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이야기] (15) 진격, 진격, 또 진격
“총공격이 시작됐다” - 꿈란 동굴에서 발굴된 사해문서의 사본. 성경 및 그에 대한 주석, 생활 규칙 등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는 사해문서를 통해 우리는 고대 유대인들의 전투 및 일상 생활 방식을 엿볼 수 있다. 날이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총공격이 시작됐다. 군인들의 키보다 두 배나 더 긴 그림자가 먼저 예리코로 달리고 있었다. 군인들은 그렇게 등으로 태양을 받으며 예리코로 돌진했다. 유대 민족의 모든 역량을 하나로 모아 쏟아 붇는 엄청난 기세였다. 여기서 당시 유대인들의 전투 방식 및 전투 대형에 대해 살펴보자. 고대 유대인들의 전투에 대해선 근세기까지 거의 알려진 바가 없었다. 하지만 기원전 2세기의 구약성경 사본 및 주석, 유대교 관련 문서(사해문서)가 1947년부터 사해 서쪽 쿰란 동굴에서 발견되기 시작하면서 그 비밀이 풀렸다. 사해문서에 따르면 고대 유대인들의 전투 대형은 대체로 보병, 기병, 투석대로 구성됐다. 보병은 거울처럼 광택을 낸 청동 방패로 무장했다. 방패의 높이는 약 2.5암마, 너비는 1.5암마였다. 1암마는 팔꿈치에서 가운데 손가락까지 거리로, 대략 45~50cm로 보면 된다. 방패는 금과 은, 구리로 화려하게 장식했으며 미카엘, 라파엘, 가브리엘 등 천사들의 이름을 새기기도 했다. 보병이 들고 있던 창의 길이는 7암마(약 3m)였고, 칼은 1.5암마(약 1~1.5m)였다. 반면 기병대의 창은 이보다 1암마가 더 긴 8암마(약 3.5m)였다. 완전히 정비된 유대군의 경우 전체 기병수가 6000명, 보병이 약 2만8000명이었다. 기병대대는 700명 단위로 구성됐으며, 리베로 200 기병이 별도로 조직돼 전장을 누볐다. 당시 전쟁에 참가할 수 있는 나이는 40~50세였으며, 밥을 짓고 말에게 먹이를 먹이는 등 허드렛일을 하는 보조 전투인력은 50~60세 연령층이 맡았다. 다만 순발력과 뛰어난 승마술이 필요했던 기병의 경우, 보병과 달리 30~45세로 규정됐다. 20대 청년들이 전투에 직접 참가하지 않은 것이 이채롭다. 이들은 다만 군수품을 조달하고 전쟁을 준비하는 역할을 맡았을 뿐이다. 소년이나 여성도 전투에 참가할 수 없었다. 전투 방식 또한 독특했다. 사해 문서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끊임없이 뿔 나팔을 불었다. 나팔은 군대 소집, 적에 대한 경고, 공격, 추적, 재소집 등에 따라 다른 소리를 내도록 했다. 경고 및 공격 나팔 소리는 높고 끊어지는 소리였고, 후퇴 나팔 소리는 낮은 저음의 긴 울림이었다. 나팔 소리를 통한 이러한 부대 지휘는 여호수아가 예리코를 공격하는 모습을 묘사한 성경에서도 자세히 드러난다. “숫양 뿔 나팔을 하나씩 든 사제 일곱 명이 주님의 궤 앞에 서서 가며 줄곧 나팔을 불었다. 그리고 무장을 갖춘 이들이 그들 앞에 서서 걸어가고 후위대가 주님의 궤 뒤를 따라가는데, 뿔 나팔 소리는 계속 울려 퍼졌다.”(여호 6,13) 유대 보병들의 창과 칼이 햇빛을 받아 번쩍거렸다. 엄청난 나팔 소리가 예리코 성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예리코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6일 동안이나 계속된 공격에도 예리코는 무너지지 않았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매서운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7일째가 되는 날 결국 함락되고 만다. 승세를 타기 시작한 유대인들의 기세는 무서웠다. 가나안의 관문 도시, 예리코를 함락시켜 내륙 진출의 발판을 마련한 여호수아는 곧이어 아이를 점령했고(여호 8,1-29),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던 기브온 마저 평화협상을 통해 손에 넣게 된다. 사실 여호수아는 전쟁광이 아니었다. 여호수아는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는 항복을 받아 내거나 동맹 및 협상을 체결하는 것을 더 선호했다. 그 결과가 기브온과의 평화 협상으로 나타났다. 예리코와 아이의 참상을 목격한 기브온 사람들은 저항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스스로 여호수아를 찾아와 항복의 뜻을 표한다. “이제 저희는 나리의 손안에 있습니다. 나리의 눈에 좋고 옳게 보이는 대로 저희 일을 처리하십시오.”(여호 9,25) 여호수아는 손에 피한망울 묻히지 않고 기브온을 차지한 것이다. 포도생산의 중심지였던 기브온은 성경에 45회나 언급될 정도로 중요한 도시다. 지형적으로도 가나안 땅의 중심부에 위치할 뿐 아니라 남북을 잇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했다. 여호수아가 기브온을 차지했다는 것은 가나안 토착민들의 남북 연락망을 끊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만큼 기브온을 잃은 가나안 왕들의 충격은 컸다. 예리코와 아이, 기브온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이제 모든 가나안 땅이 바람 앞 등불 신세가 된 것이다. 이에 위기를 느낀 가나안 토착세력들이 연합 작전을 통해 기브온 탈환에 나섰다. “우리 함께 기브온을 칩시다”(여호 10,4). 다섯 왕이 힘을 모았다. 예루살렘의 아도니 체덱, 헤브론의 호암, 야르믓의 피르암, 라키스의 야피아, 에글론의 드비르 왕이 바로 그들이다. 유대인들은 이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지금까지의 전투가 도시국가들과의 개별 전투였다면 이제는 연합 세력과 싸워야 하는 것이다. 정면대결은 위험이 컸다. 이런 상황에서 여호수아는 역시 현명한 판단을 내린다. 빠른 기동성을 앞세운, 치고 빠지는 게릴라 작전을 펼친 것이다. 연합 군대는 여호수아의 예상치 못한 기습 공격에 큰 타격을 입었고, 결국 다섯 왕도 잡혀서 죽임을 당한다(여호 10,1-27). 여호수아는 이제 거칠 것이 없었다. 가나안 중부 중심 지역을 평정한 여호수아는 말머리를 남부 쪽으로 돌린다. 본격적인 가나안 정벌이 시작된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9년 5월 17일, 우광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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