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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마르코 복음의 예수 이야기 (3)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8-01-11 조회수5,799 추천수2

[성서의 서계] 마르코 복음의 예수 이야기 (3)

 

 

안식일(마르2,23-3,6)

 

안식일은 이미 사람을 괴롭히는 두통거리가 되었다. 나는 언제나 안식일을 잘 준수했다. 안식일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 “너희들은 에집트에서 노예살이 했을 때를 기억해라.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이 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손으로 너를 거기서 빼내어주셨다. 그래서 하느님은 너희들에게 안식을 지키라고 명하셨다.” 그렇다면 안식일은 자유의 상징인 해방의 축제인 것이다.

 

그런데 율법은 결의론으로 인해 하나의 짐스런 것으로 변질되었다. 나의 관심사는 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사람에게 있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은 나의 제자들이 안식일의 법을 지키지 않았다고 해서 불평을 털어놓았다. 나의 제자들은 들판을 지나면서 밀을 손으로 까불어서 입 속에 넣어 씹었다는 것을 트집잡았지만, 나는 사울에게 쫓겨다니던 다윗의 선례를 들어 설명했다.

 

다윗과 그의 동료들이 욥의 성소에 갔을 때 사제 아히멜렉은 배고파하는 그들에게 사제들만 먹을 수 있었던 거룩한 빵을 내어주었다고 말했다. 인간적 필요가 경배 규정을 주도했던 것이다. 나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생겼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생기지는 않았습니다.”는 말씀을 그들에게 납득시키려 했다. 그리고 나는 나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말함으로써 하느님이 주신 권위를 은근히 내비치면서 안식일의 참 의미를 규명하려고 했다. 종교의 참 의미는, 간단히 말하자면 인간들을 위한 것이다.

 

내가 안식일에 대해 그렇게 언급한 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좋게 받아들여질 리가 없었다. 그 뒤 곧바로 회당으로 갔을 때 거기엔 나를 걸어 넘기려는 흉계가 놓여져 있었다. 사람들은 손이 오그라진 사람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지켜보고 있었다. 어떻게 대응했을 것 같았는가? 나는 분노했다. 사람들이 교활하게 그를 하나의 미끼로 던져 놓고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들은 안식일을 장난 거리로 만들고 있었다. 그들은 나에게 올가미를 씌우려 했다.

 

나는 그들에게 도전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해야 하는가, 나쁜 일을 해야 하는가? 사람을 고쳐야 하는가, 해쳐야 하는가? 그들은 숨죽인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는 분노로 이글거렸다. 나는 그들의 생각이 얼마나 뒤틀어져 있는가를 보았다. 그러나 나의 분노는 그들의 무지함을 넘어 슬픔과 연민으로 변하면서 그 병자를 치유했다. 뒤에 나는 바리사이들이 요한을 감옥에 가둔 바 있는 헤로데 안티파스의 지지자들을 만나기 위해 그 자리를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묘한 연대가 공동의 목표물을 통해 형성되었다. 그것은 바로 나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나는 법을 위반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인간을 경시하고 종교를 남용하는 것에 정면으로 도전할 작정이었다. 이는 모두 아빠를 욕되게 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반대는 점점 커져 위협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항상 나와 함께 있었다.

 

 

예수님의 사람들(3,7-12)

 

나의 일행은 점차 커져갔다. 많은 여자들도 여기에 가담했다. 사람들은 우리 일행들이 누구인지,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를 이해하고 있었다. 나에게는 이 모습이 아주 당연했다. 곧 아빠는 남녀 가릴 것 없이 모든 이의 아빠였던 것이다. 여자들도 나의 제자가 되었다. 나는 호숫가나 그 위쪽 나지막하고 평평한 언덕에서 나를 열성으로 따르는 이들을 가르쳤다. 나의 사명은 이스라엘을 새롭게 하려는 것이었다. ‘열둘’이라는 것은 우리에게는 하나의 웅변적인 징표로 통했다. 이는 야곱의 열두 아들들과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즉시 연상시켰다. 나는 상징성을 띄는 ‘열둘’을 가질 것이다. 이는 곧 새 백성이 아닌 ‘하느님의 새로워진 백성’을 가질 것이라는 뜻이었다. 나는 이들이 이스라엘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 하느님 백성의 토대가 될 것으로 보았다. 아빠는 모든 이의 아버지가 되는 분이셨다.

