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세계 - 구약] 마카베오 상하 : 승리는 하늘로부터 토비트, 유딧, 에스델 서들은 바빌로니아 유배 생활 동안 신앙의 빛이 여인들의 정절을 통하여 유다 가정 안에서 불타 오르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마카베오(쇠망치라는 뜻)서에서는 전혀 다른 세계, 그 이름이 보여 주듯 남정네들의 세계가 펼쳐진다. 마카베오라는 이름은 기원전 2세기에 시리아 왕들의 학정 하에서 종교 자유와 정치적 해방을 위하여 투쟁한 유다언의 영웅들, 곧 마따디아의 아들 유다와 그 형제들 그리고 막강한 시리아 군에 용감하게 대항하였던 그 영웅적인 전투에 참가한 모든 유격대 전사들에게 붙여졌다. 그들은 하느님의 법에 대한 심오한 사랑으로 맺어진 형제들이었으며, 민족을 팔아 먹은 반역자들에 대한 분노와 이교도들의 신성 모독에 대한 격렬한 증오로 가득찬 진정한 전우들이었다. 타협이란 그들이 가장 경멸하는 것이다. 어떠한 순간에도 일신의 안일을 버리고, 그들은 모세법에 따라 생명의 길을 위하여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마카베오서는 구원을 위하여, 형제들을 위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싸우는 전사들의 용덕을 노래하고 있다. 곧 순교자의 용기를 찬양하는 책이다. 유배라는 거대한 시련은 이스라엘 역사에 결코 지워지지 않을 자취를 남겼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정신의 변혁 곧 정화였다. 모든 것을 빼앗긴 사람들의 관심은 국가나 제왕의 영광이라는 허울이 아니라 삶의 핵심인 내면 세계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세세 대대로 자신들의 운명을 인도하는 별, 곧 하느님의 이름을 찾았다. 불타는 떨기 속에서 모세에게 가르쳐 주선 이름 야훼(나는 곧 나다.), 그 이름의 의미가 이제야 사람들의 가슴 속에 깊숙히 파고들어 삶의 온갖 구석에까지 스며들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을 빼앗긴 귀양살이는 “하느님의 이름”을 가르치는 학교였고, 거기서 그들은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회당을 중심으로 일어난 새로운 종교 운동은 모세의 율법 곧 성서를 민중의 책으로 삼았다. 성서가 제단을 대신하고, 율법 학자들이 사제들의 자리에 들어선 것이다. 그러한 발전은 전체적으로 보아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율법(Torah), 사제직, 왕국의 세 왕관이 있다. 율법의 왕관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며, 율법의 왕관을 차지한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는 세 가지 왕관을 차지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섭리는 선택받은 민족의 이 세 가지 희망을 완전히 무산시킴으로써 구세주 예수의 내림을 준비하는 마지막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 막대한 보물을 안고 사제들의 엄청난 수입을 보장하여 주는 성전은 외국 세력이 넘보는 약탈의 대상이 되었고, 유다 마카베오가 치열한 혈전으로 되찾은 예루살렘 성채 곧 정치 권력도 이두메아 사람 헤로데에게 빼앗기고 만다. 신앙의 순수성을 보존한다고 바리사이파들이 쳐놓은 ‘울타리’(계율)도 결국 모세법을 가려 버리고 말았다. 바빌로니아 유배 이후 재건의 전시대는 분명 이러한 성전, 예루살렘, 율법학자들에 대한 환멸을 부각시켜 간다. 이 역사적인 요소들은 하느님께서 이사야와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 당신 백성과 맺으신 새로운 계약의 성취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 또한 마카베오의 비극이 있는 것이다. 