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세계 - 구약] 토비트, 유딧, 에스델 : 가정과 여성과 민족의 책 예루살렘이 바빌론의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점령되고 파괴된 후 이스라엘은 더 이상 정치적 실체로서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정신은 유다인들의 각 가문에서 더욱더 충실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율법교사들과 예언자들, 현인들의 노력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흥미있는 단편들을 통해서 신앙의 불꽃이 타오르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던 것이다. 이 단편들은 단순히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었다. 다만 이 단편의 저자들은 세부 묘사에서 정확한 역사 그대로를 보여주지 않았을 뿐이었다. 역사적 인명과 지명 등이 부정확하다는 비현실적 특성 때문에 토비트와 유딧서는 유다교 정경에 들 수 없었고, 에스델서는 오랜 논쟁 끝에 그 일부가 정경에 삽입되었다. 가톨릭 교회는 이 세 권을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말씀이 담겨 있는 책이라고 선포하였다. 실제로 이 세 권의 책들을 피상적이나마 들여다본다면 참으로 그 안에 하느님의 진리의 빛이 충만하며, 각 권이 전체 구약성서 내에서 매우 유기적이고도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토비트서는 분명히 가정의 책으로서, 그리스도교 신비의 핵심이랄 수 있는 성부와 성자와 신부인 교회의 관계를 계시하고 있다. 유딧서는 여성의 책으로서, 하느님께서 은총의 분배를 통하여 여성에게 맡기셨던 역할을 보여준다. 에스델서는 민족의 책으로서, 모든 시대를 통해 가장 심각했던 문제 중의 하나인 반유다주의 및 유다인과 이방인 사이의 문제를 푸는 열쇠가 되고 있다. 토비트서 토비트 - “야훼는 선하신 분”이라는 뜻 - 서는 아시리아에 포로로 잡혀갔으며 각각 외아들과 외동딸을 가진 덕망높은 두 부부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납달리 지파의 경건한 사람인 토비트는 동포들을 지극한 애정으로 대한다. 맹인이 된 그는 외아들 토비아를 메대로 보내어 부채를 받아오게 하는데 나중에 라파엘 천사로 드러나는 안내자를 동행시킨다. 토비아와 천사는 사라라는 외동딸을 가진 친척 라구엘의 집에 머물게 되고, 과부였지만 처녀인 사라와 결혼한다. 사라는 일곱 번이나 결혼했지만 남편들이 결혼식날 악령에 의해 모두 살해되었다. 토비아는 천사가 충고해 주는 대로 티그리스 강에서 잡았던 물고기의 심장과 간으로 악령을 물리치고, 아내와 함께 집으로 돌아와 물고기의 쓸개로 아버지의 시력을 되찾아주었고, 후손의 후손들을 볼 때까지 오래오래 살았다. 이 짧은 책은 훌륭한 가문 정신이 언제나 선택된 백성들의 귀중한 유산이 되었다는 것으로 가득 차 있다. 구약성서에서 구원의 역사는 바로 가문들의 역사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후손들”로서 존재한다. 구세주 그리스도 역시 아브라함의 ‘후손’이었고 다윗 가문의 나자렛 성가정에서 태어났으며, 구원 역사가 이 성가정에서 완성된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깊은 영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구약성서는 토비트서에서 토비아와 사라의 결혼(6-8장)을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에 일치의 표지가 되도록 들어높이고 있다. 토비아와 사라의 결혼 이야기는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에 이뤄진 결혼의 예언이다. 과연 누가, 앞서 죽은 일곱 남편처럼 되고 싶어하고, 죽음의 세력 앞에 자신을 내어놓겠는가. 여기에, 교회와 한몸이 되기 위하여 아버지로부터 받은 영광을 포기한 하느님 아들의 사랑이 계시되고 있다. 유딧서 유딧서의 주제는 “하느님께서 여성의 손으로 구원해 주셨다”이다. 성서에서 여성은 이기적인 세상과 싸우는 하느님의 동료로 등장한다. 여성은 새 생명을 잉태하고 인내로이 키우며, 출산의 고통을 당하고, 그 생명을 양육하면서 스스로를 희생하도록 창조되었다. 