 

 

열두 제자들(마르3,13-19)

 

나는 열두 명을 나의 제자로 선택하기로 결심했다. 남자를 선택한 것은 상징성 때문이었다. 그 이유는 야곱의 열두 아들들로부터 이스라엘의 지파들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열두’ 지파는 결국 이스라엘 백성의 바탕이었다. ‘열둘’은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각별한 상징으로 통했다. 나의 여제자들은 이 점을 충분히 이해했다. 여제자들은 이 상징성을 충분히 알고 있었을 뿐더러, 자신들이 제자들의 한 일원으로서 동등하게 함께 따랐기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 제자들 사이에서 ‘권위’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눈은 모두 항상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의 권위가 봉사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보고 있었다.

 

열두 제자들은 시몬(별칭으로 베드로-바위-)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와 제베대오의 (천둥의 아들이라 불리던)야고보와 요한 형제들이었다. 이 네 제자들이 첫 부름을 받은 이들이었다. 이어서 후에 부름을 받은 이들이 마태오, 바르톨로메오, 필립보, 토마,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와 (혁명당원)시몬과 유다스 이스가리옷이다. 나는 이들을 아주 조심스럽게 내적으로 잘 묶었다. 뒤에 나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치유하도록 그들을 파견할 것이다. 중요한 순간이었다. 이제 나의 사명은 첫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돌이킬 수 없는 시작이었다.

 

 

나의 어머니와 형제들(마르3,20-35)

 

곧 반발이 일어났다. 우리는 가파르나움으로 되돌아갔다. 식사 할 겨를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몰려왔다. 나에 대한 소문이 나자렛까지 퍼졌던 모양이었다. 어쨌든 나의 가족들이 놀라, 내가 미쳤다고 보고 붙잡으려고 나섰다. 가족들은 가파르나움까지 서둘러 쫓아왔다. 사태가 너무 좋지 않았다. 더구나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율사들도 나를 두고 빈정거리며 반박하고 있었다. 예루살렘까지 나의 소문이 돌았던 것이었다! 나는 요주의 인물이 되어 있었다.

 

이 율사들은 나의 치유 사건을 두고 재판하듯 문제를 삼았다. 욥의 친구들처럼 그들은 자기들의 입장이 옳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내가 안식일을 어겼으며 죄인들과 상종했다는 것이었다. 나의 처신이 거룩하신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나의 치유를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나의 능력이 하느님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사실 나는 사탄의 이름으로 비롯된 병의 나쁜 결과를 내쫓고 있었다.

 

수수께끼만이 그들의 어리석음에 해답을 줄 수 있었다. : 분열된 왕국이 굳건히 존립할 수 있겠는가? 그런 왕조가 망하겠느냐? 흥하겠느냐? 사탄이 나의 치유로 방해받고 있다면 그 사탄보다 더 강력한 힘이 있다는 말이 아니겠느냐? 그렇다면 내가 악령의 힘에 사로잡혀 있다는 그들의 결론은 나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는 것이었다. 율사들은 마음의 문을 닫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경고했다.

 

사실 아빠께서 용서하지 못하실 죄란 세상에 없다. 그리고 그 용서는 완전하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용서하시려 해도 인간이 마음을 닫고 있다면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느님은 인간을 억지로 강제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아빠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자비의 때가 오면 그런 인간들을 적절히 이끄실 것이다. 당신은 모든 이의 구원을 바라셨다.

 

나의 가족은 여전히 내 주변에 머물러 있었다. 내가 사람들로 들끓는 집안에 앉아 있을 때, 어머니와 형제들이 나를 찾는다는 말을 들었다. 사실 나는 가족들이 나를 강제로 붙잡아 가려고 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참으로 답답했다. 그러나 나는 가족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가족들의 입장에서 보면 나는 잃어버린 가족 일원이었다. 그렇다고 나자렛의 고요한 삶으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일순간 혼란이 왔다. 그러나 그 때 나는 내 말에 귀를 기울이며 둘러 선 사람들을 보고서는 내 가족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내 어머니와 형제들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앞에 있었던 것이다! 내 가족은 온 나라에 다 있었다. 아빠의 뜻을 듣고 실천하는 이들이라면 그들은 언제 어디서든 하느님의 충실한 남녀들로서 나의 형제·자매요 어머니였던 것이다.

