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식 신부의 신약 성경 읽기] 32.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은 ‘그리스도의 신비’에 관련한 내용을 ‘교회의 신비’와 연관지어,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물론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라는 이 신비는 콜로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도 언급된바 있지만 에페소 서간에서 더 깊이 있고 광범위하게 표현되고 있다. 서간은 먼저 그리스도를 통해서 받는 영적 축복이 얼마나 큰 것인지 설명한다. 여기서의 영적 축복은 단순히 ‘우리를 태어나게 하고’ ‘우리를 주재하고’ 또 ‘우리 죄를 용서하는 것’이라는 수준을 뛰어 넘는다. “하느님께서는 이 은총을 우리에게 넘치도록 베푸셨습니다. 당신의 지혜와 통찰력을 다하시어,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세우신 당신 선의에 따라 우리에게 당신 뜻의 신비를 알려 주셨습니다.”(에페 1, 8~9) 하느님의 심오한 뜻을 알 수 있는 ‘지혜’를 얻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이 있을까. 하느님의 영적 축복 중에 제일 큰 것이 바로 ‘지혜’다. 지혜는 하느님의 뜻을 ‘아는 것’이다. 삶을 살아가면서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다면 그것 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에 있을까. 하느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혼란스럽고 걱정하고 갈등하는 것이다. 서간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 지혜를 통해 알 수 있는 구체적 내용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선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 앞에 굴복시키셨으며 그분을 교회의 머리로 삼으셔서 모든 것을 지배하게 하셨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만물을 완성하시는 분이기에 그 분 안에서 완전하게 이루어지시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우리가 이런 거룩한 교회에 몸담게 된 것 자체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에페 1, 15~23 참조) 결국 우리는 은총을 통해 죽음에서 생명으로 거듭났고 결국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다.(에페 2장 참조)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며, 우리는 이방인도, 나그네도 아니다. 여기서 그 유명한 ‘모퉁잇돌’이라는 말이 나온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에페 2, 19~20) 모퉁잇돌을 중심으로 모인 그리스도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는 3장에 이어 4장으로 이어진다. 그리스도론과 교회론의 절묘한 조화가 여기서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는 모퉁이 돌을 중심으로 일치를 해야 한다.(에페 4, 1~16 참조)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교회가 어떤 존재인지 알았다. 우리가 왜 일치를 해야 하는지도 알았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바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다. 에페소 서간은 이 부분을 정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바로 ‘새로운 생활에로의 초대’다. 우리는 이제 새롭게 살아야 한다. 과거의 ‘헌 생활’이 아닌 ‘새 생활’을 해야 한다.(에페 4, 22~24 참조) 그 새 생활이 무엇일까. ▲ 거짓이 아닌 진실을 말하는 것 ▲ 화를 내지 않는 것 ▲ 악마에게 틈을 주지 않는 것 ▲ 도둑질 않는 것 ▲ 자신의 힘으로 좋은 일을 해서 곤궁한 이들과 나누는 것 ▲ 나쁜 말을 않는 것 ▲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않는 것 ▲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는 것 ▲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는 것 등이다.(에페 4, 25~32 참조) 이를 위해 서간의 저자는 영적 투쟁에 나서라고 촉구하고 있다.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에페 6, 11) 무장을 하려면 무기가 필요할 것이다. 6장 10절에서 20절까지 우리가 갖추어야 할 무기가 나열돼 있다. 우리는 ▲ 진리의 허리띠를 두르고 ▲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신고 ▲ 믿음의 방패를 잡고 ▲ 구원의 투구를 쓰고 ▲ 성령의 칼을 받아 쥐어야 한다. 참으로 아름다운 비유가 아닐 수 없다. 진리와 정의, 평화의 복음(성경)으로 가슴과 온 몸을 무장하고, 믿음의 방패와 구원의 투구, 성령의 칼을 가진다면 무엇이 두렵겠는가. 얼마 전 300여 명에 불과한 스파르타 군인들이 수십만의 페르시아 군대를 맞아 용감하게 싸우는 영화를 본 일이 있다. 진리와 정의 평화의 복음, 믿음, 구원, 성령으로 무장한다면 수십만, 수백만, 아니 수천만이 문제이겠는가. [가톨릭신문, 2007년 8월 26일,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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