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식 신부의 신약 성경 읽기] 39. 가톨릭(공동) 서간 (4) : 베드로의 둘째 서간 (상) 베드로의 둘째 편지는 첫째 편지와는 달리 격렬할 정도로 논쟁적이다. 또 첫째 편지와는 내용이나 표현법도 다르다. 그래서 이 편지는 첫째 편지를 쓴 사람과는 동일인물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물론 이 편지도 첫째 편지처럼 베드로 사도의 뜻을 잘 알고 있는 수행 비서가 베드로 사도의 말을 대필하거나, 혹은 그 사상을 정리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편지의 저자 문제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니 이쯤에서 넘어가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내용이다. 이 편지는 교회의 부패 문제와 거짓 가르침을 전하는 이들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여기서 오늘날 신앙인들의 신앙살이에 대해 조금 언급하고 넘어가야 겠다. 고려시대 말기 불교의 폐해는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유교도 다르지 않다. 불교와 유교 그 자체가 나빠서가 아니다. 그 진리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문제다. 조선시대의 그 요란한 당파싸움은 유교 자체가 문제를 안고 있어서가 아니다. 유교를 믿는 유생들이 자신들의 안위에만 집착했기 때문에 그렇다. 가끔 조계종에서 일어나는 폭력 사태도 불교 자체가 나빠서가 아니다. 사성제의 진리를 몸으로 깨닫지 못한 일부 스님들의 ‘집착’ 때문이다. 부처님은 “버려라”고 하는데 일부 스님들이 버리지 못한다. 그나마 불교와 유교는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자신들의 잘못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문제는 그리스도교다. 과거 불교가 고려를 망하게 하고, 유교의 사색당파가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기는 단초를 제공했듯이, 지금 어쩌면 우리나라를 망칠 종교는 그리스도교일지도 모른다. 불교와 유교는 이미 예전에 경험을 많이 했기 때문에 자숙하고, 조용하고, 성숙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현재 모습은 어떤가. 어떤 면에서는 ‘설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예수님은 설치지 않았다. 들떠있지 않았다. 늘 새벽에 일어나 외딴곳으로 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마르 1, 35; 루카 4, 42 참조). 바오로 사도가 “아주 신심 깊고 품위 있게, 평온하고 ‘조용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1티모 2, 2)라고 권고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신앙생활은 희생이다. 어느 정도 감수할 수 있는 ‘작은 희생’이 아니다. 십자가로 가는 희생이다. 종교는 어떤 학문보다 심오하다. 일반 학문에서는 느낄 수 없는 깊이가 있다. 일반 학문이 보통 정신(이성)적, 육신적 차원이라면 종교는 그것을 뛰어넘어 깊이 있는 영적 차원까지 들어간다. 수련, 말 그대로 스스로를 닦고 훈련하는 것이 종교다. 종교생활 조금만 하면 마치 다 한 것처럼 행동하는 이들이 있다. 많은 이들이 대충, 조금만 알면 무척 많이 아는 것처럼 설친다. 그래서 종교도 망치고 나라도 망친다. 종교의 깊이는 하느님의 깊이다. 하느님의 뜻을 깨달을 때까지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대충 세례성사 받고, 성경공부 조금 했다고 해서 신앙을 다 아는 것이 아니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의 지도자 계층에 있을 때 교회에 부패가 생긴다. 물론 조용하고, 깊이 있고, 성찰하는 그런 종교는 따분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불교가 서양에서 주목받는 것을 성찰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겉의 화려함이 아니라 내면의 깊이를 추구해야 한다. 인생의 의미를 이해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신앙이라는 것이 얼마나 심오한가. 오늘날 한국사회 그리스도교의 문제는 예수를 진정으로 깨달으려는 마음이 없다는데 있다. 그래서 교회도, 민족도 망친다. 건강하고 차분하고, 묵직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 하느님은 인류에게 가톨릭교회라는 큰 배를 주셨다. 작은 파도에 이리저리 흔들이는 조약배가 아니다. 전 세계 인구의 25%를 안고 있는 큰 솥단지다. 작은 불꽃에도 쉽게 달아오르는 양은냄비가 아니다. 불교의 대승불교라는 말 자체가 ‘큰 수레바퀴를 굴린다’는 의미다. 물론 소승불교를 폄하하기 위해 나온 개념이긴 하지만 ‘작은 수레바퀴’아닌 ‘큰 수레바퀴’를 굴리겠다는 그 포부가 어디인가. 노래방에 가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즐거움을 마다하라는 것이 아니다. 놀 때는 놀되, 묵직하고 가치 있는, 진정으로 아름다운 진리를 추구하자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가 보기에 당시 교회 내 부패와 거짓 가르침을 전하는 이들의 문제가 심각했다. 아는 척, 잘난 척, 높은 척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편지는 그들에게 보내는 호된 질책이다. [가톨릭신문, 2007년 10월 21일,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 [정영식 신부의 신약 성경 읽기] 40. 