여성과 타락한 악마(창세 3,15) 사이의 대립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내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한 나자렛 마리아에게서 승리로 완성되었다. “이스라엘의 순결한 딸”들은 마리아에게서 완성될 이 승리를 향해 끊임없이 준비해 왔다. 유딧이란 유다 여자라는 뜻을 가진 베툴리아의 과부로서 “이스라엘의 순결한 딸”을 상징한다. 강압 정치와 책략을 꾸미는 통치자들과 무력의 세계가 전반부에 서술되어 있고, 남성과는 다른 여성만이 가질 수 있는 능력으로 일어서는 유딧의 활약이 이어지고 있다. 유딧이 지닌 능력의 근원은 신앙이었고, 그의 신앙은 하느님의 자비를 신뢰히는 것이었다. “하느님은 사람과는 달리 으르거나 달랜다고 해서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 그분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를 기다리면서 도와주십사고 간청합시다”(8,16-17). 그리하여 주님은 젊은이들도 아니요 힘센 장사들도 아닌 연약한 한 여성의 손에 강력한 홀로페르네스를 붙이셨고, 유딧은 이뤄놓은 공로와 칭송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시므온의 딸” 즉 “이스라엘의 순결한 딸”로 남는다. 에스델서 유딧과 그녀의 아버지 시므온(창세 34,25-26 참조)이 보여준 것처럼 에스델서에서도 유다의 민족주의가 꽉 차 있다. 에스델서를 읽노라면 이방인들과 유다인들 사이의 문제에서 유일한 해결책이란 이방인들이 유다인들을 몰살시키든지 아니면 유다인들이 이방인들을 전멸시키는 것 중의 하나라는 느낌을 갖게 된다. 에스델서 한 가운데 교수대인 50자짜리 큰 기둥이 서있다. 과연 누가 거기에 매달릴 것이냐가 에스델서의 관건이다. 유다인 모르드개인가 아니면 이방인 하만인가? 키스의 아들인 모르드개는 베냐민 지파 사울 가문(1사무 9,2) 출신이다. 하만은 사울이 살려주었던(1사무 15,8) 아말렉왕 아각의 자손이다. 이 두 적수들의 핏줄 싸움이 에스델서의 핵심이다. 야곱의 아들 중 유일하게 거룩한 땅에서 태어났던(창세 35,16) 베냐민과 그의 지파는 항상 극단적인 행동으로 흘렀다. 한편 하만은 전형적인 반유다주의자였다. 자기에게 굽히지 않던 모르드개로부터 모욕을 받았다고 생각한 하만은 모르드개가 유다인이라는 것을 알고 유다 민족 모두를 전멸시키기로 작정한다. 왕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오늘날까지도 반유다주의자들이 즐겨 쓰는 말이 나온다(3,8 참조). 야곱과 에사오의 해묵은 갈등이 에스델서에서 두 민족간의 정치적 싸움으로까지 변해 갔다. 이방인들을 학살시키는 내용이 왜 정경에 삽입되었는지 분명히 의문이 갈 것이다. 하지만 유다 민족주의 정신이 구약성서에서 결코 칭찬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야곱은 분명히 시므온과 레위의 과격한 행위에 대해 의절 의사를 보였다. “내가 그들을 야곱의 자손 가운데서 분산시키고 … 흩뜨리리라”(창세 19,5-7). 이 때문에 추가 단편이 없이는 완전치 않은 에스델서는 유다 정경에서 제외되었고, 가톨릭은 70인역에 따라 정경으로 받아들였다. 가톨릭이 받아들인 에스델서는 모르드개의 꿈(10,4-13; 11,2-12)도 포함되어 있다. 민족주의자 모르드개와 반유다주의자 하만이 서로 싸우는 동안 작은 샘이 나타나 강으로 불어나고 태양이 뜨고 날이 밝아온다. 그것이 바로 교회의 구현인 에스델(10,6)이다. 백성과 나라를 구하겠다는 광신적 유다 민족주의는 이방인들에게 “유다인의 왕”을 내줌으로써 과오를 범했고, 이방인들은 그 왕 그리스도를 죽이는 잘못을 저질렀다. 하만의 기둥은 십자가로 대치되어, 거기에 걸린 사람은 유다인도 이방인도 아닌 하느님의 아들이었다. 그분은 둘 모두를 위해 죽으심으로써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느님과 화해시키고 원수되었던 모든 요소를 없이 하셨다”(에페 2,16). 그리하여 유다인과 이방인은 성부께 가까이 갈 수 있게 되었다. 유다인이건 이방인이건 다만 그가 스스로 탕자(루가 15,11-32 참조)라는 것을 깨닫기만 하면 된다. (Pathways in Scripture에서 강동성 편역) [경향잡지, 1988년 12월호, 다마수스 빈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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