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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마르코 복음의 예수 이야기 (7)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8-01-11 조회수4,781 추천수1

[성서의 세계] 마르코 복음의 예수 이야기 (7)

 

 

그는 근심하며 떠나갔다. (마르10,17-31)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간 뒤, 길을 떠나 요르단 강을 건너 예리코로 향하고 있을 무렵, 어떤 젊은이가 허겁지겁 내 앞으로 와서 무릎을 꿇고 호소했다. 호감이 가는 그가 율법에 충실한 삶을 살아왔다고 장담했을 때 별로 놀라지는 않았다. 그는 이상적인 제자가 되고 싶어 했고, 나는 그가 소개한 이상으로 그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알기로 그는 부유한 가문의 출신으로 아버지 재산의 상속자였다. 그런데 내가 그에게 요구한 것은 시련이었다. 나는 그에게 모든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준 다음 자유롭게 되었을 때 가진 것 없는 우리와 함께 하라고 했다. 그것은 그에게 너무 과분했던 요구였던 것 같았다. 그는 얼굴을 숙이고 어깨를 늘어뜨린 채 돌아가 버렸다. 물론 그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 좀 실망스러웠다.

 

나는 그 교훈을 제자들에게 차분히 가르쳤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제자들은 깜짝 놀랐다. 당대 생각으로 보면, 부자란 하느님 축복의 외적 표현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나는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기가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쉬울 것이라고 말했다. 제자들은 하나같이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겠는가?”하고 반발했다. 그래서 나는 ‘인간은 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하느님께서는 하실 수 있다.’고 말했다.

 

베드로는 자신과 다른 제자들이 나를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버렸다고 상기시켰다. 물론 제자들이 그 부자처럼 포기해야 될 많은 재산을 가지지는 않았지만, 그들로서는 가진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나를 따랐던 것이다. 나 역시 그들의 처신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따라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부모와 자녀와 땅을 버렸다. 나는 그들이 잃어버린 이가 아니라고 말했다. 현세에서 박해와 고통도 받겠지만 그에 대한 수십에서 수백 배의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제 다들 지배 형태인 가부장적 구조의 틀을 벗어나야 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모든 이가 제자로서의 평등한 위치를 사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사실상 지속하기 어려운 하나의 이상으로 드러날 것이지만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었다.

 

 

섬기는 자유 (마르10,32-52)

 

아직까지는 예루살렘을 향한 우리의 여정에 차질은 없었다. 나는 앞장 서 가면서 제자들이 느끼는 불안을 감지할 수 있었다. 제자들은 나의 처신에서 불길한 조짐을 느꼈을 것이다. 세 번째로 나는 참으로 절박한 시간이 나에게 닥쳐왔다고 말해주었다. 이제 제자들도 그 시간에 직면할 것이다. 그들은 알아들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 역시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 와중에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들은 솔직했다. 메시아 왕국이 서면 가장 높은 자리를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내 영광을 나누어 받을 만한 대가를 치룰 자세가 되어 있는가를 물었다. 그들은 뭘 모르고 무모한 확신으로 대답했다. 어이없는 나는 미소만 지었다. 시간이 지나면 정말 알게 되겠지! 그 자리를 주고 안 주고는 나의 제의가 아니라 이미 아버지의 의중에 있다고 말했다.

 

그 두 형제들의 이런 요청에 다른 제자들은 노골적으로 화를 냈다. 약삭빠른 두 형제가 몰래 슬쩍 해치우려고 했지만 다른 이들에게 들통 나고 말았던 것이다. 첫째가 꼴찌가 된다는 내 말이나 제자 직무의 평등에 대한 경험은 지배와 권력과 야망의 갈증과 충동 앞에서는 무력해지는 것이었다. 그때 이런 것들이 내 사명을 지속적으로 어렵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솔직하게 말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행정 당국에게 기본적으로 주어진 권력을 말했다. 통치자들은 자신의 발아래 모든 것을 두게 하려는 지배욕이 있다. 그러나 이는 나를 따르기로 작심한 이들에게는 걸맞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권력을 그 역으로 설정했다.

 

통치자들은 공동체의 종이 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권력과 왕실이라는 격에 따른 권력의 행사나 모양이나 의복이 따로 있을 수 없다. 나 자신의 예까지 들려주었다. 제자들만 아니라 모든 이를 위해서 온 나는 죄의 압제와 노예생활로부터 인류를 자유롭게 풀어 구원하고자 내 목숨을 내어놓으려고 왔다. 분명 그런 관점에서 보면 나는 세상의 어떤 은인보다도 더 큰 영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나는 봉사하는 영광 이외에는 어떤 영광도 구하지 않았다. 나는 제자들이 사랑의 자유 안에서 서로 종으로 봉사함으로써 충만한 인간 성숙을 이루기를 진심으로 강조했다. 내 말의 뜻은 아주 명백했다. 권력과 영광에 관심이 많은 세상의 통치자들과는 다르게 나의 제자들은 허세나 과시가 없는 봉사를 하게 되어 있었다. 지배나 압제는 나와 나를 드러내는 모든 것과는 정반대가 될 것이다. 내 말은 예루살렘에서 권위를 파괴할 것이다. 나는 위험한 인물로 지목될 것이다. 나의 가르침은 정치적인 폭발물과 같을 것이다. 침묵하지 않으면 그 결과는 어찌 될 것인가!

