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세계 - 구약] 창세기 12-50장(성조사) : 은총의 새로운 질서 창세기 12장부터 구원사의 새로운 장이 열리면서 유다 백성의 위대한 성조들인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시대가 전개된다. 아브라함과 두 아들(이스마엘, 이사악)이 하느님과 맺는 계약은 12장부터 25장 18절까지에, 이사악과 두 아들(에사오, 야곱)의 이야기는 25장 19절부터 36장 43절까지 기록되어 있다. 창세기의 끝부분인 37-50장은 야곱의 자손들, 특히 요셉의 생애를 전한다. 따라서 성조사(聖祖史)는 기원전 2000년경 아브라함의 이주로부터 2-3백 년 후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에 정착하기까지의 시대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성조들의 삶에 초점을 맞추어 그들이 나름대로 어떻게 구세주의 오심을 드러내주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아브라함은 사람의 욕망이나 육정(요한 1,13)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축복을 통하여 “많은 민족의 조상”(17,4)이 되었다. “나는 너에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떨치게 하리라… 세상 사람들이 네 덕을 입을 것이다”(12,2-3). 이 축복은 사도 바오로의 설명대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인 그리스도(갈라 3,16)에게 내려졌다(13,15).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후손 가운데 가장 위대한 분이며, 아브라함의 축복이 그분을 통하여 우리에게까지 전달되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면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따라서 약속에 의한 상속자들입니다”(갈라 3,29). 아브라함이 새로운 민족의 시조인 그리스도를 예시한다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사악은 성자로서의 그리스도께 시선을 돌리게 한다. 이사악의 삶은 그만큼 아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어린이다운 신뢰심으로 번제를 바치려는 아버지를 따라 모리야 산에 올랐다(22장). 이사악은 하느님을 ‘친구’로 대했던 아브라함과는 달리 순종과 두려움으로 하느님을 섬겼다(31,42 참조). 성조사는 그 궁극 목적인 야곱 가문의 형성에서 절정을 이룬다. 성조들이 그리스도를 예시하듯이, 야곱 가문은 교회 안에서 구체화된 영적 은총의 질서를 드러내주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에 대한 하느님의 부르심은 그가 참으로 교회의 시작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교회를 뜻하는 그리스어 에끌레시아(ecclesia)는 “부름받은 사람들의 공동체”를 의미한다. 여기서 부름받다라는 말은 인간이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세워진 새로운 질서의 세계 한가운데로 들어간다는 뜻을 갖고 있다. 그 첫 “개종자”인 아브라함은, 사람의 영광을 위해 하늘에 닿는 탑을 쌓으려고 안달하던 인간 중심의 바벨 문명권에 속하여 있었지만, “하느님께서 설계자가 되시고 건축가가 되셔서 튼튼한 기초 위에 세워주실”(히브 11,10) 도시를 찾아가도록 하느님께 부름받았다. 아브라함이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고 하느님의 친구가 되도록 한 힘은 그의 믿음이었다. “야훼를 믿으니 이를 갸륵하게 여기시었다”(15,6). ‘믿는다’는 히브리 말은 “다른 사람의 힘을 신뢰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사람의 생사를 쥐고 계시는…”(1사무 2,6)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느님의 힘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동정녀 잉태에서 드러난다. 이 두 신비는 아브라함이 겪은 두 사건에서 미리 나타나고 있다. 아브라함과 가임기가 지난 사라는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의 약속을 믿었다. 그들의 “웃음”은 구세주 탄생의 기쁜 소식을 믿고 주님의 날을 본(요한 8,56 참조) 사람들의 마음을 채웠던 기쁨의 표현이다. 아브라함은 죽었던 사람들까지도 살리실 수 있는 하느님을 믿었기 때문에 아들을 바칠 수 있었고, 과연 그 믿음대로 “그에게는 이를테면 죽었던 이사악을 되찾은 셈이 되었다”(히브 11,19). 성 아우구스띠노는 질문한다. “이는 바오로 사도가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당신의 아들까지 내어주셨다’(로마 8,32)고 한 바로 그분을 닮지 않았습니까? 또한 이사악이 번제 바칠 곳에 나무를 갖고 갔던 것처럼 주님께서도 자신의 십자나무를 지고 가셨습니다. 이사악 대신 봉헌된 수양은 누구이겠습니까? 아브라함이 수양을 발견했을 때 그 양은 가시덤불에 걸려 허위적거리고 있었습니다. 