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의 동식물] 21- 가난한 사람들의 식량인 보리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생소한 단어지만 보릿고개라는 말이 있다. 햇보리가 나올 때까지 넘기 힘든 고개라는 뜻으로, 지난해 가을 수확한 묵은 곡식은 다 떨어지고 보리는 아직 여물지 않아 농촌 식량 사정이 가장 어려운 때를 비유로 이르는 말이다. 이솝우화에 보리 한 알에 욕심을 내다가 덫에 걸린 종달새 이야기가 있다. 종달새는 이렇게 탄식했다. "나는 그 누구에게서도 금과 은처럼 귀중한 것을 하나도 훔친 일이 없다. 한갓 작은 보리 알갱이 하나로 목숨을 잃게 됐으니 나는 얼마나 운이 없고 불쌍한 새인가." 아주 하찮은 이익을 위해 크나큰 위험을 저지르는 사람에게 교훈을 주는 이야기다. 보리는 일반적으로 값싸고 하찮은 가치 없는 것을 비유할 때 곧 잘 사용한다. 밀, 벼, 옥수수와 함께 세계 4대 식량작물에 속하는 보리는 맥류 중에서도 생육기간이 가장 짧아 여름이 짧은 곳에서도 재배가 가능하며 온대, 아열대 지역에서 널리 재배한다. 구석기 유적에서도 발견되고 있다니 보리 재배 역사가 오래됐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보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밀 다음가는 주요 식량자원이다. 밀에 비해 값이 싸서 중동지역에서는 지금도 가난한 사람들의 주된 식량으로 이용된다. 우리나라도 쌀이 귀한 1970년대에 쌀과 보리를 반반씩 섞어 먹자는 혼식운동을 펼쳤다. 성경에서도 보리는 가난의 상징으로 쓰였다. 미디안족이 가난하고 겸손한 기드온을 업신여겨 보리빵으로 비유하는 대목이 나온다.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들이 몰려와서 이스라엘을 공격하려고 골짜기에 진을 쳤다. 기드온은 하느님이 이르신 대로 밤중에 미디안 진중으로 들어갔다. 그때 마침 어떤 사람이 동료에게 꿈 이야기를 하는 것을 엿듣게 되었는데 꿈 내용은 보리빵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중에 굴러와 장막을 쳐서 무너뜨렸다는 것이었다. 그 보리빵은 이스라엘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날이었다(판관 7, 12-15). 그러나 하찮게 여겼던 보리빵이 하느님 손으로 기적을 행하는 능력이 나타났음을 성경 여러 곳에서 보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보리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 사건이다. 이 기적에서 어린이가 내 놓은 하찮은 보리빵이라도 하느님 축복으로 큰 능력이 됨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요한 6, 1-15). 성경에서 보리는 죄악과 연관됐고 비열한 사람, 하찮은 것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지금도 베드윈족은 '보리빵의 영혼'이라는 말을 적에 대한 철저한 경멸의 표현으로 사용하고 있다. 아내 간통을 의심하며 질투심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아내를 사제에게 데리고 와야 하는데 이때 보릿가루 십분의 일 에파를 예물로 가져와야 했다. 그 예물에는 기름을 따라서도 안 되고 유향을 얹어서도 안 됐다. 그것은 질투의 곡식 제물이며, 죄를 상기시키는 기억의 곡식 제물이기 때문이다(민수 5, 14-15). 룻기에도 보리와 관련한 이야기가 있다. 나오미는 흉년이 들자 베들레헴에서 기근을 피해 모압 지방으로 이주했는데 남편과 두 아들을 잃게 된다. 나오미가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올 때 모압인 며느리 룻도 함께 따라온다. 보리 수확 때 보리 이삭을 주워 홀 시어머니 나오미를 봉양하는 룻의 이야기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큰 귀감이 된다(룻 2, 1-23). 웰빙 열풍이 불면서 가난을 상징하던 보리가 오늘날에는 훌륭한 건강식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보리는 쌀에 비해 열배 이상 풍부한 식이섬유를 함유하고 있어 장 운동 활성화에 도움을 주고 혈중 콜레스테롤을 감소시키는 등 성인병 예방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보리는 더 이상 가난을 상징하는 식량이 아닌 것 같다. [평화신문, 2006년 10월 29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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