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식 신부의 신약 성경 읽기] 5. 성경 안에 그리고 이 세상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 세상 어디에나 현존하시는 예수 훈련소에 갓 입소한 훈련병들은 낮선 환경과 고된 훈련 때문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훈련이 끝나거나 혹은 아침 점호 때 교관들은 그런 훈련병들에게 각자 고향을 향해 서라고 한다. 그리고 각자 ‘어머니 은혜’를 부르라고 한다. 그러면 ‘백이면 백’ 훈련병들은 눈물을 펑펑 쏟는다. 훈련병들의 마음속에는 “몸 건강히 잘 지내다 와라”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묵주기도 하며 잘 인내해라” “꼭 이불을 잘 덮고 자라”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남아있다. 어머니 말씀이 죽지 않고 아들의 마음속에 살아 생동하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의 말씀이 아들의 마음속에 현존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서를 읽을 때 소설책 읽듯이 해서는 안된다. 말씀 한마디 한마디에 살아계신 예수의 현존,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초월적 방법으로 현존하시는 예수를 느껴야 한다. 예수는 무소부재(無所不在), 세상 어디서나 현존하고 계신 것이다. 예수는 2000년 전에 이스라엘에서 살다가 돌아가신 분이 아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역사와 함께 계시면서 역사를 섭리하고 계시는 그리스도요 주님이시다. 그런데 부활한 그리스도의 존재 양식은 우리의 존재 양식과 다르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에 제약된 삶, 생성소멸의 법칙에 따르는 삶을 살지만, 부활한 그리스도는 시공을 넘어 영원하고도 무한한 차원, 생성소멸의 법칙을 벗어난 불사불멸의 세계에 있으신 분이다. 조금 말이 어려워졌다.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는 어떤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나면 ‘죽었다’고 한다. 이처럼 죽은 사람은 지금의 시간과 공간 안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죽고 나면 빚도 값을 수 없고, 부동산 매매도 할 수 없다. 죽은 사람에게는 부동산 중계인이 찾아가지 않는다. 하지만 예수는 3차원 4차원, 아니 5차원, 6차원, 무한대 차원(신비적 차원, 초월적 차원, 영성적 차원)에서 활동하고 계시기에 이 땅에서 우리와 함께 현존하고 계신다. 우리는 그 신비적 초자연적 무한대 차원을 모른다. 그런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는 그런 인간을 위해 우리의 차원으로 내려오셨다. 이 사건을 우리는 은총이라고 부른다. 인간이 성서를 기록할 수 있도록 해 주셨고, 또 성사를 통해 당신을 만날 수 있게 해 주셨다. 그리고 당신의 그 무한대 신비적 차원의 세계로 초대하신다. 초대받았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연히 그 초대에 응해야 한다. 철저히 실패했던 예수 그리스도인은 부활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죽음으로 끝을 보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부활에 근거해 초월적 돌파구를 갖는다. 하느님께서 우리 역사 안에 함께 계시는 한 우리는 하느님 뜻에 맞는 초월적 돌파구를 언제나 찾아 낼 수 있다. 그 초월적 돌파구를 찾아 나 자신부터 차근차근 부활하신 예수님 뜻대로 살아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예수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활동하기에 세상사는 우리들 눈에는 예수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존재하지 않는 분 같을 때도 있다. 그러나 안 계시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믿고 따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은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까. 우리는 2000년 전 철저하게 실패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셨던 예수의 모습을 따라가야 한다. 그것이 싫으면 신앙생활을 그만두어야 한다. 철저하게 실패했던 예수의 그 가르침을 우리는 받아들여야 하고 삶의 모범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다면 그 모범은 무엇인가. 예수의 가르침과 삶 전체는 하느님을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경천애인의 삶으로 짜여 있고 종합되어 있다. 주님을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 그것이 우리가 성경과 이 땅에 현존하는 예수를 본받고 드러내는 것이다. 때론 예수를 따르고 하느님을 공경하는 것이 시간이 아깝게 느껴질 수도 있다. 성당에 갈 시간에 돈을 버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할 수 있다. 성당 봉사에 열심 하다가도 문득 ‘내가 이거해서 뭐하나, 나 혼자 편안하게 남에게 손해주지 않고 잘 살면 될 텐데 왜 이런 고생을 사서하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럴 때 성경을 펴자. 그리고 예수의 말씀과 예수의 현존을 생생하게 느껴보자. 그리고 ‘예수님 은혜’를 기도하며, 눈물 한번 펑펑 쏟아보자. [가톨릭신문, 2007년 2월 4일,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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