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식 신부의 신약 성경 읽기] 7. 신약성경 속 하느님 나라 신약성경 전체를 한마디로 요약하는 성경구절은 무엇일까. 신약 전체를 한마디로 묵상할 수 있는 성경 구절이 있을까. 있다. 바로 마르코 1장 15절의 말씀이다. 이 구절은 예수가 이 땅에 온 이유를 한마디로 축약하고 있는데, 바로 “회개하라. 그리고 복음을 믿어라”이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 15)이다. 이 가르침은 예수가 세례 받은 후 당신의 사명을 실현시키기 위해 여행을 막 떠나시려는 시점에서 나온 것이다. 말 그대로 예수의 첫 번째 가르침인 것이다. 부처의 첫 가르침이 사성제 고집멸도(苦集滅道)인 것 처럼 예수의 첫 가르침은 ‘하느님 나라’였다. 기독교나 불교의 모든 가르침과 교리는 모두 이 예수와 부처의 첫 가르침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예수에게 있어서 ‘하느님 나라’는 실로 중요한 문제였다. 그래서 공관복음에는 하느님 나라, 아버지의 나라, 하느님의 왕권, 당신의 나라 등 관련 표현이 98번이나 나온다. 세분하면 마르코 복음서에 14번, 루카 복음서에 36번, 마태오 복음서에 48번 나온다. 예수님은 12제자를 파견하실 때도(마태 10, 5~15; 마르 6, 7~13 참조), 세례자 요한에 대해 말할 때도(마태 11, 7~19; 루카 7, 24~35), 최후의 심판을 이야기 하실 때도 (마태 25, 31~46) 하느님 나라를 말씀하신다. 문제는 하느님 나라가 인도, 캐나다, 독일에 가듯이 그렇게 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는 데 있다. 하느님의 나라는 공간적인 개념으로 생각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개념이다. 지금은 알 수 없으나 하느님은 언젠가는 우리를 당신 차원으로 초월시켜, 몸과 정신과 영을 완전히 변형시켜 주실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 참여시키실 것이다. 아니, 이미 참여시키고 계신다. 루카 복음 17장 20절과 21절을 읽어보자.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하느님나라가 언제 오겠느냐고 묻는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 말씀 하나하나를 듣고 꼬투리를 잡으려던 사람들이다. 예수의 말씀에 대해 충분한 연구를 했었던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래서 예수 가르침의 핵심을 제대로 짚어낸 것이다. 예수 말씀의 핵심이 ‘하느님 나라’인 것을 알고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며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2006년 3월’이라는 식으로 말씀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의 대답을 들어보자.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 20~21) 참 어려운 말씀이다. 수많은 십자가의 길을 바치고 복음 묵상을 하지만 이 예수님 말씀에 깊이 동참한다는 것이 나 스스로도 쉬운 일이 아니다. 하느님 나라 가운데 살지 못하는 나 자신을 인식하는 고통만 따를 뿐이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와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 그런데 정작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살지 못하고 있다. 사순시기를 시작하며 ‘하느님 나라’를 통해 당신의 고통을 묵상해 본다. “아무도 건널 수 없었던 죽음의 강을 건너 주신 주님. 새로운 생명의 길을 걸으신 예수님 감사 드립니다. 당신의 그 사랑의 힘을 저와 온 인류에게 허락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아직 당신께서 말씀하신 하느님 나라를 내 안에서,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실현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것을 통해서 그것을 봉헌함으로써 십자가의 길에 동행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부담스럽고 힘든 그리고 무거운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즐거워서, 잘하는 일을 통해 하느님 나라를 드러내 보일 수는 없을까요. 어떤 사람은 기도를 잘해서, 어떤 이는 음식을 잘해서, 어떤 이는 노래를 잘해서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전하고 있음을 봅니다. 앞으로는 내가 못하는 것에 대해 잠시 생각을 접기로 했습니다. 내가 잘 하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이제 신명이 납니다. 기쁘게 십자가를 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신명나는 길로 초대해 주시기에, 수난이 슬프게만 다가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십자가의 길이 참으로 고맙게 느껴집니다. 이제 작은 하느님 나라가 제 마음 속에 와 있습니다. 아멘.” [가톨릭신문, 2007년 2월 25일,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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