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식 신부의 신약 성경 읽기] 3. 신약 성경의 주인공 ‘예수’ (1) 신약성경은 ‘예수’의 이야기다. 예수가 누구이고, 왜, 어떻게 이 땅에 왔고, 무엇을 가르쳤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에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결혼 할 때 우리는 ‘아무나’하고 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를 믿을 때 ‘무조건’이 아니라 일단 예수를 알아보는 작업을 해야 한다. 예수는 2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다. 바로 ‘어제의 예수’와 ‘오늘의 예수’다. ‘어제의 예수’는 역사적, 신학적 관점에서 예수를 보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의 예수’는 신앙적, 신적 관점에서 예수를 묵상하는 것이다. ‘어제의 예수’ 이번 주에는 우선 ‘어제의 예수’에 대해 알아보자. 성서 학자들은 예수 탄생연도가 기원 원년이 아니라, 기원전 4년 이전으로 보고 있다. 성서에 헤로데 대왕이 예수를 죽이기 위해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두 죽이는 내용이 나온다.(마태 2, 16 참조) 그런데 이 헤로데가 기록에 의하면 기원전 4년에 죽었다. 따라서 학자들은 예수 탄생연도를 기원전 4년전,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기원전 6년 전 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어디에서 태어났나 마태오와 루카 복음서에는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다고 기록한다. 하지만 예수가 실제로 어디에서 태어났는지에 대한 물음은 아직까지 많은 논란이 있다.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만삭의 임신부가 베들레헴까지 호적조사를 위해 가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했지만 지금은 ‘어제의 예수’를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다음 주에 ‘오늘의 예수’를 말할 때 이 문제를 다시 말할 것이다. 가족상황은 어땠을까 아버지 요셉은 예수 30세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예수 공생활에 한번도 등장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성서는 또 예수에게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라는 동생들이 있었고 누이들도 있었다(마르 6, 3)고 기록하고 있다. 일부 개신교 신자들이 성모님께서 동정녀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런데 그 당시 형제와 누이라는 말은 사촌와 육촌을 다 포함해서 썼던 용어다. 직업은 무엇이었을까 그 당시 갈릴래아 나자렛 주민들은 농업과 목축업을 주업으로 했다. 예수도 공생활 전에는 당연히 농업 아니면 목축업 혹은 아버지의 직업을 따라 목수일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예수의 교육 수준도 검토해 볼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요셉의 직업을 미루어 보았을 때 고등교육은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다교 회당에서 구약성서를 읽을 수 있을 정도, 읽고 쓸 수 있을 정도의 초보적인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수의 활동 무대는 주로 갈릴래아 호수 북쪽에 위치한 가파르나움 포구를 중심으로하는 호수 주변으로 추정된다. 공생활 동안 어떤 일을 했을까? 공생활 기간은 3년이었다. 유다인들은 1년에 한 번 과월절에 예루살렘에 가는데, 요한복음을 보면 세 번 예루살렘에가서 과월절 축제를 참석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 예수는 공생활동안 무슨 일을 하셨을까. 우선 신(神)을 배척했다. 삼위일체의 하느님이 아니라, 재물을 우상시 하는 물신(物神), 주의 주장 사상 이념 따위의 이념신(理念神), 율법학자들의 법이나 체제 따위의 제도신(制度神)을 배척했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에 갇힌 삶을 살면 하느님을 향해 열려있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예수는 또 오직 하느님과 인간을 사랑하는 삶만을 살았다. 한마디로 경천애인(敬天愛人)의 삶이다. 예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일단 예수의 친척과 일가족들은 예수의 가출과 위험스런 활동상을 심히 못마땅하게 여겨 그를 고향으로 강제로라도 데려오려고 하였다.(마르 3, 20~22 참조) 갈릴래아 주민들도 처음에는 열광적으로 환영했으나 차츰 예수를 멀리한다.(마르 6, 1~4 참조) 율법학자 등 당시 지도급 인사들도 당연히 예수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예수가 자신들을 인정하지 않고 비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를 죽이려 했다. 예수는 제자들조차 모두 도망간 가운데 하늘과 땅 가운데 매달려 외롭게 죽었다. 실제로 예수는 하느님에게서 조차 버림받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비참함 속에서 십자가에 매달렸다.