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세계 : 사제 (1) ‘사제’의 여러 이름 구약성서의 히브리 말에서는 사제를 ‘코헨’이라고 한다. 이 밖에 ‘코메르’라는 낱말이 있기는 하지만, 우상을 숭배하는 사제들이라는 특별히 멸시적인 뜻으로만 쓰이는 데다가 구약성서 전체에서 딱 세 번밖에 나오지 않는다(2열왕 23,5; 호세 10,5; 스바 1,4). ‘코헨’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신 야훼님을 섬기는 사제만이 아니라, 이집트라든가 페니키아와 같은 외국의 사제들(창세 41,45; 2열왕 10,19), 심지어는 이스라엘 땅의 대표적인 우상으로 하느님의 백성을 줄곧 유혹하던 바알을 섬기는 사제에게까지(2열왕 11,18) 아무런 구분 없이 쓰였다. 이 ‘코헨’이라는 용어의 원래 의미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많은 학자들은 ‘코헨’이 ‘서다’를 뜻하는 히브리 말 동사 ‘쿤’에서 나왔다고 본다. 사제는 하느님 앞에 서있는 사람(신명 10,8), 곧 백성을 대신하여 하느님의 시중을 들려고 그분 앞에서 대기하고 서있는 종이라는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허리를 굽혀 절하다, 경배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아카드 말 ‘카누’에서 유래한다고 판단한다. 사제는 본디 백성의 이름으로 신이나 하느님 앞에 몸을 굽혀 경배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학자들은 ‘코헨’을 ‘번영’을 뜻하는 시리아 말의 어떤 어근과 관련짓는다. 이 경우, 사제는 사람들에게 축복하여 번영을 가져다주는 사람이 된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설명은 다 가설일 뿐 확실하지 않다. 구약성서 일부와 신약성서 전체가 쓰인 그리스 말에서는 사제를 ‘히에레우스’라고 하는데, 이는 ‘거룩하다’를 뜻하는 ‘히에로스’에서 나온 것이다. 사제는 곧 거룩함과 관련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천 수백 년 동안 교회 공용어로 쓰였던 라틴 말에서는 사제를 ‘사체르도스’라고 부른다. 이 낱말은 그리스 말에서처럼 ‘거룩하다’를 뜻하는 ‘사체르’에 ‘만들다’의 의미를 지닌 어근이 덧붙여진 합성어이다. 사제는 곧 (사람 또는 사물을) 거룩하게 만드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현대 서양말에서는 ‘원로, 장로’를 뜻하는 그리스 말 ‘프레스뷔테로스’와 라틴 말 ‘프레스비테르’를 소리에 따라 옮긴 낱말을 많이 사용한다. 그래서 예컨대 영어에서는 priest, 불어에서는 pretre, 독일어에서는 Priester, 이탈리아어에서는 prete라고 한다. 사제는 신자 공동체의 ‘원로’ 곧 신자 공동체를 이끄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한자를 쓰는 중국과 한국과 일본에서는 성서의 사제를 가리키는 데에 크게 네 가지 용어가 사용된다. 곧 제사(祭司), 사제(司祭), 제사장(祭司長), 제관(祭官)이다. 중국과 일 본에서는 제전(祭奠)을 맡아보는 사람을 뜻하는 ‘제사’ 또는 그 말의 순서를 바꾼 ‘사제’가 주로 쓰인다. 우리 나라 개신교에서는 본디부터 있던 한자말 제사(祭司)에다, 아마도 제사(祭祀)와의 혼동을 피하려고, ‘어른 장(長)’을 붙여 ‘제사장’이라고 한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원칙적으로 ‘사제’라고 하는데, ‘제사장’과 ‘제관’도 각각 한 번씩 쓴 것을 볼 수 있다(2열왕 10,11; 1마카 14,28). 「200주년 신약성서」에서는 제사를 맡은 벼슬아치를 뜻하는 ‘제관(祭官)’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맡을 사(司)’에도 벼슬이나 관리의 뜻이 들어있기 때문에, 제관도 제사나 사제와 큰 차이는 없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한자권의 이 명칭들에 따르면, 성서의 사제들은 제사(祭祀)를 주관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성서의 사제들은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린다. 이는 사제들의 직무가 다양함을 뜻하는 것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달에 말하기로 하고, 우선은 구약성서의 옛 이야기를 바탕으로 어떤 사람이 사제로 봉직하였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아들 사제와 레위인 사제 지금으로부터 삼천여 년 전, ‘판관 시대’라고 불리던 때이다(판관 17장). 기원전 6세기 유배 이후, 과거의 왕정에 호의적인 사람으로서 판관기를 편집한 이의 관점에서 보면, 상당히 무질서한 시대였다. 