 

제베대오의 아들들이 나에게 무언가를 요청할 양으로 다가왔을 때 나는 “내가 당신들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랍니까?”하고 물었다. 이제 예리코에서 나는 간절히 호소하는 다른 이에게 똑같은 물음을 던졌다. 그러자 그가 “라뽀니,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대답했다. 소경 바르티메오는 길가에 앉아 있다가 내가 그 곁을 지날 때, 다른 이들이 말렸지만, ‘다윗의 아들’에게 애걸하듯, 그렇지만 큰 기대를 하면서 계속해서 크게 불렀다. 나는 그런 강한 믿음을 가상히 여겨 그의 시력을 즉시 회복시켜 주었다. 그리고 그를 정말 깨끗이 고쳐주었으며, 더 깊은 실제를 볼 수 있도록 그의 눈을 열어주었다. 시력을 선물로 받은 그는 제자의 길을 걷고자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그를 본 나의 제자들은 권위라는 것이 전적으로 치유와 성숙을 위한 봉사에 있다는 것을 배웠을까?

 

 

예루살렘에서 (마르11,1-26)

 

우리는 올리브 산으로 올라가서 예루살렘 도읍을 내려다보았다. 저기서 나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었다. 예언자다운 모습을 보였던 순간이었다. 나는 즈가리야 예언서가 말하는 겸허하게 당나귀를 타고 오시는 메시아와 같은 모습으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였다. 처음으로 메시아에 걸맞는 처신을 보였다. 보는 안목을 지닌 사람들은 그렇게 보았을 것이다. 이제 엉뚱한 그의 오해의 소지는 점차 벗겨질 것이다. 우리의 소박한 행진은 성문 앞까지 이어졌다. 나는 혼자 성전으로 들어갔다. 나는 거기서 벌어지는 일에 크게 실망하고 분개했다. 그 뒤 밤이 되자 나는 베타니아로 가서 쉬었다.

 

다음날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보면서 무언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예로 삼고 싶었다. 나무 가까이 가서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아무 열매도 달려있지 않았다. 사실은 열매를 맺을 계절이 아직 아니었던 것이다. 끔찍한 몇 마디 말을 던졌다. “이제부터는 영원히 어느 누구도 너에게 열매를 따먹는 일이 없으리라.”

 

나는 그곳을 떠나버렸다. 제자들은 내가 무언으로 표시한 비유의 의미를 잘 알아들었다. 나는 무화과나무의 운명을 바로 성전의 운명으로 보았다. 우리는 곧장 성전으로 가서 예언자와 같은 몸짓으로 처신했다. 성전 밖 뜰에서 나는 희생용 동물들을 판매하는 상인들을 몰아내고 비둘기를 파는 이들의 상과 로마 화폐를 유다인들의 화폐로 바꾸어주는 환전상들의 상을 둘러엎었다. 그리고 마당에서 성전 제구들을 이리 저리 나르는 것을 금지했다. 나는 상징적으로 성전을 폐쇄시켰다. 그리고 그렇게 처신한 것에 대해 두 가지 이유를 들었다. 하느님의 용서와 하느님과의 친교를 얻는 성전과 예배는 긴급도피처인 강도의 소굴이 되었으며, 모든 민족을 위한 기도의 집이 아닌 이스라엘만을 위한 독점적 영역이 되었다고.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갔다. 대제관들과 율사들은 나의 메시지와 도전을 명백하게 들었다. 그들은 나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나를 제거할 때를 기다렸다.

 

 

논쟁 (마르11,27-12,44)

 

다음날 내가 성전으로 갔을 때 대제관, 율사, 원로들이 다가 와서 말을 걸었다. 그들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어제 나의 처신이 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내가 그렇게 처신한 권한이 어디 있는가를 문제 삼았다. 그들은 나를 불신하기로 아예 작정한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그들에게 요한이 베푸는 세례의 권한이 어디에서 온 것인가를 물었다. 이 물음이 그들을 진퇴양난의 궁지로 몰았다. 만일 자신들이 요한의 권한이 하늘로부터 주어졌다고 말하면 요한의 말을 듣지 않았으므로 스스로 불신했다는 잘못으로 떨어지게 되고, 나의 권한도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결과가 나올 것이었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요한을 예언자로 알고 따르고 있었으므로 감히 그의 권한을 부인할 수가 없었던 처지였다. 그들은 답을 회피하거나 침묵해야 될 처지가 되었다. 나는 효과적으로 그들의 도전을 꺾을 수 있었다.