 

 

비유들(마르4,1-33)

 

나의 백성들은 비유를 좋아한다. 비유는 놀랍고 재기에 넘치는 격언, 수수께끼, 생생한 이야기 등 폭넓은 영역을 지니고 있다. 백성들은 그러한 매력을 좋아했으며, 나도 그러했다. 나의 격언과 이야기들은 백성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이해를 못할 경우에도 백성들은 매우 흥미로워 했다. 예수는 백성들에게 결코 지겹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백성들에게 적절한 비유를 들려주었다. 잠시 숨을 돌린 후 나는 제자들에게 따로 비유를 풀이해주었다. 비유들은 이러하다.

 

씨 뿌리는 농부를 상상해 보라. 그러나 이 농부는 씨를 길, 돌, 가시덤불, 좋은 땅 등을 가리지 않고 내다 뿌린다. 이 비유를 들으며 그들은 낄낄거리며 웃었다. 저런 칠칠치 못한 농부가 있나? 씨도 제대로 못 뿌리다니! 내가 이 비유를 말했을 때 백성들은 비유가 뜻하는 바가 따로 있다고 내심 짐작했을 것이다. 나는 나의 제자들이 그 비유의 뜻을 깨닫기를 바랐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못했다. 나는 그 비유의 뜻을 설명해 줬다. 씨는 말씀 곧 복음이다. 그리고 다양한 땅의 조건들은 말씀을 듣는 이들이다. 제자들은 내가 비유를 든 상황들은 이미 우리가 겪었음을 분명 알았을 것이다.

 

나는 다시 백성들에게 돌아가서 다른 비유를 들었다. 누구라도 등불을 침대 밑에 두거나 됫박으로 덮어두는 이는 없다. 나의 가르침은 빛이 모든 것을 밝히는 하나의 등불과 같다. 하지만 수용하는 처지에 따라 결과는 각각 달라진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의 통치인 왕국의 분명한 도래에 대해 말했다. 농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씨를 뿌리는 일이다. 이제 그저 인내하며 성장과 추수를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아마 일부는 내가 하는 말의 뜻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추수는 하느님의 일이다. 어떤 이가 심고 어떤 이가 물을 대었다면 그것을 자라게 하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나는 하느님의 통치가 이미 나와 나의 제자단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고 선포했다. 나의 단체가 극히 미소했기에 정말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겨자씨의 비유를 생각해 보라.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것일지 모르나 크면 새들이 둥지를 틀만큼 자라지 않는가! 그렇다. 나는 제자들을 상대로 비유를 계속 가르쳤다.

 

 

풍랑(마르4,35-41)

 

나는 호수 동쪽으로 가기를 바랐다. 나는 열두 제자들을 데리고 배를 타고 그 곳으로 향했다. 피로감에 나는 즉시 잠이 들었다. 배가 몹시 흔들리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났는데, 제자들 중의 하나가 놀라 황급히 나를 불렀다. “배가 가라앉는 판에 태연하다니요!” 바람이 순식간에 파도를 솟구쳐 올리자 배에 물이 가득해졌다. 나는 바람과 파도를 통제했다. 그 즉시 모든 것이 조용해졌다.

 

나는 나와 아빠에 대한 제자들의 불신을 두고 조용히 타일렀다. 나는 제자들이 충격을 받아 놀라서 부르짖는 소리에 충분히 동감했다. : “이분이 누군가? 바람과 파도도 그에게 순종하지 않는가?” 극한 상황에서 그렇게 처리하는 것은 나에게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나는 이미 병을 일으킨 악령을 그렇게 처리한 바 있었다. 나는 이 분야에는 권능을 쉽게 수행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런 권능을 지니지 못했다. 그 이유는 내가 그런 사람에게 그렇게 행동하기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지배하거나 힘을 사용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나는 언제나 아빠를 반영했다.

 

[월간 빛, 2004년 1월호, 이재수 시몬 신부(큰고개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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