온갖 힘을 다 기울여 성전을 정화하고 더없는 용맹을 떨치며 국가를 재건하였음에도 이 모든 것이 결국엔 허사로 돌아가고 만다. 위대한 전사들의 용맹을 기록한 이 마카베오서는 정통 유다인들의 눈에 불온 문서로 보여 정경(正經)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중대한 의미를 담고 있는 성서다. 마케도니아 왕 알렉산드로스의 정복 물결에 따라 들어온 그리스 문화의 침범으로 야기된 유다이즘과 헬레니즘 사이의 투쟁(기원전 2-3세기)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집트를 비롯 지중해 동부 연안에 세워진 수많은 그리스 식민지로 인하여, 그리스의 언어, 예술, 풍속, 사상 등이 도처에 번져 나갔다. 예루살렘에서도 바로 성전 근처에 운동장이 세워져, 사제들마저 운동 경기에 휩쓸려 제사를 게을리 하게 되었다(2마카 4,14). 그리스화 운동은 극도에 달하여,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유다인의 경신례를 이교도 예배로 대체시키고자 시도하였다. 그는 아시리아나 바빌론 왕들의 전철을 밟아 칙령을 내렸다. “모든 사람은 자기 관습을 버리고 한 국민이 되어야 한다”(1마카 1,41-42). 이것이 바로 마카베오 폭동을 일으켰다. 마카베오 상권의 도입부(1-2장)는 알렉산드로스의 정복 이후 팔레스티나의 전반적인 상황을 묘사하며, 마카베오 형제들의 아버지인 마따디아의 용기와 죽음을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다. 제2부(3,1-9,22)는 유다 마카베오의 전투에 관한 이야기다. 유다는 유격전을 펴 막강한 시리아 군대를 물리쳤다. 병력과 무기 등 군사력의 열세를 하느님께 대한 신앙으로 극복하였다. “전쟁의 승리는 군대의 다수에 달린 것이 아니고, 하늘이 내려 주는 힘에 달려 있다”(3,19). 이것이 유다의 전투 원리였다. 안티오쿠스가 성전을 약탈한 지 삼 년 만인 기원전 165년에, 유다는 성전을 정화하고 재봉헌하였다. 성전을 정화하고 성소에 등불을 다시 밝힌 이 사건을 기념하여, 유다인들은 지금도 섣달이면 “빛의 축제”(봉헌절, hanukkah)를 지낸다. 성소의 등불은 어떠한 외부 세력에 의해서도 결코 꺼지지 않는 신앙의 빛을 상징한다. 유다는 그 후로도 이웃 민족들과 외국 군대의 침략에 맞서 이스라엘을 지키고 마침내는 시리아의 니가노르를 패퇴시키며 대승을 거두었다. 이에 분격하여 다시 침공해 온 시리아 대군 앞에서, 유다의 부하들은 겁을 집어먹고 도망치기에 바빴다. 유다는 패배를 직감했지만, 도망은 거부하였다. “우리가 죽어야 할 때가 왔다면 우리 동포를 위해서 용감하게 죽자.”(9,10). 치열한 전투 끝에, 그는 참으로 착한 목자답게 장렬한 죽음을 맞았다. 제3부(9,23-12,52)는 유다의 형제 요나단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투사라기보다는 외교관이었다. 요나단은 신생 유다국의 확장과 강화를 위하여 시리아 왕권을 둘러싼 암투와 갈등 속에서 이득을 취하는 법을 알았다(l0장). 시리아의 동의 아래서 그는 기원전 133년에 대사제가 되었다(10,21). 한 해 뒤에 예루살렘과 그 지역의 해방이 선언되고(10,31), 요나단은 군주들이 입는 진홍색 사제복을 입고 그 지방의 군사 및 행정 책임자로 인정되었다. 제4부(12,53-16,24)에서는 기원전 142년 요나단이 살해당한 후 마지막 마카베오 형제인 시몬이 유다인의 대사제요 군주로서 그 지도력을 물려받았다. 그는 현명한 정치인으로서 완전한 정치적 독립을 성취하고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구가하게 하였다 시몬이 살아 있는 동안 유다의 땅은 평화를 누렸다. 그러나 그 피붙이들은 안정 체제를 유지하지 못하였다. 