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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욥기: 현대인의 문제 의인의 고통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03 조회수3,716 추천수1

[성서의 세계 - 구약] 욥기 : 현대인의 문제 의인의 고통

 

 

교회와 더불어 욥기를 읽는 사람은 상당한 친근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욥기의 저자와 그 등장 인물들은 ‘현자’(賢者) 계층에 속한 사람들로서 근동의 문학과 자연 지식, 윤리와 외교에 정통하였다. 현자들인 욥과 세 친구가 나눈 대화는 의인의 고통에 관한 문제이다. 그러기에 욥기는 구약 성서 가운데서 가장 인간적이고도 가장 현대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교조주의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현대의 독자들은 소견머리가 좁고 독선적인 ‘정통주의자’들이 하느님의 확정 판결을 받는 이 영적인 드라마를 성서 속에서 발견하고 놀라 기뻐할 것이다. 의혹과 비탄의 심연을 거쳐 마침내 “나의 변호인이 살아 있음을”(19,25) 믿는 사람을 하느님께서 사랑하신다고 선포한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전통의 대표자들이 부지중에 사탄의 주장을 대변하고 마는 이 ‘연극’ 대본이 그리스도 강생 500여년 전에 쓰여져 성서의 정경이 되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바로 욥기에서 “빠져 나갈 길은 앞뒤로 막히고 하느님께 영락없이 갇힌”(3,23) 사람을 우리는 발견한다. 어쩔 수 없는 불행에 휩싸여 자신의 전통적인 신앙이 산산이 부서진 다음에도, 욥은 한층 더 폭넓고 심오한 지평에서 하느님을 찾고 있다. 이 욥이 바로 ‘현대인’이다. 사실, 욥은 모든 시대의 현대인이다.

 

욥은 선택된 백성이 아니라 에사오의 한 후손인 에돔 사람이었다. 그는 시나이산 특별 계시의 빛 속에서 살지 못하였다. 소위 제도 ‘교회’에 속하지 않는 민중으로서 한갓 ‘국외자’에 불과하였지만, 하느님을 창조주로 섬겼다. 욥은 바로 한 사람이다. 한 사람으로서, 하느님께서는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그토록 커다란 기쁨을 맛보시고는 조그만 잘못도 엄벌하신다는 그런 고정 관념에 그는 반역을 감행한다(10,7-22). 그는 온 마음으로 삶을 사랑한다. 그는 본성과 동떨어진 사람이 아니다. 욥은 그 무엇보다도 극도의 고통에 짓눌리는 영혼의 고뇌에 대한 이해를 갈구하고 있다. 그가 진정으로 찾고 있는 것은 신학문제에 대한 해답이 아니라 바로 벗이다. 욥기의 놀라운 ‘현실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많은 사람들은 욥기의 ‘현대성’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나병이 들어 잿더미에 앉아 하느님께 끝없이 불평이나 퍼부어 대는 인물로 사람들이 욥을 잘못 알고 있는 까닭이다. 실제로, 욥은 비참한 불행의 심연에 던져져 하느님의 선하심을 믿는 확고 부동한 신앙의 반석에 가닿은 사람이다. 욥기는 신앙의 힘으로 운명을 딛고 일어서서, 겸허한 마음으로 하느님은 우리 편이라는 확신에 차 기뻐하는 한 인간의 이야기다.

 

욥기를 읽으면서 유의하여야 할 일은 욥과 세 친구들 사이에 오가는 논쟁의 이지적인 결과를 지나치게 중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의인이 당하는 고통이란 죄의 결과도 아니고, 하느님께서 불공평하시다거나 그 분의 지혜와 권능이 부족하여서도 아니다. 결국 의인이 당하는 고통의 문제에 대한 결정적인 해답은 논리적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이것은 곧 욥기라는 드라마 전체가 추상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왜 하느님을 두려워하는가?”(1,9)라는 구체적인 신앙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말이다.

