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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문화] 성서의 세계: 눈은 눈으로, 동해형법(同害刑法)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4-11-08 조회수4,903 추천수1

성서의 세계 : “눈은 눈으로!” - 동해형법(同害刑法)

 

 

“눈은 눈으로!” - 복수를 조장하는 법?

 

성서를 모르는 들도 곧잘 사용하는 구절이 출애굽기 21,24-25에 나오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 갚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는 또한 성서에서 오해를 가장 많이 받아온 구절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불행히도 지금까지 서양은 물론 우리 나라에서도 이 구절이 보복을 말하고, 앙갚음을 정당화하고, 복수를 부추긴다고 잘못 생각해 왔다. 이러한 곡해는 우리 나라에서 많이 쓰이는 “동해복수법(同害復讐法)” 또는 “동태(同態)복수법”이라는 이름에서부터 명백히 드러난다. 곧 출애굽기의 이 구절은 남이 자기에게 해를 준 그대로 그에게 해를 입히는 앙갚음에 관한 법규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구절이 출애굽기에서는 개인과 개인, 또는 집단과 집단 사이의 보복이나 복수를 규정하는 법이 아니다. 개인이나 집단 사이의 민사(民事)와 형사(刑事)를 관장하는 사회나 사법 당국이 집행하는 법이다. 그리고 복수나 보복은 사회나 사법 당국이 아니라 개인이 개인에게, 집단이 집단에 가하는 행위이다. 자의적으로 흐를 수 있는 이러한 행위를 원시 사회에서는 몰라도 법이 어느 정도 발달한 사회나 국가에서는 용납하지 않는다. 특히 이스라엘에서는 그러한 행위가 결국은 야훼 하느님의 통치권에 속한다는 사실이 강조된다(신명 32,35: “복수와 보복은 내가 할 일”). 그래서 개인이나 집단이 가하는 ‘복수’나 ‘보복’에 사회나 국가가 집행하는 ‘법’을 덧붙인 ‘복수법’이나 ‘보복법’은 조어(造語)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용어의 부정확성과 부조리 때문에 서양말을 빌려다가 ‘탈리오 법칙/원칙’이라든가 ‘탈리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탈리오(talio)’는 본디 라틴 말에서 ‘이러한, 그러한, 이와 같은, 그와 같은, 동일한, 동등한’ 등을 뜻하는 형용사 ‘탈리스(talis)’에서 유래하는 명사이다.

 

이 ‘탈리오’는 십이동판법(十二銅板法)으로 불리는, 기원전 451년과 449년에 제정된 고대 로마 최초의 성문법의 한 조항에서 처음으로 쓰인다. 어떤 사람이 남의 손이나 발을 부러뜨렸는데 가해자와 피해자가 금전적 배상에 합의하지 못할 경우, ‘탈리오’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곧 가해자도 동일한 해를 입도록 조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라틴 말에서 ‘렉스 탈리오니스(lex talionis)’라고 하는 이 법을 서양에서는 그냥 ‘탈리온(talion)’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동해형법

 

성서에서도 어떤 말을 그것만 따로 떼어놓고 읽으면 오해하기가 쉽다. 우리가 다루는 법규도 바로 그렇게 하였기 때문에 곡해해 온 것이다. 이 법규는 구약성서 세 군데에 나오는데 그곳의 문맥을 살펴보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가 있다.

 

먼저 출애굽기 21,18-36에서는 전체적으로 상해(傷害) 문제를 다룬다. 그 가운데에서 두 남정네가 싸우다가 임신한 여자와 부딪쳤을 경우와 관련하여 이 법규가 제시된다. 그 여자가 유산만 하고 다른 해가 없으면 가해자는 피해자의 남편이 요구하는 대로 벌금형을 받는다. 그리고 벌금은 직접 피해자 쪽에 주는 것이 아니라 “재판관을 통해서” 지불한다. 그러나 다른 해가 뒤따를 경우에는, “목숨은 목숨으로 갚아야 하고,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출애 21,22-25).

 

