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이야기] (17) 판관시대
가난뱅이 · 천민 출신의 판관 등장 - 능력만 있다면 출신과 성향에 상관없이 지도자(판관)로 추대하는 열린 포용성은 고대 유대사회가 가나안 지역에서 빠르게 정착하고 융성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유대 민족의 고대와 현대 정치체제에 대한 비교 연구도 앞으로 이뤄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사진은 예루살렘 시청 광장 전경. 유대민족이 낳은 걸출한 명장, 여호수아가 죽었다(여호 24,29-33).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색다른 정치체제를 도입한다. 이른바 판관들의 등장이다. 판관이라고 하면 일반인들은 신라시대부터 조선까지 이어 내려왔던 관직으로서의 판관을 떠올리기 쉽다. 신라 경덕왕 때의 판관은 감찰의 일을 맡아보던 벼슬이었으며,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지방 장관 밑에서 민정을 보좌하던 벼슬아치였다. 현재의 법률용어로는 재판관 혹은 심판관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구약성경에서의 판관은 군대를 지휘하는 통치자, 지도자, 구원자 등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해하기 쉽게 ‘유대 12지파 동맹 체제의 조정자’로 보면 된다. 엄밀하게 말하면 유대민족 스스로 선택해서 이러한 판관 지도 체제를 도입한 것은 아니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가나안 지역은 비록 좁기는 하지만 40개 이상의 지리와 기후로 구분되는 다양성을 지닌 지역이다. 당연히 곳곳에 흩어져 살았던 유대 12지파의 전통과 기질, 성격도 제각각이었다. 게다가 유대 민족 12지파는 수직 관계가 아닌 자존심 강한 평등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당연히 각 지파들은 억압적인 중앙집권식 지도체제에 익숙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대두된 것이 바로 판관에 의한 지도 체제였다. 이런 판관 지도 체제는 기원전 1200년대부터 1000년대까지 200년 동안 지속됐다. 등장한 판관은 모두 12명이다. 여기에는 유명한 ‘판관 삼손’의 이야기도 들어있다. 이러한 판관들은 권력을 세습하는 국가 차원의 지도자가 아니었다. 유대민족 전체의 진두에 서서 명령을 내리는 절대 권력의 지도자가 아니었다는 의미다. 오히려 판관은 카리스마적 성격이 강하다. 오늘날의 김수환 추기경을 생각하면 된다. 뛰어난 능력과 지도력으로 모든 지파의 존경을 받았던 정신적 지도자였던 것이다. 판관들은 일반적으로 한 지파를 이끌었다. 몇몇 판관들은 동시대의 인물일 가능성도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판관들의 출신이다. 가난뱅이에다 천민 출신이 대부분이다. 사회에서 버림받거나, 적응하지 못한 이들도 있었다. 심지어는 여성도 있었고, 매춘부의 아들도 있었다. 판관은 누구나 될 수 있었다. 능력만 있다면 출신과 성향에 상관없이 지도자(판관)로 추대하는 열린 포용성은 고대 유대 사회가 가나안 지역에서 빠르게 정착하고 융성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모압 왕이었던 에글론이 암몬과 아말렉의 자손들을 모아 유대민족(베냐민 지파 일부 지역으로 추정)을 침략, 야자나무 성읍이라고 불리는 곳을 차지했다. 오아시스가 있었던 중요한 요충지가 이민족에게 넘어간 것이다. 이로 인해 베냐민 지파의 일부는 이후 18년 동안 모압 임금 에글론을 섬겨야 했다. 이때 에글론 왕을 대담하게 암살하고 모압 민족을 물리친 장수가 바로 판관 에훗이다(판관 3,12-30 참조). 그런데 이 에훗은 왼손잡이였다. 고대 유대 사회에서 왼손잡이는 빈약한 사람을 지칭했으며, 사회생활을 하는데도 많은 차별을 받았다. 그런 그가 유대 민족의 판관이 된 것이다. 판관 중에는 여인도 있었다. 드보라처럼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여성도 드물다. 그녀가 야자나무 밑에 앉으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찾아가 재판을 받곤 했다. 이 신비스런 여인은 가나안의 강력한 왕이었던 야빈에게 대항할 연합군을 구성, 그 군대를 격퇴한다(판관 4,1-24 참조). 판관 입타는 매춘부의 아들이었다. 어머니의 직업 때문에 형제들에 의해 아버지의 집에서 쫓겨난 그는 이후 건달패를 이끌며 뒷골목을 전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입타가 장사였던 모양이다. 암몬인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해 왔을 때, 유대인들은 입타를 기억해냈고, 그를 암몬과 싸울 장수로 추대한다. 이때 입타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지도자의 자리를 보장받는다는 조건으로 전쟁에 참여해 승리한다. 마치 중국 고전 수호지(水湖志)의 양산박 도적 무리들이 송나라 황제의 명을 받고 정규군으로 편성돼 외적과 싸우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판관 시대의 이야기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삼손과 들릴라를 묘사한 판관기 13-16장이다. 삼손은 참으로 복잡한 인물이다. 책임을 회피하려는 어린 아이 같은 모습을 보이는가 하면, 폭력을 즐기는 듯한 인상도 보인다. 또 종교적으로 볼 때 금기인 환락에 푹 빠지는가 하면, 아름다운 한 여성과 사랑에 빠지는 로맨스적 분위기도 가지고 있다. 유대인은 이런 인물조차 판관으로 인정한다. 바로 삼손의 회개 때문이다. 유대인의 하느님은 돌아오는 아들을 늘 넓은 가슴으로 끌어안는다. 머리카락이 깎여 힘을 잃고 체포된 뒤, 두 눈까지 잃은 삼손의 절규 기도는 오늘날 까지도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리고 있다. “주 하느님,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이번 한 번만 저에게 다시 힘을 주십시오.”(판관 16,28) [가톨릭신문, 2009년 5월 31일, 우광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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