이 편집자는 이러한 설명을 덧붙인다. “그 시대에는 이스라엘에 임금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 제 눈에 옳게 보이는 대로 하였다”(판관 17,6). 그때 에브라임 산악 지방에 미가라는 사람이 살았다. 그에게는 신당이 하나 있었는데 큰돈을 들여 그것을 꾸미고서는 자기 아들을 사제로 앉힌다. 그뒤에 한 나그네가 찾아드는데 레위 지파 사람이었다. 미가는 그에게 의식주를 해결해 주고 봉급도 주겠다고 하면서, “나의 아버지요 사제가 되어주시오.” 하고 제안한다(17,10). 자기에게는 아들뻘이 되고 또 실생활에서는 아들처럼 지내게 되지만(17,11), 자기를 위하여 또 자기의 이름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직을 존경하는 뜻에서 그를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그 레위인이 제안을 받아들이자 미가는 속으로, “레위인이 내 사제가 되었으니, 주님께서 틀림없이 나에게 잘해주실 것이다.” 하고 생각한다(17,13). 이제 사제가 정식으로 직무를 수행하게 되면 하느님께서도 그에 걸맞은 복을 내려주시리라고 기대한 것이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가운데 하나인 단 지파가 아직도 자기들이 살 땅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판관 18장). 마침내 팔레스티나 북쪽에 있는 한 지역을 찾아내고서는 큰 무리를 지어 그곳으로 이동한다. 그들에게는 성소(聖所)가 없었기 때문에 자연히 사제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살 곳에 성소를 마련할 생각으로 미가 집의 레위인에게 자기들의 사제가 되어달라고 청한다. 그 레위 지파 사람은 한 집안의 사제보다는 이스라엘 한 지파의 사제가 되는 것이 좋지 않느냐는 말에 귀가 솔깃하여 그들을 따라나선다(18,19-20). 성소에 봉직하는 세습 사제 판관 시대는 사제직과 관련해서 과도기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에서는 본디 가장이나 씨족장이 사제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야곱도 사제의 도움 없이 혼자 하느님께 제물을 바친다(창세 22,13; 31,54). 당시에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유목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제단을 만들기도 하였다. 판관 시대에 삼손의 아버지도 그 동네에서 제단으로 쓰이던 바위 위에서 직접 제사를 지낸다(판관 13,19).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인구가 늘어나고 사회가 다양해지면서 점차 사제라는 전문직이 필요함을 느끼게 된다. 그 배경에는,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깊이 자각하면서 특별히 종교적인 일에 봉헌된 사람들만이 하느님께서 즐겨 받으시는 제물을 바칠 수 있다는 생각이 깔려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제직에 특정된 이들이 바로 레위 지파이다. 왜 레위인들이 이러한 특권을 받았느냐는 것에 관해서 모세 오경은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는,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 하나인 레위의 자손들이 보여준 하느님께 대한 열성이다(탈출 32,25-29; 민수 25,6-13). 둘째는, 이스라엘인들의 맏아들은 모두 하느님의 소유가 되는데, 하느님께서는 그들 대신에 레위인들을 선택하셨다는 것이다(민수 3,11-13). 이들은 다른 지파들과 달리 여기저기 흩어져 살면서 필요에 따라 사제직을 수행하였다. 이렇게 하여 세월이 흐르면서 레위인들만 사제직을 수행하게 된다. 이스라엘에서 사제는 세습직이었다. 여기에서 사제와 예언자의 근본적인 차이가 드러난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 그분께서 필요로 하실 때에만 예언직을 수행한다. 반면에 사제는 혈통으로 이미 사제직에 대한 권리를 물려받는다. 레위인이라고 해서 전부 사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정신적으로는 물론 (당시의 사고방식에 따라) 육체적으로도 결함이 없어야 할 뿐만 아니라, 혼인과 가정생활에서도 정해진 규정에 따라 깨끗함과 거룩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레위 21장). 성서에는 구체적인 이야기가 전해지지 않지만, 사제직을 수행하기 위한 특별 교육도 틀림없이 상당 기간 받았을 것이다. 미가 이야기에서 나타나듯이 이스라엘의 사제는 신당이나 성소 또는 성전에서만 직무를 수행하였다(참고로, 미가의 집에 있던 것처럼 특수한 것은 신당, 일반적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곳은 성소, 그리고 예루살렘의 성소는 특히 성전이라고 부른다). 