구약성서 세 군데에서 가장 세세히 표현된 이 법규는, 피해자가 당한 것과 똑같은 해를 재판관의 관장 아래 가해자에게 가할 것을 명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규정은 단순히 피해자 쪽에서 가해자 쪽에 개인적인 차원으로 가하는 복수나 보복이 아니다. 그래서 이 법규는 동일한 해를 형벌로 가한다는 뜻에서 ‘동해복수법’보다는 ‘동해형법(同害刑法)’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가해자에게 같은 해를 입히는 것과 벌금형을 가하는 것의 선후 관계이다. 어떤 면에서는 원시적이라고 볼 수 있는 동해형법을 벌금형으로 대체한 것인지, 상해 사건을 민사적인 벌금형으로 종결짓다가 사회나 국가가 그 구성원들의 전반적인 안전과 복리를 고려하여 형사적으로 처리하기 시작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출애굽기의 다음 규정은 동해형법이 넓은 의미로 적용되었음을 보여준다. 곧 어떤 사람이 자기 종을 때려 눈을 상하게 하거나 이를 부러뜨렸을 경우, 자기 눈이나 이로 갚는 것이 아니라, 그 종을 자유의 몸으로 내보내야 한다(21,26-27). 적어도 출애굽기가 저술될 당시에는, 이 법이 말 그대로 실행되는 면도 있었지만 하나의 원칙으로도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규정을 가해자에게 동일한 해를 가함으로써 법적 정의를 구현한다는 ‘동해원칙(同害原則)’이나 ‘탈리오 원칙’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동해형법이 두번째로 나오는 레위기 24,17-21도 출애굽기와 문맥이 같다. “동족에게 상해를 입힌 사람은 자기가 한 대로 되받아야 한다. 골절은 골절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는다”(19-20절). 그런데 이 앞뒤로, 남의 짐승을 죽인 경우와 함께 살인의 경우도 언급된다. “사람을 때려죽인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 곧 “목숨은 목숨으로 갚는다”는 것이다(17-18절과 21절. 그리고 창세 9,6; 출애 21,12도 참조). 그래서 동해형법에 살인의 경우도 포함되느냐, 아니면 단순한 상해의 경우만 해당되느냐 하는 논란이 계속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신명 19,15-21에서는 동해형법이 거짓 증언이라는 특별한 경우에 적용된다. 어떤 증인의 말이 거짓으로 판명될 경우, 그는 자기의 거짓말로 남에게 가하려던 벌을 자신이 그대로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동해형법은 구약성서만이 아니라 고대 근동의 다른 곳, 특히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문 법전인 함무라비 법전에도 나온다. 그러나 크게 두 가지 다른 점이 있다.

 

첫째, 함무라비 법전에서는 이른바 대속(代贖)이 가능하다. 예컨대 남의 아들을 죽였을 때에 자기 아들이 대신 벌을 받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서에서는 “자식 때문에 아버지가 사형을 당해서도 안되고, 아버지 때문에 자식이 사형을 당해서도 안된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죄로만 사형을 당해야 한다”(신명 24,16).

 

둘째, 함무라비 법전에서는 동해형법이 같은 계급에 속한 사람들 사이에서만 집행되고 피해자가 하층 계급일 때에는 벌금으로 해결을 볼 수 있다. 성서에는 이러한 신분 차별이 용납되지 않는다. 이방인에게도 본토인과 마찬가지로 한 가지 법이 적용될 뿐이다(레위 24,22).

 

 

동해형법의 폐기와 극복

 

좁은 의미의 동해형법은 피해자가 입은 것과 똑같은 벌을 가해자에게 가하는 것이다. 그래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 갚아야 한다.” 그러나 이 법을 말 그대로 실행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같은 눈이라도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작은 눈이 있는가 하면 큰 눈이 있고, 좋은 눈이 있는가 하면 나쁜 눈도 있고 전혀 보지 못하는 눈도 있다.

 

좋은 눈을 가진 사람이 앞을 잘 보지 못하는 눈을 가진 사람의 눈을 상하게 하였을 경우나, 한쪽 팔만 있는 가해자의 팔을 잘라야 할 경우에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손을 자르는 벌을 받았는데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피를 많이 흘려 생명이 위태롭게 될 수도 있고, 병약한 가해자가 동해형법에 따라 벌을 받았을 경우 전체적으로 볼 때에 몸이 튼튼한 피해자가 입은 것보다 더 큰 해를 입을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동해형법은 형식적으로만 지키는 것이 되고 만다.

 

이러한 연유로 유다교의 랍비들은 마침내 좁은 의미의 동해형법을 폐기하기에 이른다. 그 대신에 금전적으로 배상하게 한다. 재정적 손실이 일어나지 않았을 경우에는 매질을 하는 태형으로 바꾼다.

 

마태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동해형법을 직접 인용하시면서 그것을 폐기하신다(마태 5,38-42.43-48; 루가 6,27-36). 그렇다고 수동적으로 악이나 범죄에 굴복하거나 그러한 것들을 용납하라는 말씀은 아니다. 동해형법의 바탕을 이루는 것보다 더욱 숭고한 정신으로 그것을 극복하고 승화해 나아가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시하시는 정신은 곧 원수까지 포함한 모든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물론 동해형법의 집행자가 사회 또는 국가임에 반해서, 예수님 말씀의 일차적 실행자는 그분을 믿는 이들 개개인이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개개인이 모여 사회와 국가를 이룬다. 그래서 범죄인을 개인적으로 상대할 때이든, 국가에서 그에게 사법적으로 형을 집행할 때이든 결국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 그 바탕을 이루어야 한다. 그래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인간적인 사회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경향잡지, 2001년 11월호, 임승필 요셉 신부(주교회의 성서위원회 번역담당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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