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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6-06 조회수3,504 추천수0

[정영식 신부의 신약 성경 읽기] 17.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1)

 

 

갈라티아서는 바오로 사도가 54년경 쓴 편지다. 바오로 사도가 3차 전도여행 중인 시점이다. 갈라티아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강조하는 것은 ▲ 믿음과 ▲ 이웃사랑이다.

 

조금만 눈썰미가 있는 사람은 여기서 이상한 점이 있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분명 예수는 우리에게 ▲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 이웃 사랑을 말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루카 10, 27; 마르 12, 29~31; 마태 22, 34~40 참조)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사랑하라”고 하지 않고 “믿어라”라고 말한다(갈라 2장 참조). 왜 그럴까.

 

바오로 사도는 제 3차 전도여행 중에 갈라티아 신자들이 분열되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분열을 어떻게든 막기 위해 지금 이 편지를 쓴 것이다.

 

분열은 지금 여기서도 늘 일어나고 있다. 지금도 많은 본당에는 레지오마리애파가 있고, 꾸르실료파가 있고, ME파가 있고, 성령기도회파가 있다. 이런 저런 단체에 가입하지 않는 신자들도 “난 본당신부파” “난 수녀님파”한다.

 

이 모든 문제는 왜 생길까. 바로 하느님 사랑은 둘째치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 그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갈라티아서 1장을 읽어보자.

 

“그리스도의 은총 안에서 여러분을 불러 주신 분을 여러분이 그토록 빨리 버리고 다른 복음으로 돌아서다니,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다른 복음은 있지도 않습니다.”(갈라 1, 6~7) 오직 하나밖에 없는 복음을 믿어야 한다는 말이다.

 

당시 상황 속으로 좀 더 깊이 들어가 보자. 바오로 사도는 갈라티아 지방에 가서 열심히 예수님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다. 그리고 다른 지방으로 전도 여행하기 위해 갈라티아를 떠났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가 없는 사이에 이 지방에 유다인 그리스도교 신자들(유다인으로서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이 들어왔다. 그들은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복음만 믿어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우리들처럼 율법을 함께 지켜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갈라티아 신자들은 혼란에 빠졌다. 예수님도 유다인이 아닌가. 유다인들은 신앙의 본토에서 온 사람들로서 갈라디아 신자들에게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니 헷갈리지 않을 수 없다. “전에 왔던 바오로 사도는 그런 말씀 없으셨는데요”라고 말해 보았지만 유다인들은 막무가내다.

 

결국에는 몇몇은 율법은 지키고 몇몇은 지키지 않는 분열상황이 왔다. 지금 우리도 이런 경험을 많이 한다. 하느님 믿고 열심히 따르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다가와 “그것만해서는 안 된다. 이것도 해야한다”고 말하곤 한다.

 

혼란에 빠진 갈라티아인들에게 바오로 사도는 단호히 말한다. “복음은 하나다.”(갈라 1, 6~10 참조) 이 문제에 대해 바오로 사도가 얼마나 단호했는지는 “우리는 물론이고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한 것과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갈라 1, 8)라는 글에서 알 수 있다.

 

바오로 사도는 이어 자신의 말(복음은 오직 하나)을 설득하기 위해 자신이 전하는 복음은 사람이 만들어낸 복음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그 복음은 내가 어떤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은 것입니다.”(갈라 1, 11~12)

 

그리고 자신도 유다인으로서 누구보다 열심히 율법을 지켰다고 말한다.(갈라 1, 14 참조) “그랬던 내가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데, 내 말 좀 믿어 달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주장하는 바를 직설법으로 말한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되려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어떠한 인간도 율법에 따른 행위로 의롭게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갈라 2, 16)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사랑을 강조했다. 그런데 지금 중요한 것은 하느님 사랑은 둘째치고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문제가 대두된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드디어 이 율법과의 전면전을 선포한다. [가톨릭신문, 2007년 5월 6일]

 

 

[정영식 신부의 신약 성경 읽기] 18.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2)

 

 

지난 주 내용을 다시 정리해 보자. 바오로 사도는 분명히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갈라 2, 16)고 갈라티아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가 갈라티아를 떠난 후 유다계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방문해, “율법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갈라티아 신자들은 큰 혼동에 빠진다. 바오로 사도의 말을 따라야 하나, 아니면 유다계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말을 따라야 하나.

 

바오로 사도가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서간을 쓴 것도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다. 바오로 사도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결코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는다.

 

“아, 어리석은 갈라티아 사람들이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모습으로 여러분 눈앞에 생생히 새겨져 있는데, 누가 여러분을 호렸단 말입니까? 나는 여러분에게서 이 한 가지만은 알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율법에 따른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어서 성령을 받았습니까? 여러분은 그렇게도 어리석습니까? 성령으로 시작하고서는 육으로 마칠 셈입니까? 여러분의 그 많은 체험이 헛일이라는 말입니까? 참으로 헛일이라는 말입니까?”(갈라 3, 1~4)

 

바오로 사도가 이렇게 단호한 어투로 말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그만큼 바오로 사도가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바오로 사도는 율법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율법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도록,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의 감시자 노릇”(갈라 3, 24)을 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믿음이 온 뒤로 우리는 더 이상 감시자 아래 있지 않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도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다.

 

바오로 사도의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한다면, 우리야말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약속에 따른 상속자라는 것”이다.(갈라 3, 25~29 참조)

 

놀라운 통찰이다. 아니 이는 통찰을 넘어서는 것이다. 성령의 힘 없이는 이런 통찰이 어렵다. 유다인으로서 율법을 철저히 지켰던(율법이 생의 전부이던) 바오로 사도가 이렇게 탈 율법적인 사고를 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놀랍다. 성령의 작용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바오로 사도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우리도 어린아이였을 때에는 이 세상의 정령들 아래에서 종살이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느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니,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알아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떻게 그 약하고 초라한 정령들에게 돌아갈 수가 있습니까? 그것들에게 다시 종살이를 하고 싶다는 말입니까?”(갈라 4, 8~9)

 

지금도 많은 신자들이 토정비결과 사주팔자를 보고, 택일을 해서 결혼을 하고, 태어나는 아기의 작명(作名)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이래선 안된다.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곳으로 가야한다.

 

갈라티아 신자들이 이런저런 현혹하는 말에 혼란을 느꼈듯이 지금도 이런저런 가설에 혼동을 느끼는 신자들이 많다. 기(氣) 수련 등 많은 유사 신심행위들도 만연하고 있다.

 

이런 신자들에게 바오로 사도는 ‘큰 글자’로 편지를 쓴다.(갈라 6, 11) 바오로 사도의 서간 중에는 감옥에서 쓴 것도 있는데 이 갈라티아 서간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종이도 많이 구할 수 있고, 여유도 있다. 그래서 큰 글자로 큼직큼직하게 써 보낸 것이다.

 

이 ‘큰 글자’ 중에 유명한 말이 나온다. 바로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갈라 6, 14)다.

 

바오로 사도에게 있어서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 하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오늘날 의미로 설명하면, 구역장이 되고, 단체장이 되고, 꾸르실료 교육을 받았는지의 여부는 부차적인 것이다. 오직 새 창조만이 중요할 따름이다.(갈라 1, 15 참조)

 

바오로사도의 편지가 정말 멋있게 읽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신앙의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고, 혼란을 느끼는 신자들이 많다. 이런 사람들에게 바오로 사도는 말한다. “행복을 느끼던 여러분의 그 마음은 어디로 갔습니까?”(갈라 4, 15) [가톨릭신문, 2007년 5월 13일,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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