이 수양이, 봉헌되기 전 가시관을 쓰셨던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신국” 16,32). 아브라함의 ‘도시’에 세워지고 있던 은총과 믿음의 새 질서는 하느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계약에 예시되어 었다. 이 계약은 희생 제물을 통하여 공식적으로 이루어졌고, 할례(17장)로써 조인되었다. 할례는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으면서 지녔던 “내적인 회개”의 외적인 표현이다. 할례를 받기 전에 믿음을 통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졌던 것이다(로마 4,11). 성 아우구스띠노가 표현한 것처럼 할례는 “낡은 육체를 벗어버리는 본성 회복”을 의미한다. 할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옛 사람이 죽고 그리스도 부활의 힘으로(골로 2,11-12) 새 사람이 태어나는 세례로 완성되었다. 은총의 새로운 질서가 “이사악의 혈통”(25,19-36,43)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사라처럼, 이사악의 아내 리브가도 이사악이 빌 때까지 아이를 갖지 못하였다. 리브가의 아이들이 뱃속에서부터 싸우는 것을 두고 주님은 말한다 : “두 민족이 들어 있다 …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될 것이다”(25,23). 이에 대하여 바오로 사도는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 “그 아들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따라서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하느님께서는 리브가에게 ‘형이 동생을…’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선행을 보시고 불러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뜻에 따라 불러주시며… 계획을 이루십니다…”(로마 9,11-13). 오직 하느님의 사랑만이 구원의 원천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그분은 계속해서 출생 순서를 뒤집어 놓으신다. 카인이 아니라 동생 아벨을, 형 에사오가 아니라 아우 야곱을 택하신다. 요셉의 작은 아들 에브라임이 야곱의 축복을 받고, 이새의 막내 아들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는다(1사무 16,1-13). 여기서도 우리는 곧바로 그리스도께 이르는 길을 본다. 그리스도는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가 작은 아들을 더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사악의 축복 사화(27장)를 푸는데도 역시 그리스도가 열쇠가 된다. 형인 척하여 아버지를 속인 야곱의 거짓말은 커다란 영적 의미를 갖고 있다. 거짓말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신비인 ‘강생과 우리 죄를 대신한 십자가’ 라는 또 다른 “비밀”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성 아우구스띠노는 설명한다 : “궁극적인 결과를 놓고 판단할 때, 야곱이 쓴 염소 가죽은 죄를 나타내고, 야곱이 다른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지는 것을 의미합니다…”(거짓말에 대하여 10). 야곱의 후손 중에서(37-50장) 요셉은 그리스도의 전형으로서, 유다는 그리스도의 조상으로서 특별히 두드러진다. 요셉은 형제들의 시기를 받아 구덩이에 갇혔다가 팔렸으며, 죄수가 되었고 나중에는 파라오의 왕궁에까지 들어가서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에집트도 구하게 된다. 그의 생애는 야곱의 후손들에게 거부당하고 은전에 팔리며 고성소에 내려갔다가 성부에 의해 들어높여진 그리스도를 예언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야곱이 손자들을 때도 축복할 하느님의 사랑은 다시 아우 쪽을 택한다(48,8-20). 야곱은 열두 아들에게 내린 유언을 통해 유다 지파에서 메시아가 태어날 것이라고 말한다. “왕의 지팡이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 포도주로 옷을 빨고 … 겉옷까지 빨리라”(49,10-11). 그의 옷은 교회를 의미한다. 십자가에서 흘린 피와 성체성사로써 교회를 깨끗하게 씻는 것이다. 오직 유다의 자손만이 메시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유다의 며느리인 다말의 몸가짐을 이해할 수 있다(38장 참조). 다말의 행실은 메시아의 어머니를 기다려온 교회의 갈망을 예시한다. 여기서도 다말의 쌍둥이 아들 중 아우인 베레스가 다윗의 조상이 되고 결과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Damasus Winzen, Pathways in Scripture에서 강동성 편역) [경향잡지, 1988년 2월호, 다마수스 빈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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