예리고의 사령관이었던 시몬의 사위 프톨레매오는 시몬과 두 처남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고는 그들을 잔인하게 살육하였다(16,16). 다행히도 시몬의 다른 한 아들 요한 히르카누스가 그 모반을 분쇄하고, 아버지의 후계자가 되었다. 이렇게 하여 하스모네아 왕가가 세워진 것이다. 유다인의 왕이라는 칭호로 세속의 통치 권력을 누렸던 이 가문도 이두메아 사람 헤로데의 점령으로 몰락하고, 왕권은 유다로부터 떠나고 말았다. 이는 그리스도의 탄생 직전에 일어난 일이다. 마카베오 하권은 키레네 사람 야손이 쓴 다섯 책을 요약해 놓은 것으로, 마카베오 상권과 같은 시대의 이야기를 담은 것이다. 저자는 그 서론(1,1-2,18)으로서, 이집트에 사는 유다인들에게 성전 봉헌절(hanukkah)의 축제를 지내라고 권장하는 예루살렘 유다인들의 두 가지 편지를 수록하고 있다. 이 성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그 끝마다 연례 축제를 제정하고 있다. 즉, 성전의 정화를 기념하는 빛의 축제인 봉헌절(10,5-8)과 니가르노를 쳐 이겼던 유다의 대승전을 기리는 니가르노의 날(15,35-36)이다. 두 부분은 각기 두 대목(3,1-4. 6 및 4,7-10,9; 10,10-13,26 및 14,1-15,37)으로 나뉘어, 유다인들을 박해하였던 시리아 왕들을 다루고 있다. 마카베오 하권의 저자는 유다 마카베오의 용맹스러운 투쟁에 있어서 신앙과 실천의 측면을 두드러지게 강조하고 있다. 하늘로부터 내려온 신앙의 불꽃, 지상의 모든 고통을 사르는 이 불꽃이 마카베오들의 가슴 속에서 불타 올라 그 어머니와 함께 율법을 위한 순교를 감내한다(7장). 이러한 신앙의 불꽃이 유다와 그 추종자들에게 용기를 주어, 도저히 맞설 수 없는 막강한 적군을 물리치게 한 것이다. “적군은 자기들의 무기와 무용심을 믿고 있지만 우리는 전능하신 하느님을 믿고 있다. 하느님은 우리를 공격해 오는 적군들은 물론 온 세상까지 눈짓 한 번으로 쳐부술 수 있는 분이시다”(8,18). 이것이 바로 유다의 승리를 이끌어낸 정신이다. 이러한 정신에서 유다는 기도와 단식, 하느님 말씀의 봉독을 통하여 부하들에게 전투 훈련을 시켰다(13,12; 11,9; 8,23). 승리를 얻은 다음에는 감사의 찬미가를 부르고, 고아들과 과부들과 더불어 전리품을 나누어 가졌다(8,28). 그들은 “하느님의 도우심”(8,23)과 “승리는 하느님의 것”(13,15)이라는 표어를 암구호로 삼았다. “손으로는 싸우고 마음으로는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면서”(15,27), 그들은 유다의 지휘 아래 적군을 때려 눕혔다. 유다는 몸과 마음을 다 바쳐서 자기 나라의 수호에 앞장섰고, 자기 동족을 위하여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마카베오서는 유다이즘과 헬레니즘 사이의 극에 달한 대립상을 보여 주고 있으며, 이 두 문화는 한층 더 높은 그리스도교 계시 안으로 흡수된다. 또한 마카베오서가 제시하는 순교의 이상, 민중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의 몸과 마음을 희생 제물로 삼아 하느님께 온전히 바치는 그 이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은 그 수난과 부활을 통하여 유다이즘과 헬레니즘이 추구하는 궁극의 목적을 성취하신 것이다. 마카베오 전사들은 성전을 위하여 율법을 위하여 살고 또 죽었다. 하지만 그러한 투쟁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유다이즘은 성취되었다. 마카베오 영웅들이 성취하지 못하였던 유다이즘과 헬레니즘 사이의 평화를 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신 것이다. (Pathways in Scripture에서 강대인 편역) [경향잡지, 1989년 1월호, 다마수스 빈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