사제는 성소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사무엘의 스승 엘리의 경우처럼 보통 한 집안에서 성소 하나를 맡았다(1사무 1―2장).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하였을 때는 엘리의 후손인 에비아달, 그리고 사독이 공동으로 사제직을 수행한다(2사무 19,12). 솔로몬 시대에 가서는 사독이 왕립 또는 국립 성소인 예루살렘 성전의 사제직을 독차지하게 된다(1열왕 2,35). 그뒤에 유다의 요시야 임금이 지방 성소들을 폐쇄하고 모든 경신례를 예루살렘 성전으로 집중시킴에 따라(2열왕 23,4-20), 사독 집안 사제들이 더욱 큰 비중을 차지하고 중요성을 지니게 된다. 마침내 기원전 6세기 후반부 유배 이후, 사제는 모두 사독 가문 사람이었다. 이 집안사람이 아닌 다른 레위 지파 사람들은 그냥 레위인이라고 불리면서 사제직이 아닌 하위 직무만 수행하였다. 사제들은 이렇게 성소에서만 직무를 수행하였기 때문에 성소와 운명을 함께한다.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때에 수많은 사제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간다. 그리고 기원 후 70년에 성전이 다시 로마 군대의 손에 허물어지자 구약성서에 기초한 사제들은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유다교는 새로운 형태를 취하게 된다. [경향잡지, 2002년 9월호, 임승필 요셉 신부(주교회의 성서위원회 번역담당 총무)] 성서의 세계 : 사제 (2) 사제와 하느님에 대한 열정 모세는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끌고 험악한 사막을 가로질러 마침내 약속의 땅 어귀에 다다른다. 그리고 주님의 명에 따라 가나안이 내려다보이는 느보 산 위에 올라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하나씩 거명하면서 그들에게 축복한다. 레위 지파에 관한 축복에서 그는 이 지파가 어떻게 해서 사제직에 선택되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는지, 레위인들이 사제로서 수행하는 근본적인 직무가 무엇인지 밝힌다(신명 33장).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레위인들의 행위가 너무 폭력적인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탈출 32,25-29), 그들은 하느님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굳센 믿음과 뜨거운 열정을 품고 있음을 보여준다. 모세는 이렇게 말한다. “그(=레위인)는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두고 ‘나는 그를 본 적이 없다.’ 하고 말하며 자기 형제를 외면하고 자기 아들들을 아는 체하지 않았습니다. 정녕 그들은 당신(=하느님)의 말씀을 지키고 당신의 계약을 준수하였습니다”(신명 33,9). 하느님의 말씀,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맺어주신 계약, 그리고 하느님 자신을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또 그 누구보다도 더 중시하고 더 사랑하였기에, 그들은 백성의 이름으로 또 백성을 위하여 하느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섬기는 사제직을 맡게 된 것이다. 레위인 사제들의 근본 직무를 모세는 크게 세 가지로 이야기한다. “당신께 충실한 이에게 당신의 둠밈과 당신의 우림을 주십시오. 그들은 당신의 법규들을 야곱에게 가르치고 당신의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칩니다. 당신 앞에 향을 피워 올리고 당신 제단에서 번제물을 바칩니다”(신명 33,8.10). 사제는 ‘우림과 둠밈’을 관리하는 사람 곧 하느님 뜻의 중개자이고, 율법의 교육자이고, 제단의 봉사자이다. 하느님 뜻의 중개자 다윗이 왕위에 오르기 전, 떠돌이 생활을 할 때에 아말렉이라는 족속이 쳐들어와 어떤 고을 사람들을 모조리 끌고 가버린 적이 있다. 그러자 다윗이 자기와 함께 있는 사제에게 에봇을 가져오게 하여, 약탈자들을 추격해야 할지 여부를 묻는다. 하느님께서는 쫓아가라는 답을 내리신다(1사무 30,7-8). 지난 8월호에 살펴본 것처럼, 사제의 첫째 직무 가운데 하나가 바로 신성한 제비라고 할 수 있는 에봇 또는 우림과 둠밈을 가지고 하느님의 뜻을 가르쳐주는 일이다. 