 

나는 비유를 들어 차분히 타이르며 그들에게 반박하기 시작했다. 비유는 하느님이 소작으로 준 포도원 농부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곧 이스라엘의 역사의 요약이었다. 하느님은 도조를 받아 오라고 당신의 종인 예언자들을 보냈다. 농부들은 종들을 보자마자 모욕하고 학대하거나 죽이기까지 했다. 하느님은 마지막 수단으로 당신의 아들을 보내기로 작정했다. 그 아들은 가장 사랑하는 외아들이었다. 하느님은 “내 아들이야 알아보겠지.”하며 아들을 보냈다. 그러나 농부들은 비웃듯이 그 아들을 죽여 묻어주지도 않고 밖으로 내던져 버리고 말았다. 심판이 내려졌다. 포도원은 남에게로 넘어갈 것이었다. 그렇다. 그들은 이 비유의 내용이 누구를 두고 하는지를 알아들었다. 그들이 바로 소작을 받은 사악한 농부들이었다. 나를 둘러싸고 귀 기울이는 사람들이 주위에 없었더라면, 그 즉시 화가 난 그들이 나를 붙잡았을 것이다.

 

음모가 깊어지고 있었다.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이 당국으로부터 또 파견되었다. 내가 정치적으로 위험한 인물로 인식되어 그들은 정치적으로 서로 결속 된 것이었다. 짓눌린 이들의 보호, 권위에 대한 나의 생각, 죄인들과의 상종은 정치적으로 그들의 종교 체제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교묘한 질문을 던졌다. 바리사이들은 로마의 주민세를 인정하였지만 민족주의자들인 열혈 독립당원들은 전적으로 거부하던 터였다. 그들은 주민세를 바쳐야 되는지 말아야 되는지를 나에게 물었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한 단체에 문제가 되기 때문에 대답하기 어려운 물음이었다. 게다가 바치지 말라면 로마 지배권에 심각한 도전이 되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난감했다. 그들이 나에게 노린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나는 동전을 하나 달라고 하여 동전의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인지를 물었다. 그들은 로마 황제의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분명 그 로마 제국이 발행한 동전으로 알면서 사용하고 있었다! 좋다, 그러면 그들은 카이사르에게 그의 것인 동전을 세금으로 바쳐야 한다. 그리고 하느님의 것은 언제나 하느님께 바쳐야 한다. 그들에게는 유감스럽지만 나는 이런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예루살렘에서는 사두가이들과의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새롭게 유행하는 부활 사상을 부인하면서 그 부당성을 들고 나왔다. 한 여인이 일곱 형제의 부인으로 있었다. 다시 말해 결혼하는 족족 다 남편이 사망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부활이 있다면 저승에 가서 부활한 후 그 여인은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부활이 있으면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의 잘못된 부활관을 지적하였다. 부활이란 우리가 알고 있는 이전의 생명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아니며, 이 세상을 초월하며 이 세상의 조건들과는 전혀 다른 시공에서 변화된 삶이다.

 

결국, 놀랍게도 좋은 뜻을 가진 율사 한 사람! 그는 나에게 율사다운 질문을 던졌다. 계명들 중에 어느 계명이 가장 중요한 계명이냐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솔직한 물음에 바로 답을 주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사랑의 이중 계명을 들어주었다. 그 율사는 내 말에 동의하며 모든 번제나 제사보다 더 낫다고 덧붙였다. 그는 바른 길 위에 서 있었다. 그는 분명 머잖아 제자가 될 것으로 보였다.

 

나는 끝으로 사람들에게 율사들을 조심하라고 말했다. 율사들은 나를 두고 사람들을 잘못 이끄는 주범으로 몰았다. 그들은 내가 자신들의 종교와 입지를 위협하는 존재로 보았던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을 하느님의 흠집난 모상이라고 속이고 있었다. 그들의 하느님은 나의 아빠와 같은 분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신학 전문가라 생각하고 종교 규율을 세심하게 지키는 것에 자부심을 가졌다. 그들은 기다란 옷을 입고 다니고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기를 좋아했다. 그들은 회당과 잔치에서 당연하다는 듯 가장 윗자리를 찾았다. 그리고 그들은 남이 보는 데서 오래 기도할 뿐만 아니라 가난한 이들을 등쳐먹기를 좋아했다.

 

나는 가난한 과부가 성전에 들어와 가진 돈을 봉헌하는 모습을 지적했다. 그녀는 비록 작은 돈이지만, 자신이 가진 전부를 바쳤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마음 없는 율법주의의 한 희생자로 착취당했던가? 나는 배수진을 쳤다. 율사들과의 관계는 여기서 완전히 끝났다.

 

[월간 빛, 2004년 5월호,  이재수 시몬 신부(큰고개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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