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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 유대인 이야기5: 이사악의 우울증?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1-28 조회수4,636 추천수1

[유대인 이야기] (5) 이사악의 우울증?


하느님 - 인간의 감동적인 사랑 이야기

 

 

아브라함이 아들 이사악을 죽이려 하자 천사가 급하게 말리고 있다. 천사의 놀라고 다급한 모습과 얼굴이 가려진 이사악, 놀라서 뒤를 돌아보는 아브라함의 표정이 강렬한 신앙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아브라함의 희생 제사', 렘브란트(1634~1635), 캔버스에 유채, 158×117cm, 에르미타주 박물관, 러시아 상트 페트르부르크.

 

 

"나에게 순종했으니 세상 모든 민족들이 너희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다"

 

“천사가 말하였다.‘그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 그에게 아무 해도 입히지 마라’”(창세 22, 12).

 

아브라함은 그제야 칼을 땅에 떨어트리고 긴 숨을 토해낸다. 아들을 죽이려는 섬뜩한 눈빛은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다. 영문도 모른채 죽음 문턱까지 갔다가 살아난 아들 이사악도 숨을 ‘하악하악’내쉬고 있다. 목에는 아직도 서늘한 칼날의 기운이 남아있다. 아버지는 잠시 후 덤불에 뿔이 걸린 숫양 한 마리를 발견하고, 아들 대신 번제물로 바쳤다.

 

세계 어느 문학도 이렇게 인간과 신의 사랑을 극적으로 드러내지는 못했다. 신이 만약 “나를 사랑한다면, 너의 목숨을 바쳐라”라고 말하고, 아브라함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면 이 이야기는 훗날의 무수한 순교자 이야기들 중 하나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신은 아들을 요구했고, 아브라함은 아들을 죽이려 했다. 일반적으로 모든 아버지들은 아들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의 목숨도 버릴 수 있다. 물에 빠진 아들을 구하기 위해, 아버지는 자신이 죽을 수도 있음에도 스스럼없이 물에 뛰어든다. 부성(父性)이란 그런 것이다. 그런 아버지가 신의 명령에 따라 아들을 죽이려한 것이다.

 

이 이야기가 주는 극적 효과는 훗날 수많은 철학자 및 종교인들의 감성을 자극한다. 유대교 랍비 나흐마니데스(Nahmanides, 1194~1270)는 인간 자유 의지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극찬했고, 키에르케고르(Soren Kierkegaard, 1813~1855)는 아브라함의 이삭 봉헌을 둘러싼 신앙의 여러 문제에 대해 성찰한 연구서 「공포와 전율」(Fear and Trembling)에서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위해 자신의 윤리적 이상뿐 아니라 아들과도 결별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의문이 남는다. 성경은 제물 당사자였던 이사악의 입장은 전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사악의 심정은 충분히 추정할 수 있다. 이사악은 평생 동안 오늘날의 ‘명절 증후군’ 비슷한 이른바‘제사 증후군’에 시달렸을지도 모른다.

 

제사 때 번제물로 불태워지는 양을 볼 때 마다, 소름이 돋았을 것이다. 자신의 죽이려던 아버지의 서늘한 눈빛도 영원히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적의심을 가득 품은 채 성장했을 수도 있다. 심각한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겪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실제로 이 이야기는 하느님의 윤리성에 상당한 의심을 갖게 한다. 하느님은 사랑하는 아들을 죽여서야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인가. 하느님의 의지는 인간 윤리와 배치되는가. 최고의 윤리 그 자체인 하느님이 왜 인간에게 비윤리적인 것을 명령하는가. 이에 대해 대부분 유대교 및 가톨릭 윤리 신학자들은 하느님 의지와 보편 윤리의 갈등을 야기시킬 수도 있는, 신앙의 절대성만 강조하는 일부 해석들을 경계하고 있다.

 

이사악이 제물로 선택된 것은 그가 아브라함의 가장 귀중한 소유였을 뿐 아니라, 하느님의 특별한 선물이었기 때문이다. 선물 중에서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선물이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희생(경배)의 완전한 목적, 즉 인간이 소유한 것은 무엇이든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며 그렇기에 마땅히 온 곳으로 돌려 바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강조한 것이다.

 

만약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실제로 죽였다면 이야기는 또 달라진다. 그 희생은 실패로 끝났다. 그래서 이사악의 희생은 실재적인 것이 아니라 경배의 모델로 유효하게 남게 된 것이다.

 

이러한 희생의 보답으로 아브라함은 하느님 선택과 약속이 단순히 유대 민족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보편적’이라는 말씀을 듣는다. 하느님은 단지 아브라함의 자손들만의 번성을 약속한 것이 아니었다. “네가 나에게 순종하였으니,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창세 22, 17-18) 하느님은 유대인만의 하느님이 아니었다. 미국인, 유럽인,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에게도 복을 내리는 하느님이다.

 

이러한 약속은 별로 한 일이 없는, 적어도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지 않은 이사악에게도 훗날 이어진다. “너의 후손을 하늘의 별처럼 불어나게 하고, 네 후손에게 이 모든 땅을 주겠다.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창세 26, 4)

 

이사악 제물 사건 이후, 유대인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일이 또 하나 생긴다. 가나안 땅을 최초로 ‘공식적으로’획득한 사건(창세 23장)이 그것이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가 죽자 그 매장지로 사용하기 위해 헤브론의 막펠라 동굴과 그 주변 땅을 흥정해 구입한다. 땅을 구입하는데 사용된 돈은 은 400세켈(약 4.5kg)이었다. 이 돈을 지불하는 과정 역시 지역 사회 유지들이 모두 참여한 가운데, 당시 상인들 사이에 통용되던 무게를 추로 달아 공식적으로 이뤄진다.

 

이 내용은 유대인 입장에서는 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이야기 가운데 하나다. 당시까지 아브라함은 자신의 땅이 없는 나그네요 떠돌이였다(창세 23, 4). 하지만 신중하고도, 힘들게 성사된 이 거래로 드디어 땅의 소유자가 된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9년 1월 25일, 우광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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