사제의 개인적인 감정이나 주관적인 판단을 배제하고자 이러한 도구를 이용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다윗 시대 이후에는 에봇이나 우림과 둠밈을 사용하였다는 구체적인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이는 예언자들의 활동이 점점 활발해짐과 더불어 예언자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묻게 된 때문이라고 추측된다(1열왕 22,5-6; 2열왕 22,3-20 등 참조). 그렇다고 사제의 이 직무가 완전히 폐지된 것은 아닌 것 같다. 이사악의 아내 리브가가 쌍둥이를 배었는데 아기들이 뱃속에서 서로 부딪쳐대자, 무슨 일인가 하고 “주님께 여쭈어보러 갔다”(창세 25,22). 성소로 사제를 찾아갔다는 뜻이다. 이는 리브가 시대보다는 훨씬 후대로 내려와서 창세기가 쓰이던 때의 관습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인들은 여러 가지 사정과 관련하여 성소에 가서 하느님의 뜻을 물었던 것이다. 이때에 사제들이 하느님의 뜻을 중개해 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신자들이 제물과 예물을 바치러 왔을 때, 지금으로서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사제들은 계속해서 삶의 다양한 질문에 대해 아마도 엄격한 방식에 따라 하느님의 뜻을 알려주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도 이스라엘인들의 하느님 중심사상을 드러낸다. 그들에게는 하느님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하였고, 삶의 모든 면에서 그분의 뜻을 추구하고 실행하려고 애썼다. 율법의 교육자 하느님의 백성이 삶의 다양한 상황과 환경 속에서 실천해야 하는 하느님의 뜻을 인간의 글자로 고정시킨 것이 율법이다. 사제들은 이러한 율법을 책임진 사람이다. 율법에 해당하는 히브리 말은 ‘토라’인데, 이 낱말은 ‘가르치다, 교육하다’를 뜻하는 동사에서 나온 명사이다. 율법은 근본적으로 가르침이고, 사제는 가르치는 사람이기도 하다. 비록 부정적인 문맥이기는 하지만 미가 3,11이 이러한 사실을 명백히 드러낸다. “그(=예루살렘) 우두머리들은 뇌물을 받아 판결을 내리고 / 사제들은 값을 받아 가르치며 / 예언자들은 돈을 받고 점을 친다.” 곧 제후는 법정을, 사제는 토라를, 예언자는 말씀을 책임진다는 것이다(사제와 함께 현인 또는 원로들의 역할을 밝히는 예레 18,18; 에제 7,26도 참조). 사제들은 율법을 바탕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활에 매우 중요한 성(聖)과 속(俗)이나 정(淨)과 부정(不淨), 그리고 전례에 관한 것, 곧 형식적이고 개별적인 것만 가르치지 않는다(레위 10,10-11; 에제 44,23; 하깨 2,11-14; 즈가 7,3). 율법은 하느님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고, 이 관계는 결국 인간 각자의 내면과 직결된다. 사제는 곧 신앙과 윤리의 스승이었던 것이다. 말라기 예언서는 사제직의 참된 모습을 이렇게 노래한다. “사제의 입술은 지식을 간직하고 / 사람들은 그의 입에서 법을 찾으니 / 그가 만군의 주님의 사자(使者)이기 때문이다”(말라 2,7). 기원전 6세기의 유배 이후에는 사제의 이 직무가 줄어들게 된다. 본연의 사제직을 수행하지 못하게 된 레위인들이 이 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복음서에서도 잘 볼 수 있듯이, 평신도 출신 율법학자들이 율법의 해석과 교육에서 사제와 레위인보다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제단의 봉사자 성소나 성전에서 거행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사람들이 공동으로나 개인으로 하느님께 제물과 예물을 바치는 것이었다. 사제들은 바로 이 일을 전담하게 된다. 다른 이들은 제단에 오를 수가 없었다. 그것은 사제들만의 특권이었다(1사무 2,28; 2열왕 23,9 참조). 그들은 말 그대로 ‘제단의 일꾼’이었던 것이다. 지난달에 살펴본 대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처음부터 사제 계급이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제가 없던 옛날에는 족장이나 가장이 직접 제단을 만들고 제사를 지냈다(창세 22,13; 31,54; 판관 6,25-26; 13,19). 그리고 다윗이나 솔로몬 같은 임금도 특별한 경우에 직접 전례를 거행하기도 하였다(2사무 6,17; 1열왕 8,62-64). 그러다가 성스러운 제단에서 거룩한 제물과 예물을 바치는 것은 특별히 이 일에 선택된 사제들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굳어진다. 하느님의 뜻을 중개하는 직무와 율법을 가르치는 직무가 없어지거나 줄어들면서, 이 제단 봉사가 사제 본연의 직분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된다. 