 

작가는 그 서막에서 욥이 당하는 고통의 원인을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상황 설정을 위한 것이지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고통의 원인이라 할 수 없다. 욥은 가진 것을 모두 잃고 험한 나병이 들어 잿더미 위에 앉아서도, 하느님의 영광을 충실하게 증언하고 있다. 우리는 자신의 처지 때문에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았는데 나쁜 것이라고 하여 어찌 거절할 수 있단 말이오?”(2,10). 이 장면에서 욥을 위로하겠다는 세 친구들이 나타나지만, 그 재난을 하느님의 징벌로만 볼 뿐 욥의 고뇌를 이해하지는 못한다. 어떠한 위로도 받지 못한 채 이렛 동안 영혼의 ‘어둔 밤’을 지나며, 욥은 자기의 생일을 저주한다(3장). 그 애절한 비탄은 하느님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의 울부짖음이다. 이는 무죄한 사람들의 고통이 안고 있는 불가해한 어둠을 말해 주고 있다. 이 장은 저 유명한 예레미야의 불평(20,14-18)을 시적으로 전개시켜 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태 27,46)라고 부르짖으시는 예수님처럼, 욥은 자신의 고통 속에서 하느님의 정의를 찾지 못하고 하느님께서 자기를 버리셨다는 것을 절감한다.

 

4-31장에 이어지는 욥과 세 친구들의 논쟁은 의인이 당하는 고통의 문제에 관한 찬반의 논리 전개가 아니라, 엄청난 유혹의 밤을 지나 솟아오르는, 욥의 신앙에 관한 드라마이다. 이 논쟁은 세 마당으로 이루어져 친구들의 말에 욥이 대답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친구들은 사람을 두 가지 부류로 나누는 전통적인 인과 응보 교리를 설명한다. 하느님께서 온갖 물질적인 축복을 베풀어 주시기에 행복한 의인들과, 하느님께서 벌을 내리시기에 불행한 악인들로 나누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알든 모르든, 분명히 죄를 지은 것임에 틀림없다. 하느님께서는 정의로우신 분이시기에 무죄한 사람을 벌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친구들은 욥에게 이전의 재산을 다시 얻으려면 그 고통을 하느님의 응징으로 감수하라고 권한다. 친구들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사탄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욥이 굴복한다면 하느님께서 지는 것이다. 사실, 욥의 고통은 인간적인 응보 정의에 관한 온갖 기준을 넘어서고 있다. 여기에 반하여 그 부르조아 친구들은 하느님과 이 세상을 자기네의 왜소한 틀속에 가두려고 한다. 욥은 친구들의 마음을 구하지만, 그들은 ‘경건한 계산’을 앞세워 자신의 텅빈 영혼을 가리며 그 자기네 계산법에 스스로도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속이고 있다. 여기에 깊이 실망한 욥은 인간적인 정의의 법정을 떠나 그 진정한 벗인 하느님께 직소한다.

 

첫째 마당에서, 친구들은 욥에게 다소 정중한 충고를 한다. 엘리바즈는 죽을 인생이 어떻게 하느님 앞에서 올바를 수 있겠느냐며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라고 한다. 다분히 책략적인 충고지만, 욥은 나중에 이를 받아들인다. 그 충고는 결국 고통을 하느님의 징벌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는 욥을 짓누르는 그 엄청난 고통이 무엇인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서 작가는 노련한 방법으로 ‘환자의 심리’를 이용하여 즉시 이 드라마 전체의 핵심을 보여 준다. 환자는 원칙을 찾지 않고 이해를 구한다. 욥은 친구들에게서도 그리고 친구들이 말하는 ‘가슴이 없는’ 경찰 같은 하느님에게서도 이해를 받지 못한다(6,14-17; 7,20). 엘리바즈가 한 얘기를 좀더 노골적으로 되풀이 한 빌닷(8장)에게 답변하며, 욥은 절대 권력자 앞에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할 길이 없어, 하느님과 자신을 이어 줄 중재자를 요청한다(9장). 절망의 지극한 어둠 속에서 욥은 감동적인 격정의 독백을 쏟아 놓고 있다(10장). 가장 젊은 친구인 소바르는 가장 무례하고도 교조적으로 거친 시비를 걸어온다. 신앙의 수호자로 자처 하는 그는 사람들을 회개시키기 위하여 공격을 감행하는 것이다(11장). 그 진부한 말이 신랄한 분노를 야기시키고 있다. “참으로 자네들만이 유식하여, 자네들이 죽으면 지혜도 함께 죽겠군”(12,2). 미끄러지는 놈은 밀쳐도 괜찮다고 하며 불행한 사람들을 천더기로 보는 부자들의 몰인정한 세상!(12,5). 욥은 이 세상이 값싼 낙천주의를 정당화시켜 주지 않는다는 것을 절절하게 깨닫고 있다. 인간들의 정치를 보라(12,24-25). 부실한 사람들에게 혐오를 느낀 욥은 절망의 바닥에서 무죄한 몸을 던져 목숨을 내걸고 하느님의 분노에 맞서리라고 다짐하지만(13장), 결국엔 용기를 잃고 말아, 그 지친 영혼은 인간의 허무에 대한 감동적인 비가를 토한다(14장).