가톨릭(공동) 서간 (4) : 베드로의 둘째 서간 (하) 베드로의 둘째 서간은 그리스도인의 덕행·소명을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신자로서 어떤 덕(德)을 쌓아야 할까. 베드로 사도가 말한다. “그리스도는 당신이 가지신 하느님 능력으로 우리에게 경건한 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다. 그리고 우리를 직접 부르셔서 당신의 영광과 능력을 누리게 하셨다. 그러니 우리는 열성을 다하여 믿고, 그 믿음에 앎을 더하고, 앎에 절제를 더하고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신심을, 신심에 형제애를, 형제애에 사랑을 더해야 한다”(2베드 1, 3~10 참조). 참으로 아름다운 말씀이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크리스챤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이미’ 모든 것을 다 주셨다. 그러니 우리는 믿음 지식 절제 인내 형제애와 사랑의 덕을 쌓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의무이자 소명이다. 문제는 덕을 따라 살아가고 싶지만 우리 앞에는 많은 장애물들이 있다는 점이다. 그 중 하나가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들이다. 거짓 교사들은 지금도 주위에 많다. 이들은 파멸을 가져오는 이단을 끌어들여 구원의 길로 걸어가는 우리를 어둠의 길로 이끈다. 베드로 사도 당시에는 많은 거짓교사들이 있었다. 이들은 가르침을 과장해석하거나, 잘못된 가르침을 전했다. 교회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체계적으로 그리고 합리적으로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교육 받아야 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일부 종교와 천주교내 일부 평신도 양성 교육체계는 문제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가장 무서운 것이 자유주의 신학이다. 성경을 자기 뜻대로 해석하는 이들이 많다. 이런 자유주의 신학은 자신의 뜻을 곧 하느님의 뜻으로 착각한다. 자기마음대로 모든 것을 해석하다보니까 분파와 분열을 막을 길이 없다. 성령에 대한 해석도 마찬가지다. 성령은 탄탄한 기초를 그리스도에 둘 때 진정한 의미를 지닌다. 우리에게 주어질 계시는 이미 그리스도께서 다 보여 주셨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삶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잘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말 그대로 협조자다. 요즘 성령을 받는다며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성령은 정작 가까운 곳에 계시다.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열심히 그리고 차근차근 생활하다보면 내면으로부터 변화가 일어난다. 성령은 ‘굉장한 그 무엇’이 아니다. 신앙생활은 차분하게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본당을 중심으로 성숙시켜야 하는 것이다. 몰려다니는 것이 아니다. 성령에 일가견이 있다는 사람들이 주교님께 불순종하고 본당 사제와 주위 신자들을 우습게 여기는 일을 가끔 본다. 자신이 대단한 무엇이나 된 것처럼 착각한다. 겸손해야 한다. 성령을 가지고 장난치는 사람들, 거짓된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의 내면부터 돌아보아야 한다. “그들은 해악을 저지른 대가로 해악을 입을 것입니다”(2베드 2, 13). 종교는 근본적으로 그 구성원들이 자신을 희생해서 이웃을 향해서 즉 시민을 향해서 희생하는데 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나 하나’배부르게 잘 살게 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다. 당신을 희생해서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오셨다. 교회의 핵심은 예수님께서 인류구원을 위해 오셔서 당신 자신을 바치셨듯이 우리자신을 바쳐서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가 헌신적인 사랑과 희생을 실천하는데 있다. 베드로 사도는 거짓교사들에 대해 경고를 한 뒤, 바로 ‘주님의 재림’에 대해 언급한다. 당시 “주님께서 재림한다고 하는데 왜 빨리 오시지 않느냐. 재림하신다는 말이 거짓말이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나 보다. 베드로 사도의 대답은 이렇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날은 도둑처럼 올 것입니다. 그날에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사라지고 원소들은 불에 타 스러지며, 땅과 그 안에서 이루어진 모든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2베드 3, 8~10). 하느님은 우리의 회개를 기다리신다. 그래서 지금 이 시대는 자비의 시대다. 더 나아가 하느님께서 우리들이 변화되길 기다리며 많은 은총을 주시는 은총의 시기다. 그럼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첫 교황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신다.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을 구원의 기회로 생각하십시오”(2베드 3, 14~15). 우리는 준비해야 한다. 지금 여기서…. [가톨릭신문, 2007년 10월 28일,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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