과가 포도, 올리브와 함께 가장 중요한 세 가지 과일이었다(판관 9,8-14 참조). 무화과나무는 뽕나무과에 속하는 낙엽 활엽수로 서아시아에서 지중해에 걸쳐 자생한다. 그리고 적당한 수분에다 거름만 조금 주면 돌이 많고 거친 땅에서도 잘 자란다. 그래서 팔레스티나 땅에서는 저절로 자라기도 하고 사람들이 심기도 하여 무화과나무가 매우 많았던 것이다. 때로는 포도밭에도 이 나무를 심었다. 특히 이 경우에는 무화과나무가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 위에서 언급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에서(루가 13,6-9),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내지 못한다고 주인이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봄이 되면서 앙상하게 달려있던 가지가 연해지고 잎이 돋기 시작하기 때문에, 무화과나무는 봄과 여름의 전령과도 같았다(마태 24,32 등). 이 나무는 일년에 두 번 열매를 맺는다. 조생(早生) 무화과는 이미 3월에 열매가 나오기 시작하여 5월말에 익는다. 그래서 6월에 따기 때문에 한 해의 첫 과일로 사람들이 매우 좋아하였다. 만생(晩生) 무화과는 여름 동안 익어서 8월에서 10월 사이에 딴다. 이것이 본디의 무화과이다. 그런데 이 나무는 기후가 따뜻해야 자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과일이 익는 동안에는 비가 조금만 오거나 거의 오지 않아야 맛이 있다. 그래서 이 나무는 팔레스티나에는 매우 적합하지만, 우리 나라처럼 겨울에 춥고 여름에 비가 많이 오는 고장에는 잘 맞지 않다. 무화과는 여러 가지로 쓰인다. 우선 날것으로 먹고 말려서도 먹는다. 과자도 만든다.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바치는 선물에 무화과 과자도 포함된다(1사무 25,18). 이 과자는 종기를 치료하는 데에 쓰인다(2열왕 20,7). 무화과나무는 향기로운 과일만이 아니라, 그 넓은 잎 때문에도(아담과 하와의 첫 옷이 이 잎으로 만들어졌다: 창세 3,7)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 나무가 크지 않으면서도 잎이 넓어 뜨거운 여름 햇살을 시원하게 막아준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그늘에 앉아 쉬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유다교 랍비들은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아 성서 공부하기를 좋아하였던 것 같다(요한 1,48 참조). 자캐오는 예수님을 보려고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간다. 성서의 땅에는 무화과나무와 같은 과에 속한 이 돌무화과나무도 많았다. 그러나 서리에는 약하여(시편 78,47 참조) 주로 지중해변이나 요르단 계곡 같은 저지대에서 자란다. 특히 해안 평야에 군락을 이루기 때문에, ’평원지대의 돌무화과나무만큼이나 많다.’는 속담식의 표현까지 나온다(1열왕 10,27; 2역대 1,15; 9,27). 뿌리가 매우 튼튼한 이 나무는(루가 17,6) 좋은 목재로 쓰이지만, 열매는 작은 무화과 같고 맛도 무화과에 비해 떨어진다. 그리고 열매는 씨방을 미리 칼로 잘라주어야 먹을 수 있다. 아모스 예언자는 본디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었는데(아모 7,14), 이 ’가꾸는’ 일에 칼질이 포함된다. 돌무화나무가 매우 흔하기는 하였지만 천시되지는 않는다. 왕실 재산으로 돌보는 관리인이 임명되기도 하고(1역대 27,28), 열매가 일년에 여러 차례 열리기 때문에 특별히 가난한 이들에게 양식으로 유용하게 쓰이기도 한다. 무화과나무-평화와 행복의 상징 '달콤하고 맛있는 과일'을 내주고(판관 9,11)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는(요한 1,48) 무화과나무가 이렇게 흔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과 가까웠기 때문에, 특별히 구약성서에서는 이 나무와 그 열매가 은유와 상징으로도 자주 쓰인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민족들처럼 자연의 풍요와 다산을 관장하는 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야훼 하느님 홀로 만물을 다스리신다고 믿는다.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풍성히 맺는 것은 오로지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복에 달려있다(요엘 2,22; 하깨 2,19). 무화과나무가 사람들의 식생활에 중요하기 때문에, 예언자들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내리시게 될 벌을 예고할 때에 이 나무도 곧잘 등장시킨다. 예컨대, 예레미야는 "포도나무에 포도가 하나도 없고 /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하나도 없으리라."는 말로써(예레 8,13) 하느님의 백성에게 임박한 재앙을 나타낸다(예레 5,17; 호세 2,12; 요엘 1,7; 아모 4,9도 참조). 풍성하게 열매를 맺은 무화과나무는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복을, 열매가 하나도 달리지 않은 무화과나무는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징벌을 뜻하는 것이다. 무화과도 여느 과일처럼 잘 상한다. 맛이 좋은 무화과가 썩어서 먹지 못하게 되면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죄 많은 동포들에게 재앙을 예고하면서, 하느님께서 그들을 "썩은 무화과처럼" 만들어버리실 것이라고 말한다(예레 29,17). 또 다른 열매와 마찬가지로, 같은 나무에서 나온 무화과도 질이 다를 수 있어서 따로 구분할 필요가 생기기도 한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좋은 무화과와 나쁜 무화과를 분류하듯, 하느님께서 유다인들을 두 부류로 나누신다는 환시를 보기도 한다(예레 24장). 농경 사회에서는 자기가 가꾸는 땅이나 나무 곁에 살면서 그 소출을 마음껏 누리는 것이 바로 평화와 행복 그 자체였다. 옛날 이스라엘에서는 이러한 평화와 행복을 그리는 데에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자주 쓰였다.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은 자기에게 항복하면, "저마다 제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따먹게" 되리라고 예루살렘 사람들을 구슬린다(2열왕 18,31; 이사 36,16). 열왕기 저자는 "사람마다 자기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마음놓고 살았다."라는 말로 솔로몬 시대의 태평성대를 표현한다(1열왕 5,5). 마카베오서 저자도 마카베오 시대의 시몬이 다스릴 때에 백성이 누렸던 평화와 행복을 비슷한 말로 노래한다(1마카 14,12).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러한 삶을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최고의 행복으로 여겼다. 예언자들은 이러한 행복이 하느님께서 이루어주실 ’새 세상’에서도 지속되거나 더욱 완벽한 형태로 재현된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미가는 "사람마다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고 / 제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아 지내리라."고(미가 4,4), 즈가리야는 "그날에… / 너희는 서로 이웃들을 /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초대하리라."고 예고한다(즈가 3,10). [경향잡지, 2000년 10월호, 임승필 요셉 신부(주교회의 성서위원회 번역담당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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