(마르 15, 34 참조) 인간적으로 보면 예수의 생애는 실패한 것이다. ‘어제의 예수’는 분명, 실패한 예수다. [가톨릭신문, 2007년 1월 21일,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 [정영식 신부의 신약 성경 읽기] 4. 신약 성경의 주인공 ‘예수’ (2) 지난 주에 역사적 관점에서 ‘어제의 예수’를 보았다면, 이번 주는 신앙적 관점에서 ‘오늘의 예수’를 조망하려 한다. ‘어제의 예수’는 분명 ‘실패한 예수’였다. 당시 모든 사람이 예수를 비난하고, 심지어 제자들도 모두 도망쳤다. 철저히 소외된, 말 그대로 처절한 죽음이었다. 그러나 예수 사건은 십자가 처형으로 막을 내린 것이 아니었다. 마치 다 끝난 줄 알았는데 극적인 반전으로 이어지는 미스테리 영화의 한 장면을 닮았다. 예수의 삶이 실패로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제자들이 갑자기 기존의 태도를 완전히 바꿔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r고 외치기 시작했다. 위험천만한 행동이었다. 언제 어디서 잡혀 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처음에는 몸 사리기 바빴던 제자들이 왜 갑자기 죽음을 각오하고, 용기를 냈을까. 뭔가 큰 변화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분명히 무슨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은 바로 성령께서 이 세상에 오신 사건이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요즘 말로 바꾸면 대충 이런 말이 될 것이다. “나는 다시 돌아간다. 그런데 내가 가면 곧바로 협조자가 올 것이니 그분이 내가 전했던 모든 말씀을 깨닫고 너희들이 다른 삶을 살 수 있도록 인도해 줄 것이다. 그 협조자가 곧 온다. 정말 온다. 기다려라. 내 말을 믿어라.”(사도 1, 4~5 참조) 과연 정말 그분이 오셨다. 이후 제자들이 완전히 바뀌었다. 바뀐 제자들이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1코린 15장 참조) 제자들은 겁도 없이, 죽음까지 각오하고“예수께서 부활하셨다”고 선포한다. 여기서 궁금증 하나가 생긴다. 예수 부활사건은 이성적으로는 알 수 없다. 인간 능력의 한계 때문이다. 인간 능력을 뛰어넘는 신비 차원에 있어서는 인간 이성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우리는 소나무에 대해 알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는 소나무의 크기와 외적 모양에 대해 알고 있다. 식물학자라면 어떤 토양에서 잘 자라는지, 어떤 비료를 주어야 하는지 등 소나무에 대해 더 많은 사실을 알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소나무가 소나무로 있게 하는 그 무엇에 대해 모른다. 소나무 씨앗에는 도대체 ‘어떤 무엇’이 있어서 나중에 소나무가 되게 할까. 우리는 이성적으로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학자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역사적인 관점에서 얼마든지 연구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선 우리는 이성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 이점에서 제자들은 학문적으로, 이성적으로 예수를 연구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신앙의 눈으로 예수를 바라보았다.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을 확 바꾼 것은 ‘성령’이었다. 이성의 힘이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새롭게’ 깨어난 것이다. 성령에 의해 새로운 삶이 열린 것이다. 성령에 의해 암흑에서 빛으로 나온 것이다. 이 점에서 인간은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그 이상의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은 분명 하느님을 생각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신을 생각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인간은 성령의 은총으로 궁극적인 것을 생각할 수 있는 영적인 힘, 초월적인 힘이 있다. 그 힘으로(성경 안에 녹아있는 성령의 은총의 빛으로) 다시 한번 예수를 바라보자. 예수의 경천애인의 삶은 십자가에서 실패한 것이 아니라, 성공한 것이다. 부활 사건을 우리는 믿는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따른다. 나만 그런가? 아니다. 현재 전 세계 인구의 사분의 일이 넘는 사람들이 예수의 삶을 본받으며 살고 있다. 실패한 삶이라면 누가 그 삶을 본받으려 하겠는가. 적어도 15억 이상의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고 있는데 과연 예수의 삶은 실패한 것인가. 아니다. 대 성공이다. 예수님의 삶은 크게 성공한 삶이다. 그 삶의 현존, 성공한 예수의 현존이 바로 성경 속에 있다. [가톨릭신문, 2007년 1월 28일,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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