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세계] 열왕기 - 남왕국 유다 후기 시대 1. 개요 이 시대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한 기원전 722년부터 남왕국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유배시대가 시작되는 기원전 587년까지로, 2열왕 18-25장과 2역대 29-36장이 이제 홀로 남은 남왕국 유다의 역사를 전하고 있다. 이 시기에 유다 왕국은 아시리아와 에집트, 바빌론 등의 강대국 사이에서 존립의 위협과 만연해 가는 이방종교들에 맞서 생존과 야훼종교의 수호를 위해 힘겨운 투쟁을 해야만 했다. 더욱이 예언자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지 못할 강대국에 의존하며 이방 신들을 앞장서 섬김으로써 정치적 분열과 종교적 혼란을 야기시켰던 아하즈와 므나세 같은 임금들은 나라의 사정을 더욱 어렵게 하였다. 하지만 어둠이 짙을수록 횃불의 빛은 더욱 밝은 법, 이러한 암흑의 시기에도 히즈키야와 요시야 임금은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더욱 굳건히 하며, 종교개혁을 열정적으로 단행함으로써 순수한 야훼신앙을 회복하고자 노력하기도 하였다. 2. 남왕국 유다 후기시대의 전체적 개괄 이 시대에 활동했던 중요한 인물과 사건들을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여기에는 이스라엘 역사상 중요한 연대, 임금들의 재위기간과 성서의 평가, 예언자들의 활동시기와 핵심 메시지 등이 성서의 관련부분과 함께 제시되어 있다. 3. 히즈키야 임금과 이사야 예언자(2열왕 18,1-20,21) 기원전 722년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할 당시 남왕국 유다의 임금은 아하즈(735-716)였다. 그는 강대국인 아시리아에 의탁하며 그들의 종교와 경신례를 끌어들이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뒤를 이은 히즈키야(716-687)는 “자기 조상 다윗이 하던 그대로 주님의 눈에 올바른 일을 한”(2열왕 18,3) 훌륭한 임금이었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신뢰하였던 그는 그때까지 이방종교의 요소들이 혼합된 예배가 올려지던 산당들을 과감하게 없애고, 아세라 목상과 같은 우상숭배들을 배격하였다. 이러한 종교개혁(2역대 31장)을 통해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삶을 바로 세운 히즈키야는 나아가 당시 종속관계에 있던 아시리아로부터의 독립을 시도하게 된다. 이때 이사야 예언자가 나서서 그를 돕는다. 열왕기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701년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704-681)이 예루살렘을 점령하려 할 때 히즈키야는 신하들을 이사야 예언자에게 보내어 조언을 구하게 되는데, 이사야는 아시리아 군대를 두려워하지 말고 굳건히 대항하라고 독려한다. 주님의 성전에 들어간 히즈키야는 하느님이야말로 세상의 창조주이시고, 만군의 주님이시라 고백하며, 구원을 간절히 청한다(2열왕 19,14-19). 절대절명의 위기를 맞아 히즈키야가 보여준 자세는 바로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는 신앙인의 모습이었다. 열왕기는 아시리아 군대가 물러가게 된 것이 히즈키야의 기도를 들으신 하느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나는 이 성읍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라”(2열왕 19,34)고 응답하신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라 전하고 있다(2열왕 19,35-37). 4. 요시야의 종교 개혁(2열왕 22,1-23,30) 히즈키야에 이어 임금이 된 므나세(687-642)는 다시 친아시리아 정책으로 돌아서서 온갖 이방종교의 관습들을 받아들인다. 그는 바알 제단과 아세라 목상을 다시 세우고 해신, 달신, 별신을 예배하고 섬겼으며, 요술과 마술을 이용하고 영매와 점쟁이들과 어울렸다. 이러한 그의 행위는 주님의 눈에 악한 짓이었다(2열왕 21,2-6). 또한 그의 아들 아몬(642-640) 역시 종교혼합주의에 깊이 빠져든다. 그러나 요시야 임금(640-609)은 주님의 눈에 올바른 일을 하였으며, 이상적 임금인 다윗의 길을 그대로 걸어간 성왕(聖王)이었다. 열왕기는 그가 열정적으로 행했던 종교개혁을 상세하게 전해준다. 기원전 622년 성전을 보수하던 중에 발견된 율법책(신명기 법전)의 정신을 바탕으로 요시야는 전면적이고 조직적인 종교개혁을 단행하였는데, 주님의 성전에서 바알과 아세라와 하늘의 모든 군대를 위해 만들어놓은 기물들을 끌어내고, 우상숭배 사제들을 내쫓았으며, 몰렉에게 바치던 인신제사를 폐지하고 온갖 이방신들을 섬기던 산당들을 철폐하였다. 그리고 그 옛날 선조들이 이집트의 종살이로부터 해방될 때 체험했던 하느님의 구원과 사랑을 기념하고 현재화하는 과월절을 다시 거행함으로써 신앙의 뿌리를 되찾고자 하였다. 이러한 요시야의 노력은 오늘날의 새로운 하느님 백성인 교회로 하여금 초대 교회의 정신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했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과 그 맥을 같이 한다 하겠다. 열왕기는 요시야처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께 돌아온 임금이 그 앞에도 없었고 그 뒤에도 다시 나오지 않았다고 평가하고 있다(2열왕 23,25). 5. 남왕국 유다의 멸망과 유배 기원전 609년 요시야 임금이 죽은 후 유다 왕국은 급속한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석달 동안 다스린 여호아하즈에 이어 왕위에 오른 여호야킴(609-598)은 이집트의 꼭두각시 임금으로 자신의 지위를 강화하는 데에만 골몰하여 다시 우상숭배와 이방 풍습들을 받아들인다. 그 후 새로운 강대국으로 등장한 바빌론에 반기를 들었던 여호야킴은 597년 느부갓네살의 예루살렘 공략 때 죽게 된다. 그의 아들 여호야긴 임금은 겨우 3개월을 버틴 뒤 항복하고 많은 지도층 인사들, 장인들과 함께 바빌론으로 끌려가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제1차 유배이다. 이때 유배의 길에 올랐던 사람들 가운데는 후에 예언자로 불리움을 받은 사제 에제키엘도 있었다. 바빌론에 의해 임금으로 내세워진 시드키야(597-587) 역시 여호야킴이 하던 그대로 주님의 눈에 악한 짓을 저질렀으며, 마침내 주님께서 예루살렘과 유다를 당신 앞에서 쫓아내셨다고 열왕기는 전한다(2열왕 24,19-20). 실제적으로 다시 반기를 든 시드키야를 치러온 바빌론에 의해 587년 예루살렘이 함락됨으로써 유다 왕국은 종말을 고하게 된다. 점령군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고 시드키야를 비롯한 많은 무리들을 바빌론으로 끌고 갔는데 이것이 바로 제2차 유배이다. 이로써 사울과 다윗 임금으로부터 시작되었던 왕정체제는 400여 년 동안의 영욕을 뒤로 한 채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열왕기 저자는 이스라엘과 유다 두 왕국의 멸망이 결국 임금들과 백성이 저지른 죄악에 대한 필연적인 결과임을 제시하고 있으나, 말미에 유배지에 있던 여호야긴이 감옥에서 풀려나 특전을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첨가함으로써 미래에 대한 희망을 열어 놓고 있다. [월간 빛, 2001년 11월호, 송재준 마르코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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