백성의 이름으로, 백성을 위하여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는 일은 백성에게 축복하는 일로 이어진다. 물론 가장이 자녀들에게(창세 27,27; 49,28), 임금이 백성에게 축복하기도 하였다(2사무 6,18; 1열왕 8,14). 그러나 사제들은 하느님과의 만남의 특권적 장소인 성전에서 그분을 섬기는 전례와 관련하여,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그분의 복을 전해준다(민수 6,22-27). 성전의 관리자 레위의 축복(신명 33,8-11)에는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았지만 구약성서의 많은 본문이 직간접적으로 밝히는 사제들의 직무가 또 하나 있다. 성소를 관리하는 일이다. 사제들은 성소의 사람이다. 그들은 성소 안에서 자기들의 직무를 수행할 뿐만 아니라, 성소 건물과 그 안에 있는 거룩한 기물들이 손상되거나 훼손되지 않도록 보호하고 관리하는 임무를 갖는다(민수 1,53; 3,28.32). 사제는 ‘성소지기’였다. 성소를 관리해야 하기 때문에 사제들은 성소를 떠나서는 안된다. 민수기에 따르면, 이스라엘인들이 사막을 횡단할 때 성막 둘레에는 레위인들이 진을 치고(민수 1,53), 성막 앞에는 모세, 그리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 곧 이스라엘의 자손들을 대신하여 성소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사제들이 진을 쳤다(민수 3,38). 이 이야기는 사제들이 성소를 지키는 임무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성소와 떨어져서는 사제들을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도 드러낸다. 이렇게 구약성서의 사제들은 성소 또는 성전을 관리하면서,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백성에게 알리고 율법을 가르치고 제사를 지냈다. 그에 따라 사제들은 결국, 나중에 이스라엘 땅의 유일한 성소가 된 예루살렘 성전과 운명을 같이한다. 곧 기원 후 70년에 성전이 완전히 파괴되면서 옛 계약의 사제들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경향잡지, 2002년 10월호, 임승필 요셉 신부(주교회의 성서위원회 번역담당 총무)] 성서의 세계 : 사제 (3) 예수님과 구약의 사제들 예수님께서는 나병을 앓는 이를 고쳐주시고 나서 그에게 이런 분부를 하신다. 사제에게 가서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대로 몸이 깨끗해진 것에 대한 예물을 바치라는 것이다(루가 5,14; 마태 8,4). 옛날 유다인들은 나병과 같은 악성 피부병을 매우 부정(不淨)한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이런 병에 걸려 ‘더럽게’ 된 이들은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다. 부정한 몸으로 지극히 거룩하시고 깨끗하신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정과 관련된 일은 사제들의 소관이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제에게 가서 부정한 나병이 없어졌다는 판정을 받고 정해진 정결례(淨潔禮)를 바치라고 분부하신 것이다(레위 14,1-32 참조). 예수님께서는 여느 유다인과 마찬가지로 당시 사제들의 권리와 권한을 인정하셨다. 다른 사람들처럼 성전에 가서 사제들이 거행하는 의식에도 참석하셨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뒤에 그리스도교는 점진적으로 유다교와 결별하게 된다. 그렇게 완전히 갈라질 때까지는, 사도들을 비롯한 제자들과 그분을 믿는 신자들도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성전에 다녔다(사도 3,1).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이들 가운데에는 유다교 사제들도 적지 않았다(사도 6,7). 이러한 사실은 사도들과 신자들이 구약의 사제들에게 아무런 반감이나 악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예수님과 구약의 사제들 사이에 긴장이 일어나고 그러한 갈등이 급기야는 예수님을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실 것이라고 예고하신다(마태 16,21; 마르 8,31; 루가 9,22 등). 사실 대사제를 중심으로 한 수석 사제들은 다른 지도층 인사들과 함께, 예수님을 붙잡아 죽이려고 공모한다(마태 26,3-4; 요한 19,47-53). 유다 이스가리옷은 이러한 수석 사제들에게 가서 스승님을 팔아넘긴다(마태 26,14-16). 예수님께서는 결국 최고의회에서 재판을 받으시는데, 그때에 대사제가 결정적 역할을 한다(마태 57,57-66). 