 

첫째 마당의 이 절정에서, 자신의 벗인 하느님과 더불어 사는 사후 생명의 가능성을 엿보았던 욥은 둘째 마당(15-21장)에서 한층 더 신랄해진 친구들로부터 자신의 불경에 대해 비난받는다. 하느님과 싸우는 오만한 사람을 비난하는 엘리바즈에게서 욥은 인간의 적으로 나타나는 하느님의 무서운 모습을 보지만, 하늘에서 자기를 위하여 증언하여 주실 또 다른 하느님께 대한 신앙으로 공포의 신을 이겨낸다. 하나의 대단한 역설 가운데서 욥은 하느님으로부터 벗어나 하느님께 상소하고 있다. 인간적인 정의의 하느님이 아니라 그보다 더 높은 하느님께 간청하는 것이다. 빌닷에서 하는 답변(19장)에서, 욥은 무덤에서 일어나 자신의 송사를 옹호하여 주시는 살아 계시는 분의 땅에 서 있는 자신을 깨닫는다(19,23-27). 하느님을 변치 않는 영원한 친구로 믿는 욥의 신앙은 그를 바로 부활의 문에 이르게 한다. 이 장엄한 신앙 고백과 더불어 욥 개인의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일반적인 응보의 정의라는 문제는 풀리지 않았다. 의인의 행복과 악인의 불행을 그릇되게 일반화시킨 소바르(20장)에게 “재난이 밀어닥치는 날, 악인은 난을 피한다.”고 욥은 대답한다.

 

셋째 마당(22-31장)에서, 친구들은 욥의 답변에 욕설을 퍼부어 대며 욥을 중죄인으로 몰아세우지만, 그것은 분명 중상에 불과한 것이다(22,5-11). 이 어두운 조락을 배경으로, 욥이라는 인물은 차츰차츰 부각되어 저 아름답고도 위대한 신앙 고백(29-31장)에서 그 신앙인의 인품이 완전하게 드러나고 있다.

 

욥이 현자들인 세 친구를 침묵시키고 난 후, 젊은 율법 교사인 엘리후가 거만하게 등장하여 장광설을 늘어 놓는다(32-37장).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보잘것없는 몰골만을 드러내면서, 지고의 심판자와 욥 사이에 있는 어둠을 가시게 하였다. 폭풍 속에서 나타나시는 엄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엘리후와 세 친구들을 무시한 채 직접 욥에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의인의 고통에 대한 합리적인 이유나 욥이 당하는 불행의 까닭을 밝혀 주시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위업에서 드러나는 당신의 심오한 인격을 계시하신다(38-41장).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모든 사람의 아버지라고 밝혀 주신다.

 

욥이 자신을 비방한 친구들을 위하여 하느님께 용서를 청할 때, 하느님의 영광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다. 이것이 바로 욥기 해석의 관건이라 하겠다. 무죄한 사람이 받는 고통은 아버지의 영광과 벗들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온전히 바치신 하느님의 아들을 가리키고 있다. 사람의 모든 이해를 초월하는 절대적인 사랑이 바로 의인의 고통에 대한 답변이다. 그 절대적인 사랑은 의인의 고통을 구원의 샘으로 변화시킨다. (Pathways in Scripture에서 강대인 편역)

 

[경향잡지, 1989년 2월호, 다마수스 빈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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