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식 신부의 신약 성경 읽기] 8. 신약성경과 하느님 나라 예수는 우리에게 진리의 모든 것을 ‘확실히’ 밝혀 주었다. 실제로 예수는 “‘은밀히’ 이야기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스스로 밝혔다.(요한 18, 20 참조) 예수는 당신이 가장 강조한(신약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인) ‘하느님 나라’에 대한 모든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확실히 그리고 명확히 밝힌 것이다. 그런데 정작 인간은 신약성경에 담긴 이 ‘밝혀진 확실한 진리’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럴까. 가장 큰 이유는 우선 하느님이 당신의 나라(하느님 나라)를 ‘은밀히’ 다스리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있는 듯 없는 듯,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은밀히’ 봄이면 새싹을 틔우고, 여름이면 비를 내리고, 가을이면 낙엽이 떨어지게 한다. 달로 인해 밀물 썰물이 일어나게 만들고, 지구가 정확한 궤도로 태양 주위를 돌게 한다. 또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수많은 별을 탄생시키고, 소멸하게 한다. 인간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주도권을 가지고 “이래라”“저래라”하지 않는다. 하느님이 갑자기 ‘짠’하고 나타나 “이렇게 해라”“저렇게 해라”라고 말하면 좋을텐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하느님은 자유의지를 가진 우리의 내면에 그저 ‘은밀히’속삭일 뿐이다. 하느님 나라에 대해 우리가 제대로 인식하기 어려운 것도 이러한 ‘은밀함’ 때문이다. 이제 하느님의 이 은밀한 속삭임, 하느님 나라에 대한 계시에 귀 기울여 보자. 하느님 나라는 미래성(아직 오지 않은 하느님 나라)과 현재성(이미와 있는 하느님 나라)으로 나눠 생각해 볼 수 있다. 루카복음 10장 9절을 읽어보자. 예수님은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라고 말한다. 하느님 나라는 ‘앞으로’다가올 나라인 것이다. 곧 ‘미래의 나라’다. 그런데 바로 뒷 부분에 이어지는 루카복음 11장 20절에는 전혀 다른 말이 나온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미래의 나라인 동시에 이미 우리에게 와 있는 ‘현재의 나라’라는 것이다. 이해하기 어렵다. 이 말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하느님 차원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2, 3, 4차원 더 나아가 무한차원, 아니 그 차원 조차 뛰어넘는 초월적 존재다. 그 초월적 입장에서 볼 때 ‘미래’와 ‘현재’의 구분은 없어진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그러나 아직’인 나라인 것이다. 과연 그 하느님 나라는 어디에 있는가. 분명한 것은 ‘이미’ 하느님 나라는 시작됐다는 점이다. 그리고 예수의 인격과 업적 속에서 계속 실현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웃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해야 한다. ‘아직’ 오지 않은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 ‘이미’ 이웃의 모습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만나야 한다. 이웃들의 모습 안에 살아있는 하느님 나라를 발견할 때,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할 수 있다. 옆집 사는 할머니, 앞집 사는 아주머니의 모습에 예수가 생생히 살아있다. 예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곧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요한 19, 26~27) 예수는 요한에게 마리아가 ‘나의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너의 어머니’라고 말했다. 여기서 ‘나와 너’의 구분이 없다. 예수의 시각에서 볼 때 북한과 남한, 야당과 여당, 서로 불목하는 사람들 모두가 한 가족이다. 진리는 단순한 곳에 있다. 한 가족이 되는 나라가 바로 하느님 나라다. 상대방 속에 깃들어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하느님 나라다. 모든 것은 시작이신 하느님으로부터 나와서 마침이신 하느님께로 돌아간다.(묵시 21, 6;22, 13 참조) 이것이 인간의 영광이요 행복이다. 하루의 비결은 그 시작에 있다. 주님과 더불어 하루를 시작해야 한다. 그러면 앞으로 나아갈 길에 필요한 은총을 주실 것이다. 아침마다 주님의 발치서 무릎을 꿇고 이렇게 기도하자. “주님은 길이시니 저는 당신의 발자국에 따라 걷고 당신을 본받고 싶습니다. 이웃의 모습 속에서 당신을 발견하게 하소서. 그리고 이미 우리에게 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느끼게 하소서. 그래서 아직 오직 않은 하느님 나라 건설에 이바지 하게 하소서. 주님은 진리이시니 저를 깨우쳐 주소서. 주님은 생명이시니 저에게 은총을 내리소서. 아멘.” [가톨릭신문, 2007년 3월 4일,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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