예수님에 대한 이러한 박해는 사도들과 예수님의 교회에 대한 박해로 이어진다(사도 4,6; 5,17).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을 잡아 제거하는 데에 혈안이 된 바오로는 다마스쿠스의 신자들을 체포하는 권한을 대사제에게서 받는다(사도 9,1). 예수님과 그리스도교와 이렇게 갈등을 일으킨 이들은 본연의 직무를 수행하는 일반 사제들이 아니라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는 대사제와 대사제가 배출되는 가문의 수석 사제들이다.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던 당시 유다의 최상위 통치 기관은 최고의회였는데, 이 의회는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과 율법학자들로 구성되었고 대사제가 의장이었다. 예수 그리스도 - 우리의 새 대사제 예수님께서는 사제직과는 전혀 관련 없이 일을 하셨다. 그분의 활동은 오히려 외형적이고 형식적인 믿음, 또 그러한 믿음의 중심인 성전과 그러한 성전에서 봉직하는 사제들을 통렬히 비판하였던 예언자들의 전통을 계속하시는 것이었다(마태 11,46; 루가 7,16; 요한 6,14). 예수님께서는 호세아 예언자에 이어, “내(= 하느님)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이다.”라는 사실을 강조하신다(마태 9,13; 12,7). 예수님의 재판 때에는 사제들의 터전인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사람 손으로 짓지 않은 새로운 성전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이 문제가 되기도 한다(마태 26,61; 마르 14,58).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는 요한 복음서의 말씀 역시(요한 4,21),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분에 따른 신앙생활이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건축물을 결정적으로 넘어선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옛 계약의 기득권자들인 대사제와 수석 사제들은 예수님에게서 시작되는 이러한 큰 흐름이 자기들을 위협한다고 여긴다. 그래서 자기들의 정치권력을 이용하여 그 흐름을 차단하려고 예수님을 죽이고 그분의 교회를 박해하였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예수님에게서 흘러나오는 새로운 형태의 믿음과 함께 새 사제직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이의 몸값으로 당신의 목숨을 바치러 이 세상에 오셨다고 밝히신다(마태 20,28; 마르 10,45; 1디모 2,6). 최후의 만찬 때에는 포도주 잔을 들어, “이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이다.” 하고 말씀하신다(마태 26,28). 이 말씀에 따라 그 다음날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며 돌아가신다. “내 계약의 피”라는 말은 옛날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계약을 맺을 때에 중심 요소로 작용하였던 제물과 그 피를 가리킨다(탈출 24,4-8). 예수님께서는 옛 계약을 완전히 갱신하신다. 예언자들이 예고한 새 계약을 성사시키신다(예레 31,31-34). 예수님께서는 또 “내 계약”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당신께서 옛 계약의 중개자인 모세와 비교할 수 없이 드높은 분이시며, 당신의 완전한 주도 아래 바로 당신의 몸으로 새 계약을 제정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제물이 되셨다. 바오로는 이러한 예수님을 “우리의 과월절 양”이라고 부른다(1고린 5,7). 새로운 해방을 가져오는 희생제물이시라는 것이다. 또 하느님께서 “속죄의 제물”로 내세우신 분이라고 한다(로마 3,25). “속죄의 제물”은 구약의 대사제가 일 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 자기와 온 백성의 죄에 대한 용서를 청하려고 속죄일에 바치는 제물을 가리킨다. 속죄일에 대사제가 거행하는 의식이 구약 사제 직분의 정점을 이룬다. 대사제가 해마다 매우 불완전하게밖에 이룰 수 없던 속죄를, 예수님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또 영원히 유효하게 이루신 것이다. 예수님은 새 계약의 제물이시다. 그리고 히브리서가 길게 설명하는 것처럼, 옛 계약의 대사제와는 비할 데 없이 존귀하신 새 대사제이시다. 하느님 복음의 사제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처럼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도 사제로서, 자신을 제물로 바치신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한다. 그래서 바오로는 신자들에게 권고한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 12,1).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짐승을 잡아 제물로 바쳤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새 계약에 따라 하느님께 나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처럼 하느님을 위하여, 또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을 봉헌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그분의 사제직에도 동참하게 된다. 그래서 베드로 1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도 (주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아있는 돌로서 영적 집을 짓는 데에 쓰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느님 마음에 드는 영적 제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치는 거룩한 사제단이 되십시오”(2,5). 또 출애굽기 19장 5절에서 6절을 바탕으로, 신자들은 “선택된 겨레이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고 밝힌다(2,9). 끝으로 요한 묵시록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을 “하느님을 위한 사제”라 부른다(1,6). 물론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동참한다고 해서 각 신자가 사제라는 말은 아니다. 베드로 1서의 저자가 말하는 대로, 그리스도인들 전체가 모여 돌로 된 성전이 아니라 “영적 집” 곧 교회를 이루고, 개인으로가 아니라 집단적인 방식으로 사제직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신약성서에서는 아무도 새 계약의 사제라고 직접 불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움직임은 이미 신약성서에서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다. “새 계약”에도 “일꾼”들이 필요하다. 물론 자기가 원한다고 해서 나설 수는 없다. 하느님께서 뽑으시어 당신의 은총으로 자격을 부여하셔야 한다(2고린 3,5-6). 이러한 일꾼들이 특히 “원로(그리스 말: 프레스뷔테로스)” 또는 “감독(에피스코포스)”이라고 불린다(사도 14,23; 1디모 5,17와 필립 1,1; 1디모 3,1 등). 이들이 공동체를 이끌며(1베드 5,1) 신자들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직무를 수행한다(1디모 5,17). 신자 가운데 누가 아프면 원로들이 찾아가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발라준다(야고 5,14). 그리고 신약성서에서는 직접 언급되지 않지만, 바로 이들이 세례도 베풀고 성찬례도 주관하였을 것이다. 이들을 구약성서에서처럼 “사제(그리스 말: 히에레우스)”라고 부르지 않는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곧 새 계약의 일꾼들을 옛 계약의 일꾼들과 구별하고 그들의 직분을 구분하여, 새 계약의 일꾼들을 옛 계약의 일꾼들과 같은 의미로 알아듣는 것을 처음부터 배제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의 대사제와는 비할 데 없이 존귀하신, 전혀 새로운 의미의 대사제이시라는 점이 확립된 다음에야, 오해의 여지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사제”라는 구약성서의 용어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이 일은 신약성서 이후 교부 시대에 와서야 이루어진다. 곧 ‘원로’는 사제(라틴 말: sacerdos)라는 의미로, ‘감독(episcopus)’은 양 떼를 돌보는 목자(사도 20,28 참조) 곧 한 지역 교회를 책임지는 ‘주교’라는 의미로 쓰이게 된다. 이들을 바오로가 로마서 15장 16절에서 쓰는 표현을 빌려 ‘하느님 복음의 사제’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경향잡지, 2002년 11월호, 임승필 요셉 신부(주교회의 성서위원회 번역담당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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